문화/책

명장, 그들은 이기는 싸움만 한다 - 전쟁사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강력 추천!

억스리 2014. 1. 27. 11:03

[출처] http://blog.naver.com/hong8706/40205319739



'전쟁과 역사' 시리즈로 유명한 임용한씨의 신작 "명장, 그들은 이기는 싸움만 한다"를 소개할까 합니당. 일단 이 책은 역사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동서양의 명장들의 삶을 돌이켜보며, 더 나아가 핵심적인 전투를 상세하게 다루고 거기서 교훈을 얻어낸다는 게 무척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특히 1~3편은 고대의 주요 전쟁을 살펴보며 이른바 '망치와 모루' 전략이 어떤 식으로 가다듬어지고 또 출현하게 되었는지 보여줍니다. 로마가 어떻게 전쟁기계가 되었는지? 더 나아가 왜 전쟁기계로서의 능력을 잃고 게르만에게 패퇴하게 되었는지? 

이런 의문을 푸는 데 굉장한 도움이 됩니다. 기본적으로 모루 역할을 해야할 중장보병의 경제적 기반이 사라지면, 망치가 아무리 때려봐야 상대를 포위할 방법이 없다는 것. 더 나아가 아프리카 기병을 얻지 못하고 그들을 먹이지 못할 때에는 망치도 역시나 역할을 못한다는 거를 절절히 느끼고 나니.. 참 허망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그렇더군요.

특히나 저의 관심을 사로잡은 부분은 바로 '기효신서'를 집필한 명나라의 명장 척계광을 다룬 6장이었습니다. 척계광은 명나라를 괴롭혔던 난적 중의 난적. 왜구를 쳐부순 전설적인 장군이죠. 사실, 임진왜란 때 '전쟁기계'인 왜넘들을 만나 고생했던 조선의 입장에서 척계광은 이순신 장군만큼이나 기적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명나라의 군사제도부터 살펴보면, 명나라의 모든 군인은 대를 이어내려오는 무인 가문의 출신이어야 했었습니다. 태조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운 후 '군호'라는 병역 의무를 다할 군인집단을 지정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평소에는 농사짓고 살다가 전쟁나면 소집되어 군대를 편성하고, 그 중에서 뛰어난 무사는 장교와 군관으로 삼았죠. 이론적으로는 꽤 괜찮은 제도 같지만, 봉급도 받지 않고 위험한 병사 생활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리 없어서.. 결국 200만 명의 서류상 병사는 사실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결국 왜구들이 명나라의 가장 부유한 지역, 강남을 노략질 할 때 맞써 싸울 병사들은 '징집병'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병사들은 전문적인 킬러집단. 왜구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인해전술'로 밀어붙일 수 있으면 좋지만.. 왜구들은 인해전술을 격파하는 장기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건 다름 아닌 '일본도'였습니다. 한국의 역사적인 기적적 테크놀러지가 '청자'라면, 일본의 세계 최첨단 기술은 '일본도'였습니다.

무시무시하게 날카로워 징집병들이 가지고 나온 창이나 낫을 한번에 잘라버리며, 게다가 잘 부러지지도 않는 탄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제작 방법에 대해서는 위 '그림' 밑의 링크 참조). 결국 밀집 대형 한가운데에 한명의 왜구가 뛰어드는 순간, '인해전술=대량학살'의 등식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명나라는 척계광이 등장할 때까지, 처참한 지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척계광 역시 처음부터 연전연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징집병 데리고 왜구와의 전투에 나갔다가 목숨만 살려 도망칠 정도로 처참하게 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두 가지 혁신을 일으킵니다. 첫 번째는 무기를 개선시켰습니다. 일본도에게 기존 무기가 전혀 통용되지 않으니, 일본도를 막을 무기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척계광이 개발한 첫번째 무기가 바로 삼지창입니다. 창의 끝 부분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창으로, 사극에서는 고려시대에도 등장하나.. 이건 고증 실패라고 합니다. 

삼지창의 갈라진 부분으로 자신을 향해 찔러오는 칼을 차단할 수 있고, 일본도에게 한 두개가 잘라지더라도 얼마든지 공격을 계속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대단한 혁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지창에 못지 않게 중요한 혁신적인 신무기는 바로 '낭선'이었습니다(오른쪽 '그림' 참조). 낭선은 한 마디로 가지가 줄줄이 달린 대나무를 의미합니다. 

