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라이프니츠가 만난 중국

억스리 2014. 1. 28. 10:41

라이프니츠가 만난 중국 - 라이프니츠, 이동희 역

 

 

라이프니츠| 이동희 역| 이학사| 2003.10.25 | 285p    

동양과 서양의 이성적 합일을 꿈꾼 진정한 세계인, 라이프니츠
서양 근대 정신을 대표하는 천재적인 사상가 라이프니츠. 철학, 수학, 자연과학, 법학, 신학, 언어학, 역사학 등 활동하지 않은 분야가 없는 오지랖 넓은 슈퍼맨 라이프니츠. 그런 라이프니츠가 중국을 만났다. 그는 중국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은 뿌리 깊은 편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이라고 해서 사정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서양인의 눈에 동양은 언제나 미신적인 신비함으로 충만하거나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불결하고 미개한 그런 곳이었다. 라이프니츠라고 해서 그 오리엔탈리즘을 피해 갈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이 고개를 들 법도 하다. 하지만 그는 중국을 기독교의 섭리를 모르는 무지한 백성의 나라로 본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중국을 선망한다.

 

그 누가 문명화된 생활의 규율 전반에 있어 우리를 능가하는 민족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렇지만 이제 중국인들에 대해 더욱 잘 알게 되면서 우리는 중국인들이 그러한 점에서 우리보다 낫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매우 부끄러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실천철학은 확실히 우리보다 월등하다.(본문 38쪽)

 

라이프니츠는 ‘기독교라는 신의 선물을 제외한다면 유럽이 중국보다 뛰어난 것은 없을 것’이라고까지 한다. 그러나 이런 평가를 내렸다고 해서 그가 막연한 이국 취향에 젖어 중국을 찬양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라이프니츠는 중국에 간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중국을 만날 수 있었을까?

 

라이프니츠, 중국을 만나다!
라이프니츠는 마테오 리치(1552~1610) 등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번역한 <주역>, <논어> 같은 중국 고전과 중국에서의 선교 경험을 기록한 글을 통해 중국을 만났다. 그것은 라이프니츠 개인의 경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럽 전체의 중국 경험, ‘한류韓流’라는 유행어를 빌자면, ‘한류漢流’라는 열풍이었다. 라이프니츠는 중국을 인간의 자연 이성에 기초해 고도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문명을 이룩한 모범 사례로 꼽았다. 그는 당시 도덕적으로 피폐해진 유럽이 중국에 의해 계몽되기를 희망하기도 하였다.

 

우리 유럽이 직면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고 있는 도덕적 타락을 바라보면서 나는 우리가 계시신학을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들을 그들에게 보냈던 것처럼 중국 측에서도 우리에게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자연신학의 적용과 실천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본문 45쪽)

 

라이프니츠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중국의 문화와 정신 세계를 긍정적으로 이해하여 중국을 유럽에 소개하고자 분투했으며, 동서양이 서로의 결점을 보완하여 진정한 정신적 일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 중국에 대한 유럽의 평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기독교 진리의 일방적인 우월성을 강조하는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이 중국의 문화 전통을 깡그리 부정했던 것이다.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이런 배타적인 태도에 대해 유럽의 편협한 생각과 풍습을 다른 나라에까지 강요한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유럽의 이러한 처사에 분노한 청나라 옹정제(1678~1735)는 기독교 선교를 전면 금지하여 동양과 서양의 교류는 흐지부지되고 만다.

