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억스리 2012. 12. 24. 10:53

[출처] http://blog.daum.net/kjs1906/1582


<청춘의 독서>-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저자 유시민

 

 

머리말

오래된 지도를 다시 보다

 

길을 잃었다.

많은 친구들이 함께 여정을 떠났지만 갈림길을 지날 때마다 차례차례 다른 길을 선택해 멀어져 갔다.

아픈 다리 서로 달래며 지금까지 동행했던 사람들도, 다른 곳에서 출발했지만 어느 곳에선가부터 함께 걸어왔던 이들도 생각이 조금씩 다르다.

날이 저물어 사방 어두운데, 누구도 자신 있게 방향을 잡아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망연자실 넋 놓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이미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지도 못한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어디에서 무엇이 어긋났던 것인지 살펴보는 일뿐인 것 같다.

달그림자와 별을 살펴 방향을 새로 가늠해보고, 갈림길과 장애물이 나타날 때마다 도움 받았던 낡은 지도들을 꺼내 살펴본다.

 

 

유시민은 이 책들을 혼자 읽지 않았다.

19세기 러시아 청년들이 읽었고 20세기 우럽과 미국 지식인들이 읽었으며,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부조리한 현실과 싸우면서 읽었던 책이다. 

(.......) 이것은 문명의 역사에 이정표를 세웠던 위대한 책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위대한 책을 남긴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 책들에 기대어 나름의 행로를 걸었던 내 자신과 그 과정에서 내가 본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내 삶에 깊고 뚜렷한 흔적을 남겼던 이 책들은 30년 세월이 지난 지금 그때 내가 들었던 것과는 무척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독자도 같은 책을 두 번 읽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 이 책을 주면서 사랑하는 딸에게 말하고 싶다. 세상은 죽을 때까지도 전체를 다 볼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으며, 삶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축복이라는 것을. 인간은 이 세상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러 온 존재이며, 인생에는 가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여러 길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느 길에서라도 스스로 인간다움을 잘 가꾸기만 하면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책의 구성-총 1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위대한 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표도로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선한 목적도 선한 방법으로 이루어야 한다. 가난은 누구의 책임인가.평범한 다수가 스스로를 구한다.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악한 수단은 정당화될 수 없다. 운이 좋아 그 목적을 이루어도 이것을 행한 사람은 자책감에 벌을 받게 된다. 상황에 따라 악한 수단을 써서 정당한 목적을 꿈꾸지만 결국 이는 허울 좋은 명목에 불과하다.

 

 

‘선한 목적이 악한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처음부터 끝까지지배하고 있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선한 목적을 위해서 살인을 저지르지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아니라고 단호히 말하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선한 목적을 위해 악한 방법은 그 어떤 경우에도 옳지 않다. 최근 우리의 과거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로 정치권이 시끄럽다. 헌법을 유린한 5.16쿠데타와 유신독재가 대표적인 경우다. 국민들을 잘 먹고 살게 하기 위해, 산업화를 위한다는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악한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선한 목적이라 할지라도 선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때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대표적인 사례를 외국에서 찾았다. 스탈린이나 히틀러는 선한 목적의 명분을 가지고 다수의 사람들에게 폭력, 살인을 저질렀다. 따라서 전체주의가 바로 그 명백한 예라고 언급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무리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악한 수단을 사용한 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죄를 지으면 두 발을 뻗고 잘 수 없다는 말이다. 당연한 것이다.

동시에 ‘어째서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가난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제도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난 구제는 국가도 못한다’는 말도 있지만 다양화된 사회에서 어쩌면 가난은 그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선진국들이 각종 사회보장제도를 만들고 복지에 힘을 쏟는 것일게다.

 

2.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지식인이 어떤 존재이며 무엇으로 사는지를 배울 수 있다. 교수는 학점을 주지만 세상을 보는 지혜는 책이 준다. 지식은 맑은 영혼과 더불어야 한다.

 

지식인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데에 노력해야 한다. 또한 사실 이면에 있는 숨은 뜻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내가 대학 다닐 때도 우리나라 대표적인 불온서적으로 취급받았던 책이다. 지식인이 늘 바른 말을 할 것이라고생각한다면 이 책은 필수다.

 

3. 청춘을 뒤흔든 혁명의 매력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꿈과 희망으로 막을 내린 한 이상가의 외침이자 절규다. 영혼을 울린 정치선언문. 박제된 혁명교과서의 비애. 역사에는 종말이 없다.