척계광은 낭선과 삼지창을 든 군대를 '원앙진'으로 훈련시켰습니다. 전투부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 같지만, 수컷이 죽으면 암컷이 따라 죽는다는 원앙의 전설에서 따온 것으로 한 팀이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공동운명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원앙진은 아래와 같이 모두 12명으로 이뤄진 팀으로, 근접전을 벌일 때는 등나무 방패를 든 요도수 2명이 장창병을 보호합니다. 이때 우측의 요도수는 대형 방패를 들고, 좌측의 요도수는 작고 둥근 방패를 들고 표창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밖의 2명은 대나무 곁가지를 그대로 두고 끝에 독을 바른 철편을 붙인 죽장창의 일종인 낭선을 사용하여, 난입하는 왜구의 일본도를 막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대열 후미의 2명은 삼지창을 사용하는데.. 이들이 최종적으로 난입한 왜구의 숨을 끊는 역할을 합니다이상과 같이 전투병 10명에 대장 1인과 취사병인 화병 1인을 합쳐 12명이 1개 원앙진을 구성했다고 합니다. 




그럼 왜 이런 진법과 괴상한 신무기를 개발했는가? 낭선은 보기에는 우스운 무기 같지만 거의 10층의 가지고 구성되어 있고 범위가 넓어서, 빠르고 궤적이 잘 보이지 않는 일본도의 공격을 저지하는 데 효과적이었다고 합니다. 칼을 든 상대와 싸울 때 전문 칼잡이가 아니면 칼로 맞상대 하기란 불가능한데, 이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최전방 요소수들이 들고 있는 등나무 방패 역시 같은 목적입니다. 등나무 줄기를 둥글게 감아 골조를 만들고 대나무 껍질로 엮은 이 방패는 질기고 가벼워서 일본도와 같이 빠른 무기를 저지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습니다. 낭선과 마찬가지로 여러 겹의 등나무 줄기가 찢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때문에 철판보다 강도가 떨어져도 일본도에 대한 저항력이 훨신 강하며, 무엇보다 싸고 만들기 쉬워 군수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치는 세 명 가운데 한 명만이 실질적인 공격무기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비효율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 척계광이 처한 상황(고립된 지휘부, 풍부한 농민 인력, 정교한 무기를 제작할 역량의 부족)을 고려하면 최선의 합리적 대책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무기로 무장한 원앙진은 매우 정교한 전술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책 247 페이지 부분).

방패가 큰 방패와 작은 방패로 나뉜 이유는 큰 방패를 든 사람은 분대의 선두에서 칼을 들고 지휘하는 임무를 맡기 때문에 스스롤르 보호해야 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반면 낭선과 협력 전술을 펴야 하는 등패는 둥글로 작은 방패로 시야를 확보하는 데 효과적이다. 등패를 든 병사들은 다른 무기를 들고 공격을 할 수 없으므로 표창을 지급 받았다. 이들은 왜구가 달려들면 표창을 던져 타이밍을 끊고 방어에 임한다. 
신무기와 새로운 전술을 이용해 척계광은 믿을 수 없는 연전연승을 기록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왜구들이 명나라 군대를 유인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장소에 밀집진형을 만들도록 유도하고 학살했지만, 척계광의 병사들은 왜구를 유인해 격파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 결과 강남지방 지주들의 지원까지 가세하여, 1561년에는 6천 명으로 군대가 불어나며 척계광의 부대는 절강성에서 5년간 80여 차례의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하는 기적같은 결과를 보여줍니다. 당시 명나라 조정의 최고 권력자 장거정은 척계광의 공로를 인정해 무장으로서의 최고 지위 '총병'으로 승진시키고, 인접한 광동성과 복건성으로 파견해 역시 왜구를 박멸하게 됩니다. 

명나라가 왜 그렇게 오랜 기간 유지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척계광과 같은 명장이 출현했고, 장거정과 같이 공로를 인정해 승진시키고 지원하는 명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왜구를 토벌한 다음, 척계광은 북방으로 파견되어 몽고병과의 전쟁을 또 다시 승리로 이끄는 등 상대를 가리지 않고 그 '강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장거정이 실각한 후 척계광에게도 힘든 시기가 찾아옵니다. 사소한 문제를 트집잡아 직위에서 물러 났으며, 이후 분노와 절망감 속에서 요절함으로써.. 이후 시작된 만주족과의 전쟁에서 명나라는 '명장'없이 전쟁을 해야하는 곤경에 취하게 됩니다. 척계광의 사례를 보면서 두 가지의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한명의 탁월한 인물이 역사를 얼마나 바꿔 놓을 수 있는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무리 뛰어난 시스템을 만들고 효과적인 전술을 만들더라도, 그가 사라지는 순간 다시 역사의 흐름이 재개된 것을 느꼈습니다. 아마 조선에서 이순신 장군의 역할이 이러했겠죠. 그가 만든 강력한 함대는 곧 잊혀졌으며, 조선의 수군이 다른 나라와의 교역로를 안정시키고 더 나아가 남방 진출했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