 

또한 유럽에서는 자연에 대한 인간 이성의 우위를 강조하는 사조가 등장하여 ‘자연과 이성의 일치’라는 라이프니츠의 이상도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덩달아 중국도 이성이 자연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나라라는 평을 듣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헤겔과 엥겔스로 헤겔은 중국을 역사적 발전이 없는 정체된 사회라고 했고, 엥겔스는 중국인이 안일하고 숙명론에 빠져 있다고 했다. 이런 견해들은 동양의 여러 국가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겨 식민지로 삼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라이프니츠 사전에 ‘오리엔탈리즘’은 없다!
라이프니츠는 다양한 분야에서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겨 그의 저술은 아직까지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고 있다. 라이프니츠의 중국에 대한 저술 가운데서 편역자가 중요하다고 여겨 엄선한 글이 실려 있는 이 책은 중국의 문화와 종교 그리고 철학에 대해 쓴 서신과 소논문, 라이프니츠의 중국에 관한 저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인의 자연신학론>, 라이프니츠의 중국관이 형성된 배경을 설명한 편역자의 해제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의 서신과 소논문에서는 중국의 제례가 유일자에 대한 종교적인 예배가 아니라 일반적인 의식일 뿐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 관용적으로 접근하여 중국과 교류를 시작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과 <주역>의 괘상이 자신의 이진법 산술 체계와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두 문명을 이어줄 보편 문자를 창안할 수 있으리라는 지적인 희열로 가득 차 있는 라이프니츠를 만날 수 있다.

 

제2부 <중국인의 자연신학론>에서는 중국의 전통 문화를 존중하며 기독교를 선교한 예수회 선교사들과 기독교 우월주의에 입각해 중국의 전통 문화를 무시해버린 반예수회 선교사들의 글을 대비하여 어떤 이유에서 중국을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는지를 조목조목 따지고,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이라는 중국철학의 주요 개념에 대한 비난이 전혀 근거 없는 것임을 밝히는 라이프니츠의 치밀한 논리 전개를 엿볼 수 있다.

 

제3부에서는 라이프니츠 당시의 유럽과 중국의 교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분석한 편역자의 설명을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 선교했던 선교사들의 활약상과 라이프니츠의 중국에 대한 사유가 어떤 경로를 통해 형성되었는지, 그의 중국관이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는지를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국이 조만간 세계 최대의 시장이 될 것이라며 중국을 알아야 공략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중국 학습 열풍도 이제는 전 세계적인 것이 된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며칠 전 중국은 유인 우주선을 쏘아 올렸다. 공자와 맹자를 운운하던 중국이 우주선을? 이미 3백 년 전에 중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라이프니츠가 살아 있었더라면 뭐라고 논평했을까? 중국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나라였다고 했을까? <라이프니츠가 만난 중국>에서 이질적인 문화의 중국을 ‘다양성의 인정’이라는 포용성에 근거해 평가했던 라이프니츠를 목격한 독자들은, 동서양의 교류가 빈번해져 더 이상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오늘날에도 그의 포용성이 유효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인터파크 제공]  

 

라이프니츠(1646~1716) 
프리드리히 대제가 “대학 그 자체”라고 부를 정도로 외교, 정치, 법률, 역사, 수학, 자연과학, 신학, 형이상학, 논리학, 언어학, 연금술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비범한 능력을 발휘한 천재였다. 그는 이전의 철학적 전통들을 새롭게 종합하여 모든 지식을 단일 체계로 결합하고자 하였다. 한편 그는 『최신 중국 소식』과 「중국인의 자연신학론」을 통해 중국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서양 정신사상 지식의 전 영역을 섭렵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눈부신 업적을 남긴 마지막 인물이 된 라이프니츠는 고대의 초월철학과 근대의 주체철학을 동시에 극복하는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사상가로 다시 조명되고 있다. [인터파크 제공] 

 

목차 


머리글

 

제1부 중국의 문화와 종교와 철학
1. 그리말디 신부에게 보낸 서신
2. 창조의 비밀
3. <최신 중국 소식>에 관하여
4. <최신 중국 소식>의 서문
5. 공적인 공자 제사에 관하여
6. 0과 1만을 사용하는 이진법 산술에 대한 해설
7. 중국인의 제례와 종교에 관한 소견