 

 

4. 불평등은 불가피한 자연법칙인가?

토머스 맬더스, <인구론> 저출산 시대를 맞고 있는 지금시대를 맬서스는 예상이나 했을까? 맬더스가 무덤에서 나와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우리나라를 보면 뭐라고 이야기할까. 자선은 사회악이다. 편견은 천재의 눈도 가린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라는 유명한 구절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사람들이 굶주려 죽는 이유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로 꼽고 있다. 하지만 맬더스는 어떠한 해결책을 내어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만을 알려줄 뿐이다. 그러니 너희 하층민이 죽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무시무시한 자연법칙 때문이라고. 굶어 죽지 않으면, 질병 또는 전쟁으로 사망하여 인구조절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고 말이다. 따라서 자선 역시 사회악으로 간주한다. 소수의 가난한 사람들 구원하려고 해봤자 결국은 대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논리다. 맬더스는 그러한 임시 해결책보다는 왜 가난할 수밖에 없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 원인을 알려주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이야기한다.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5.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아렉산드로 푸시킨, <대위의 딸> 때론 푸시킨의 시도 위로가 못되는 세상이다. 삶이 나를 속인다면 슬플것 같다. 로멘스를 빙자한 정치소설. 위대한 시인의 허무한 죽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6. 진정한 보수주의자를 만나다

맹자, <맹자> 인으로 정치사상을 실현하고자 한 사상가. 역성혁명론을 만나다. 아름다운 보수주의자 맹자. 대장부는 의를 위하여 생을 버린다.

 

 

7. 어떤 곳에도 속할 수 없는 개인의 욕망

최인훈, <광장> 이념의 희생양이 되어 어느 나라에도 속할 수 없었던 주인공의 슬픈 이야기.대한민국 민족사적 정통성. 주사파, 1980년대의 이명준. 열정없는 삶을 거부하다.

 

 

8. 권력투쟁의 빛과 그림자

사마천, <사기> 유방의 신하 한신과 토사구팽. 권력은 행복이 아닌데. 새 시대는 새 사람을 부른다. 권력의 광휘, 인간의 비극. 정치의 위대함을 생각한다.

 

 

 .... 이것은 전형적인 '역할의 전도' 현상이다.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다. 시대가 바뀌고 도전의 성격이 달라지면 응전에 성공하는 주체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 시기의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한 사람들은 새로운 도전에도 예날 방식으로 응전함으로써 실패하는 경향이 있다. 새 시대는 새 사람을 부른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안철수가 대통령 후보로 등장한 경우가 그렇다. 기존 정치경험이 새시대를 이끌 수 없다는 반증이다.

 

9. 슬픔도 힘이 될까

알렉산드로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존엄을 빼앗긴 사람의 지극히 평범한 하루.슬픔과 노여움의 미학. 노동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10.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인가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시대를 바꾼 역발상, 적자생존의 이론으로 오해받는 다윈에 대한 안타까운 이야기. 다윈주의는 진보의 적인가. 이타적 인간의 가능성.

 

 

자연에는 수많은 종이 있는데 이 종은 자신이 생존할 수 있는 개체수보다 더 많은 수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소수의 개체가 살아남기 위해 진화하고 발전한다. 그 중에 변이를 하는 놈도 있고 그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면 진화로 이어진다. 자연선택설이 바로 여기서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태초에는 하나의 종이 다양한 변이를 겪고 자연의 선택을 받으면서 다양한 종이 생길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종은 이기적이다.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마저도 자신의 종을 살리기 위한 선택일 뿐이다. 곤충이 자신의 종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는 행위 역시 자신의 종의 개체수를 더 늘리기 위한 이기적인 행위일 뿐인 것이다.

 

11. 우리는 왜 부자가 되려 하는가?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 과시하기 위해서 부자가 되려하는 유한계급에 대한 일침을 가한다. 부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사적 소유라는 야만적 문화. 인간은 누구나 보수적이다.