제2부 중국인의 자연신학론
1. 중국인의 신 관념
2. 신의 창조물 혹은 제일질료 혹은 신들에 관한 중국인의 견해
3. 중국인의 영혼, 영혼 불멸, 사후의 보상과 처벌론
4. 중국 제국의 창시자 복희가 자신의 글과 이진법 산술에서 사용한 문자에 관하여

제3부 <중국인의 자연신학론>을 중심으로 살펴본 라이프니츠의 중국관
1. 라이프니츠의 생애와 중국
2. 라이프니츠의 「중국인의 자연신학론」 집필 동기
3. 라이프니츠의 서신에 나탄난 논쟁의 배경과 그 인물들 : 마테오 리치, 롱고바르디, 생트 마리
4. 「중국인의 자연신학론」과 전례 논쟁
5. 「중국인읜 자연신학론」의 구조와 그 내용
6. 라이프니츠와 요하임 부베
7. 중국철학과 서양철학의 일체에 대한 진지한 모색
8. 라이프니츠와 동서 교류의 가능성

주석
참고 문헌
찾아보기                                                                                                         [알라딘 제공]


 

미디어 리뷰 

 
이진법이 엮어준 라이프니츠와 중국

 

지구인은 외계인에 대해 관심이 많다. 이 관심은 문학·영화의 단골 소재가 되거나 탐험, 현장 조사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은 근원적으로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누가 지구마을 대표로 외계인을 찾아 나섰다가 실제로 만난다면 그 존재의 무엇을 제일 먼저 탐색하려고 혈안이 될까 생명이나 지능이 답이 될 만하다. 지구인은 지능을 가진 생명체의 발견에 촉각을 곤두세우기 때문이다. 혹시 나보다 우월적 힘을 가진 존재가 언젠가 불쑥 출현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다.

 

〈라이프니츠가 만난 중국〉은 라이프니츠가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해주는 서신, 번역서 등을 통해 중국의 문명과 대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이는 상대를 중국이 아니라 통일강국 진나라를 연상시키는 치나(Tschina), 친(Tzin)으로 알고 있었다. 이 점만으로도 그이는 동아시아 문명에서 중국 이름의 상징성, 곧 유일한 중심성에서 자유로웠던 셈이다. 일본도 중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추진하면서 자기를 중심으로 보게 되자 중국을 지나로 부르지 않았던가.

 

라이프니츠는 유럽의 외계인 동쪽 사람들에 대해 뭐든지 강렬하게 알려고 했다. 그이는 앎의 동기를 단순히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문명의 상호 보완(예법과 은총)을 위한 건전한 거래에 두었다. 현실에서 유럽인은 16세기부터 기독교적인 전 세계 군주국이나 천년 왕국의 최종적 완성을 위해 동아시아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17세기의 라이프니츠도 문을 부술 듯한 엄청난 굉음과도 같은 노크 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선교자 통해 중국문명 탐구
물질 넘는 정신세계로 복권 노력
주역의 이진법 발견이 계기


만남의 단골 주제는 천주, 상제, 귀신과 영혼, 제사와 관련이 있다. 이것을 물음의 꼴로 바꾸면 중국에는 기독교와 같은 신이 있는가 없는가, 기독교의 신을 중국어로 어떻게 표기해야 하는가, 제사는 우상 숭배인가 아닌가 등이 된다. 이 물음은 기독교가 전도되는 어떠한 국가에서도 반복해서 나타났다. 17세기의 경우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순수한 최선의 선교 전략만이 아니라 선교의 주도권을 둘러싼 국가 간의 대립과도 맞물려 있었다.

 

라이프니츠가 관심을 집중한 주제는 이(理)의 존재론적 지위 문제였다. 조선에서는 이와 기(氣)가 서로 ‘떨어지느냐 뒤섞이느냐’를 두고 논쟁이 되었다. 유럽에서는 이가 ‘형상이냐 질료냐’가 초점이었다. 동아시아의 범주 개념인 이가 질료가 된다면 그곳은 우연에 휘둘리며 감각적 물질에 매몰된 낮은 차원의 세계로 전락한다. 라이프니츠는 중국이 한갓 유물론의 세계로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구원하려고 했다. 그이는 이를 물질을 넘어선 정신적 실체, 제일원리로 복권시킨다. 물론 중국이 계시 신학이 아니라 자연 신학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을 잊지 않는다.

 

그이가 편견에서 상당히 자유로울 수 있었던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이가 질서로운 세계의 상징으로 보는 이진법(수학)이 4000년 전의 〈역경〉에 들어 있다는 점을 발견한 데에 있다. 우리는 악의 처리에 미숙했던 만큼 세계화 시대에 “지금의 상황에서는 정의로운 사람도 엄청나게 악한 힘이 자기 쪽으로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또 다른 파괴를 가하는 기술을 연마해야만 한다”라는 그이의 충고를 귀담아들어야겠다. 이 책에는 〈중국인의 자연신학론〉을 중심으로 라이프니츠가 중국과 관련해서 쓴 저술이 상세한 주석과 함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한겨레신문 기사입력 2003-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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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중국의 하나 됨을 꿈꾸다

17세기 말 ‘유라시아 르네상스’ 주창 … 중국의 괘상도·실천철학 등 우수성에 ‘감탄’

라이프니츠가 중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든 키르허의 저서 ‘중국도설(China Illustrata)’에 실린 삽화들. 만주족 황제(왼쪽)와 중국 황실에 서구 천문학의 우월성을 알린 예수회 신부 요한 아담 샬이다.

우리는 멀쩡히 살고 있는데 멀리서 배 한 척이 와서 깔짝거리다 돌아가서는 ‘동양을 발견했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도 1994년 5월 유럽을 발견했다. 말로만 듣던 대륙은 실재했다. 지구 반대편에도 이성이 존재하다니. 게다가 원주민들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갖고 있었다! 내가 서양에 가서 느꼈던 감정을 서양인들은 수백년 전에 동양에서 느꼈던 모양이다.

영국의 조지 3세(1738~1820)가 중국에 대등한 국교를 청해왔을 때 청의 건륭제(乾隆帝)는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감히 섬나라 오랑캐가 중국과 맞먹으려 하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천조(天朝)의 덕이 사해(四海)에 퍼져 세계의 수많은 나라가 조공을 바치므로 중국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따라서 영국과의 교역은 필요 없다.”

 

짝사랑에서 경멸로

19세기만 해도 영국은 거대한 중국에 내다 팔 물건이 없었다. 약간의 모직과 향료를 팔아 그 비싼 차와 비단, 도자기 대금을 댈 수는 없는 일. 결제 수단이던 은(銀)의 유출로 고민하던 영국이 팔 것은 딱 하나, 아편밖에 없었다. 19세기 중반 세계에서 가장 앞선 나라의 생산력이 중국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아시아가 낙후되었다는 생각은 언제 생겼을까?

서구가 타 문화에 접근하는 일반적 공식은 선교사를 보내 정탐하고, 상선을 보내 판을 깔고, 군대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선교사를 보내던 시절에 서구는 중국에 열등의식을 느꼈다. 중국을 폄하하는 서구인의 태도는 상선을 보낼 즈음에 형성되었다. 문화를 보는 안목이 없는 장사꾼들에게 중국은 시장을 규제하는 거추장스런 존재일 뿐. 이 불평이 군대가 들어갈 때쯤에는 이미 중국에 대한 경멸로 바뀌어 있었다.

 

라이프니츠가 쓴 ‘라이프니츠가 만난 중국’.

유라시아 르네상스의 꿈

하지만 중국 땅을 처음 밟은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중국은 경이 그 자체였다. 이들의 보고서 덕에 유럽에 수많은 중국 예찬자가 생기는데,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1646~1716)도 거기에 끼여 있었다. 그가 보기에 서구의 수공업 기술은 중국과 동등하고, 사변적 학문은 중국보다 낫고, 실천철학은 중국이 서구를 능가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 우수한지 종합적 판단을 내린다면 ‘중국인에게 황금사과를 줄 것’이라고 말한다.