 

 

베블런은 당시 경제학을 완전 뒤집어 생각한 경제학자이다. 경제학에서는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라고 가정한다. 물건 값이 싸면 수요가 많아지고 비싸면 수요가 적어진다. 그리고 시장의 가격은 그 중간에서 형성된다. 하지만 베블런은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부가 수단이 아니고 목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부자의 비상식적인 행위를 통해서 그 사실을 입증해내고 있다. 부자들은 물건의 가격이 비쌀수록 더 가치 있다고 여기며 수요가 증가한다. 또 파티를 열거나 사회에 기부금을 냄으로써 돈을 낭비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 지위를 결정하는 측도가 바로 사냥감의 갯수이다.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극명한 증거가 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그 방법으로서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낼 수 없다. 오늘날은 '부'가 자신의 사회적인 명성을 드높일 수 있는 척도가 된다. 따라서 부자들은 자신이 좀 더 존경을 받기 위해서 돈을 활용하며 돈 그자체가 목적이 된다고 한다.

 

12. 문명이 발전해도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토지로 인한 부의 세습과 이 문제의 타협점을 세금으로 찾아낸 휴머니스트의 노력. 타인을 일개우는 영혼의 외침.

 

 

한 사회는 계속적으로 진보하고 있는데 왜 가난, 빈곤은 사라지지 않을까?

헨리 조지는 그 원인으로 토지의 사유화를 들고 있다. 토지를 개인이 가짐으로써 노동자와 땅의 소유자의 빈부격차는 커진다. 땅을 소유한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이익, 불로소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토지 그 자체의 비옥도가 토지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상권과의 접근성이 토지의 가격을 결정한다.

사람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다양한 거래가 바로 특정한 땅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땅을 소유한 사람은 놀더라도 부가 쌓이며 땅위의 노동자들은 아무리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지는 땅만큼은 국가가 소유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귀담아 들을 이야기다. 토지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가장 비효율적인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토지만큼은 국가가 소유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이 간다.

 

13. 내 생각은 정말 내 생각일까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언론자유의 중요성을 설파한 책, 부당언론과의 투쟁으로 살다간 작가의 안타까운 모습들. 보이는 것과 진실의 거리. 언론의 자유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실 이 소설의 배경을 알게 되면 아주 흥미진진해진다. 뵐이라는 작가가 자신을 괴롭히고 탄압하던 거대 독일의 언론사인 '빌트'를 공격하고 풍자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기사의 제목과 내용을 보고 어느 정도는 진실이 아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내 생각이 내 생각인 것일까? 우리는 언론사의 생각이 마치 우리의 생각인 듯 착각하고 있다.

기사의 가해자가 정말로 가해자일까? 총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더라고 그 내막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살인자라고 쉽게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책을 읽으면 이해가 될듯하다. 카타리나 블룸은 저지른 잘못에 비해 그 댓가를 엄청나게 치르고 있다. 명예가 짓밟히고 온 국민의 지탄을 받게 되는데 그 역할을 언론사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시민은 이장의 마지막에 노무현 대통령을 언급하며 그 상황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와 같다고 말한다.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에 몰고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소설을 읽으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작금의 언론을 보면, 언론의 기사를 믿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14. 역사의 진보를 믿어도 될까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역사가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음을 얘기한 새콤달콤한 역사이야기

 

 

 

우선 <청춘의 독서>라는 책 제목만 봐서는 ‘청춘의 시기에 독서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 정도의 내용일거라고 짐작하겠지만 책장을 5장만 넘겨보면 금새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작가의 청춘시절에 읽은 책들을 나이가 들어 다시 책장을 뒤져 청춘시절에 읽었던 느낌과 케잌에 초를 한웅큼 꽂는 지금에 다시 읽은 느낌들과 비교하여 정리한 책이다.

본서를 통해 주옥같은 소설, 인문고전 총 14권을 만날 수 있다. 한 권도 제대로 정독한 적이 없었고,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든 책도 없음이 초라하고 궁색하다. 잘 알려진 유명한 책들이지만 제대로 읽은 독자가 많지 않은 책들이다. 글로벌한 세계 최고의 스펙을 가진 우리 청춘들이지만 책 읽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것은 빈둥거리며 할 일 없는 사람들의 전유물로 생각한다. 스펙의 폐혜를 지적하고 있지만 여전히 스펙은 한국 사회에서 필수품이라는 것은 부종하기 힘들다. 사실 스펙으로 치자면 책읽기가 그 으뜸이다.

저자는 어려운 인문 고전과 철학서들을 쉽게 대화하듯 이야기해준다. 고전에 익숙지 않은 독자들도 자신감을 가져볼 만하다.