라이프니츠는 중간의 러시아를 매개로 유럽과 중국이 하나가 되는 새로운 유라시아 르네상스를 꿈꿨다. 이를 위해 유럽의 학자와 중국의 학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세계 아카데미’의 설립을 주장했다. “가장 문명화되었지만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민족들이 서로 팔을 뻗침으로써 두 대륙 사이에 있는 모든 민족들을 합리적 생활방식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도설’에 실린 한자의 발생에 관한 삽화.

중국과 노아의 방주

서구의 전유물로 알았던 ‘이성’이 대륙의 다른 끝에도 존재했다. 이는 모든 사유, 모든 언어, 모든 민족이 공통의 근원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라이프니츠의 생각을 더욱 굳혀주었다. 모든 사유와 언어가 한 뿌리에서 나왔다면, 원형이 되는 사고를 표현할 ‘보편문자’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모든 것을 통일해줄 보편문자의 힌트를 라이프니츠는 상형문자인 한자에서 찾으려 했다.

서구와 중국이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라이프니츠의 학문적 손자뻘인 독일의 비평가 고트셰트(1700~66)에 이르러 황당한 주장으로까지 발전한다.

“노아가 중국인들의 최초의 군주이자 조상이라는 사실만큼 개연적인 것은 없다.”

한마디로 중국문명의 아버지 황제(黃帝)가 대홍수의 노아라는 것이다. 하긴 라이프니츠보다 한 세대 앞의 천문학자 케플러(1571~1630)는 중국의 요임금이 노아의 손자라고 주장했다.

 

청나라 강희제의 초상.

괘상도와 이진법

1697년 라이프니츠는 후원자 루돌프 아우구스트 대공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새로운 계산법을 발견한 사실을 알린다. 오늘날 컴퓨터 공학의 토대가 된 ‘이진법’이다. 라이프니츠는 이 발견을 기리는 메달을 만들어 대공에게 보냈는데, 대공의 초상을 새긴 메달의 뒷면에는 이진수 표와 함께 이런 라틴어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무(0)에서 만물이 창조되는 데에는 하나(1)로 충분하다.”

그는 이를 ‘창조의 이미지’라고 불렀다. 그게 ‘무로부터 창조’라는 기독교적 관념을 명료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공허한 심연과 황량한 어두움은 무(0)에 속하는 반면, 하나님의 신은 그 빛과 함께 전능한 하나(1)에 속하므로 이 메달은 창조를 묘사하는 데에 더욱더 적절합니다.”

오늘날에는 컴퓨터가 이 신의 비밀을 이용하여 디지털의 가상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부베 신부가 베이징에서 라이프니츠에게 보낸 괘상도.

1701년 라이프니츠는 베이징의 부베 신부에게서 전설적 황제 복희(伏羲)가 만들었다는 괘상도(卦象圖)를 받고 경악한다. ‘독일 민족에게 적지 않은 명성을 가져다줄’ 이 산법이 중국에 이미 수천년 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다. 완전한 선을 1, 끊어진 선을 0으로 보면 괘상도는 이진법으로 표기된 숫자를 의미한다. 가령 태극기의 건곤감리(乾坤坎離)의 예를 들어보자.

≡ =1+2¹+2²=7

=1+0+2²=5

=0+2¹+0=2

=0+0+0=0

 

중국인도 기독교적이었다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1552~1610)는 선교를 하는 데 중국의 고전을 이용하곤 했다. 중국 경전에 나오는 상제(上帝)가 실은 서양의 천주라는 식이다. 이렇게 기독교와 중국의 자연철학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유론(補儒論)’이라 하는데, 이는 후에 롱고바르디나 생트 마리와 같은 선교사들의 비판을 받는다. 기독교 교리를 중국의 미신과 뒤섞어놓고, 기독교 의식을 중국의 제사와 뒤섞어놓았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마테오 리치를 옹호한다. 중국인들도 과거에는 신을 알았으나 후에 그것을 잊어버렸을 뿐이다. 보유론은 자신의 고대를 잊어버림으로써 기독교적 진리에서 벗어난 중국인들을 교화하는 기술적 방식이라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이(理)’의 개념이 기독교 신의 관념과 거의 일치한다면서 중국의 자연철학을 범신론 혹은 무신론이 아니라 감추어진 유신론으로 해석했다.

 

인간 귀족들

당시는 강희제(康熙帝, 1654~1722)의 시대. ‘법을 존중하고 현명한 사람을 존경하는’ 이 고귀한 황제는 플라톤이 말한 철인(哲人)군주의 전형이었다. 황제는 서예에 능하고 중국의 학문에 통달했을 뿐 아니라, 예수회 신부 베르비스트(1623~88)에게서 배워 유클리드와 삼각함수를 이해하고 산술로 천체 현상을 증명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도 그의 명성은 높아 태양왕 루이 14세가 부러워할 정도였다.

라이프니츠의 눈에는 황제만이 아니라 백성들 역시 인간 귀족으로 보였다. 중국인들은 ‘나이 든 사람에 대한 존경이 대단’하고 ‘부모에 대한 배려는 거의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농부나 하인들조차 예의를 지키며 공손하게 행동’하는 것이 ‘유럽 귀족의 고상함에 버금간다’. 농부와 하인이 이 정도니 ‘중국의 관료와

각료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뻔하지 않겠는가?’

 

라이프니츠가 개발한 계산기

산법이냐 점괘냐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중국의 한계 또한 알고 있었다. 가령 이진법을 구현한 복희의 팔괘를 중국인들은 주로 점을 치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명·청 교체기에 예수회 신부 아담 샬(1591~ 1666)은 일식을 예언함으로써 서구의 천문학이 중국의 것보다 우월함을 보여주었다. 그 덕분에 괴상한 종교를 가진 서양 오랑캐가 그나마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중국의 결정적 한계는 수학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 마침 서구에서는 라이프니츠 자신이 미적분을 발명함으로써 자연의 수학화를 완성하던 참이었다. 또 한 가지 중국이 뒤떨어진 것은 전쟁기술. 하지만 이는 중국인들이 전쟁기술에 무지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공격성을 생기게 하는 것을 경멸하며, 의식적으로 전쟁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화와 오랑캐

‘라이프니츠가 만난 중국’. 중국에 관한 라이프니츠의 글을 모은 이 책은 서구와 중국의 첫 만남의 생생한 기록이다. 라이프니츠는 두 문화가 전 인류를 위해 대등한 관계 위에서 서로 협력하기를 꿈꿨다. 서양만 선교사를 보낼 것이 아니라, 동양도 서양에 승려를 보내 자기들이 앞선 부분을 서구에 가르쳐줘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중국에 진출한 가톨릭 수도회 가운데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는 예수회와 달리 중국인들의 제사를 금지했다. 이 경직된 태도 때문에 중국에서 포교활동이 금지되고, 선교사를 통한 두 문화의 대화도 단절된다. 청나라 제5대 황제 옹정제(擁正帝, 1678~1735)는 서구의 오만함에 대해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

“만약 내가 당신들이 사는 유럽 어떤 지방에 승려를 보낸다면 당신들의 왕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정작 폐쇄적인 것은 중국이 아니라 유럽이었다.

하지만 중국이 보여준 개방성 역시 낯선 문화를 이해하고 배우기 위한 게 아니라, 귀찮게 덤벼드는 오랑캐에게 베푸는 ‘천조(天朝)의 덕’일 뿐이었다. 중국은 오랑캐에게 바라는 게 없었고 배울 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오랑캐의 군사력에 무릎을 꿇고 만다. 전쟁기술을 소홀히 하는 중국인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