 

<청춘의 독서>는 잠든 머리를 깨워야 하고 녹슨 머리에 약간의 기름칠이 필요한 책이다. 우선 책의 구성은 저자가 청춘 시절에 읽었던 수많은 책들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을 골라 리뷰 내지는 감상평, 서평을 써놓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서평이 단순한 서평으로 끝나지 않고 철학적, 정치적, 인문적으로 뭔가 다르게 생각할 여지를 둔다는 점에서 고전을 통한 책읽기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준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범주는 다양하다. 문학작품을 포함하여 대부분 고전의 반열에 드는 위대한 저작들이다. 이런 책을 청춘 시절에 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자의 생각의 폭을 짐작할 수 있다. 솔직히 난 이 중에서 제대로 읽은 책은 한 권도 없다. 저자가 소위 청춘 시절이라고 하는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는 어수선한 사회분위기속에서 군부독재의 망령이 온 나라를 에워싸던 시기였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시대에 금서로 지정되었을 법한 책들에는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라든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등이 있다. 이런 책들은 공안당국의 검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위험을 감수하고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시절 청춘들의 방과 후 숙제였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맬서스의 <인구론>이 가난한 사람들을 배척해야 한다는 논리로 인구 감소를 주창한 한 천재 경제학자의 저서라는 사실은 놀랍다. 그리고 동양 고전으로는 맹자의 <맹자>와 사마천의 <사기> 두 권이 포함되어 있다.

소설로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푸시킨의 <대위의 딸>,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최인훈의 <광장>이 소개되어 있다. 소설만으로도 사회의 부조리를 풍자, 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문학이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준 것 같아 그 의미가 크다.

이외에도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다윈의 <종의 기원>,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조지의 <진보와 빈곤>,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등 세상의 진보와 발전에 영향을 끼친 다수의 책들을 통해 다양한 사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요즘 인문학 읽기가 대세다. 늦지 않았다. 나이와 상관없다. 이 책으로 고전읽기에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너무 거창한 목적은 필요치 않지만 책을 읽는 약간의 목적은 비단 교양이나 지식의 축적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사회의 저변에 깔려있는 문제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기르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데 있다.

 

다시 읽고 깊이 읽고 싶은 구절들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이 '인류를 구원하려는 신념'을 실행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폭력과 범죄를 저지를" "완전한 권리를" 행사한 전체주의 체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동등한 인권과 참정권을 부여하고, 그들을 대표하는 사람에게 의사 결정권을 제한적으로 위임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있다. 20세기 세계사는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수없이 많은 소냐와 두냐들이 좋은 세상을 만든 것이다. 만약 도스토예프스키가 20세기를 목격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선한 목적은 선한 방법으로만 이룰 수 있다"(31)

 

나에게 '전환시대의 논리'와 리영희 선생은 흔히 보는 교양서와 필자가 아니었다. 리영희 선생은 나에게 철학적 개안의 경험을 안겨준 사상의 은사이며, '전환시대의 논리'는 품위 있는 지식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 인생의 교과서였다.(35)

 

옷을 입지 않은 임금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한 소년의 우화는 그 소년의 순진함이나 용기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진실은 반드시 진실대로 밝혀지기 마련이라는 인간 생활의 진리를 말하려는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이 우화의 해석은 대체로 그 우화를 구성하는 일련의 인과적 요인들이 엮어내는 '과정'에 대해서는 깊게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

가장 어리석은 소년에 의해서 온 사회의 허위가 벗겨지기까지 그 임금과 재상들과 어른들과 학자들과 백성들은 타락과 자기부정 속에서 산 셈이다. 마침내 한 어린이가 나타나서 보다 현명한 어른들을 타락에서 구하기는 했지만 그동안 이 왕국을 지배한 타락과 비인간화와 비굴과 자기 모독, 그리고 지적 암흑 상태가 결과한 인간 파괴와 사회적 해독은 무엇으로 측량할 것인가 (전환시대의 논리 9~10쪽)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영희 선생은 말한다. 진실, 진리, 끝없는 성찰, 그리고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 지식인은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산다. 선생의 글을 다시 읽으니 선생이 내게 묻는다.

너는 지식인이냐. 너는 무성으로 사느냐. 너는 권력과 자본의 유혹 앞에서 얼마나 떳떳한 사람이냐. 관료화한 정당과 정부 안에서 국회의원, 장관으로 일하는 동안 비판적 지성을 상실했던 적은 없었느냐. 성찰을 게을리 하면서 주어진 환경을 핑계 삼아 진실을 감추거나 외면하지 않았느냐. 너는 언제나 너의 인식을 바르게 하고 그 인식을 실천과 결부시키려고 최선을 다했느냐.(48)

 

그러나 마르크스가 모든 점에서 틀렸던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자본주의 비판 이론으로서의 가치와 생명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세계화, 글로벌 시장, 금융 독점 자본주의의 출현,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금융 위기와 산업공황, 끝없이 실업자와 산업예비군을 만들어내는 노동 절약형 기술혁신, 심화되는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비록 적절한 해법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할지라도, 언제나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어두운 그림자를 직시하라고 말한다. 어찌 고맙고 귀하지 아니한가.(69 청춘을 뒤흔든 혁명의 매력)

 

맬더스의 인구론은 단순한 관찰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의 유력한 철학이자 세계관이며 사회 이론이다. 그는 '어떤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는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도덕적 비난이 두려워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견해를 가장 완전한 형식으로 , 그것도 과학과 자연법칙의 옷을 입혀 논증했다. 그 '어떤 사람들'은 바로 '동정심 없는 부자와 권력자'를 말한다. 인구론은 부자와 기득권층에 봉사하는 철학의 출발점과 종착점을 동시에 보여준다. 보수를 연구하려는 자, 모름지기 인구론을 읽어야 한다.(79)

 

멜더스의 인구론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우리 모두는 갖가지 편견과 고정관념을 지니고 산다.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통념이 논리적, 경험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일일이 시험하고 검토할 수 없는 일이기에, 많은 경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관념과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맬서스와 얼마나 다른가. 내가 옳다고 믿는 것, 내 신념을 받치고 있는 수많은 통념들 가운데 그릇된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없을 것인가? 인구론과 멜더스는 금이 간 거울이다. 내 생각도 그릇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일그러져 있지 않은지 경계하면서, 거기에 나를 비추어 본다. 생각은 때로 감옥이 될 수 있다!(91. 불평등은 불가피한 자연법칙인가-토머스 맬더스, 인구론)

 

유방과 한신은 야수적 탐욕이 판치는 정치 사회적 혼란과 전쟁의 한복판에 몸을 던졌다. 때로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고 때로 스스로 야수가 되어 싸운 끝에 , 야수의 탐욕이 지배하는 혼란의 시대를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냈다. 그리하여 수없이 많은 민중의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창과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들게 했다. 민초들이 공포감에서 벗어나 생업에 힘쓰면서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늙은 부모를 편안히 모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비록 그 평화의 시기가 몇 백 년에 지나지 않았다 (180)

 

정치는 위대한 사업이다.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적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한신과 유방이 빛을 좇는 불나방처럼 권력을 향한 본능에 이끌려 투쟁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인의를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만하면 충분하지 아니한가. 비록 성인의 반열에 오를 만한 덕성을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때로 맹목적 욕망과 시기심에 휘둘렸다 할지라도, 그러한 마음과 능력을 발휘하여 결과적으로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었지 않은가.(181. 권력투쟁의 빛과 그림자- 사마천, 사기)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

-니콜아이 네크라소프, 19세기 러시아 시인.

 

존엄을 빼앗긴 사람의 지극히 평범한 하루,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슬픔과 노여움의 미학. 그러나 노동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결국 남은 것은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사람. 땀 흘려 일하는 사람. 때로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유용한 것을 만드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 . 그런 사람의 모습에서 얻는 감명이 25년 세월을 견디고 내 마음에 그래도 남아 있음을 . 나는 이번에 알게 되었다.

주인공 슈호프는 수용소의 104반 동료들과 함께 모르타르가 금방 얼어붙는 혹한 속에서 전심전력을 다해 벽돌을 쌓는다. 작업 종료 신호가 울린다. 집합에 늦으면 자칫 낭패를 볼 수 있는데도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마치 그 일에 목숨이라도 걸린 것처럼 벽돌을 쌓는다.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수용소에 갇혀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힘든 강제 노역에 동원된 죄수들이, 노동 그 자체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에 몰입하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 마치 캄캄한 방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장면을 보는 듯하다.(198. 슬픔도 힘이 될까-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다윈의 진화론은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렇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노출시켰다. 인간은 모두 이기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타적 행동을 하는 이기적 동물이다.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동물임을 과소평가하면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또한 이타주의와 자기희생이라는 고귀한 도덕적 재능을 진화시켜온 존재임을 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벌거벗은 탐욕과 아귀다툼이 판치는 살벌한 야만으로 몰고 갈 위험에 빠진다.

'공산당 선언'을 하고 가슴이 설레는 젊은이라면 반드시 다윈을 읽어야 한다. 세상이 원래 경쟁과 적자생존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인데 국가가 무엇 때문에 빈부 격차 해소나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하느냐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 역시 다윈을 제대로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 본성을 버리지 못하지만, 동시에 이타 행동을 우러러보는 직관적 도덕률을 지닌 동물이다. 인간은 또한 밤하늘의 별을 볼 때에도 땅에 발을 디뎌야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현실의 이해타산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고결한 이상주의가 사라진다면 인간의 삶이 너무 비천할 것 같다. 누구나 다윈만큼씩만 인간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이타주의에 공감한다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살만한 곳이 되지 않겠는가.(221.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인가-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역사가와 그가 선택한 사실의 상호작용은 추상적이고 고립된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현재의 사회와 지난날의 사회 사이의 대화다.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빌린다면, “역사란 한 시대가 다른 시대 속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일들에 관한 기록”인 것이다. 과거는 현재로 비추어 보아야 이해할 수 있으며, 현재 역시 과거의 조명을 받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303. 역사란 무엇인가 79쪽)

 

책에도 고수가 있다.

읽고 요란하게 떠들면 하수다. 내용보다는 글자를 읽은 것이다. 고수는 책을 읽고 저자를 읽고 나아가 자기 자신을 읽는 사람이다. 신윤복 교수님이 주장하는 ‘독서3독’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텍스트를 읽고, 저자를 읽고, 자신을 읽는 것이다.

감히 고하자면 나는 아직 하수다.

서툴게 읽고 이렇게 잘났다고 정리하고 떠들어대니 말이다. 하지만 고수 역시 누구나 하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개천의 용도 처음부터 용이 아니었다. 처음엔 미꾸라지였다.

그래서 혼자 이런 결론을 내려 봤다. “시간이 나서 책을 읽으면 하수고, 시간을 내서 읽으면 고수다.”라고 말이다. ‘시간이 나서’와 ‘시간을 내서’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래서 난 이런 말을 싫어한다. 취미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독서‘라고 답하는 것을.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의무이자 생활이다. 국방의 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읽는 것도 의무가 되어야 한다. 총칼만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라를 구하는 시대다.

 

저자 후기

위대한 유산에 대한 감사

 

 

긴 세월이 지나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음으로써 나는 과거의 나 자신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것은 무척 흥미롭고 놀라운 체험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해도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운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이 책은 내게 삶의 이정표가 되었던 책을 골라서 다룬, 지도 비슷한 것이다. 지도에는 길섶에 핀 들꽃이나 종달새 노래의 아름다움을 표시할 수가 없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위대한 고전 다시 읽기 작업을 한 단계 마무리해 책으로 엮고 보니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하다. 그래서 이 책의 한계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드리고자 한다. 이 책은 위대한 고전에 대한 균현 있는 서평이 아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 기적일 수 있을까. 이 책이 독자들의 마음에 그러한 기적을 직접 체험하고 싶은 갈증을 불러일으키고, 위대한 지성이 인류에게 남겨준 유산을 함께 나누는 데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기 바란다.

 

 

저자 후기를 읽으며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저자는 독자들의 따가운 채찍질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것 같아서다. 대표적인 것이 이 책의 한계를 이야기하고, 고전에 대한 균형 있는 서평이 아니라고 언급한 부분들이다.

애초부터 균형 있는 서평이란 있을 수 없다. 똑같은 글을 읽더라도 독자들은 모두 자신의 가치관과 프레임으로 자신의 스토리를 이야기한다. 따라서 책의 한계나 서평은 저자의 몫이 아니라 독자들의 몫이다.

지금 출판시장에 번역서들이 활개를 친다. 특히 자기계발과 인문학 분야는 더 심하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자기계발 분야를 보면-물론 사견이지만-

국내서적들은 설명은 물론 해답까지 저자가 제시한다. 모두 저자의 사견일 뿐이다. 하지만 번역서들은 그렇지 않다. 해답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주입식 교육이 자기계발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