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90년대 하이텔 Summer란을 달구었던 공포소설 '어느날 갑자기'를 추억하며

억스리 2013. 1. 5. 20:31

[출처] http://blog.naver.com/cyongjoon/100056651749


공포소설 중에서 최초로 가장 무섭게 봤던 작품을 꼽으라면 에드가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가 떠오른다.

고양이란 동물을 어딘가 불운을 불러오는 존재로 여기게 만들고 허름한 낡은 건물의 무너져가는 벽에 혹 그 검은 고양이가 있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이 어린시절을 꽤 오랫동안 차지했을 만큼 강렬한 공포였다.

그 이후에도 '스티븐 킹'이나 일본의 여러 공포소설 작가들의 공포소설을 봤을 때도 그때만큼 순수하게 빠져들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한국형 공포소설의 청사진을 제시했던 걸작 '어느날 갑자기'

그러다가 세월이 한참 흘러 PC통신을 시작하고서 3대 메이저였던 '나우누리, 하이텔, 천리안'을 통해 수없이 난립했던 환타지와 공포소설의 홍수속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작품은 이우혁의 '퇴마록' 보다는 오히려 유일한의 '어느날 갑자기'였다.

뭐랄까, 어딘가 실시간으로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는 공포소설들이 올라왔던 하이텔 Summer란에서도 이 작품은 퇴마록과 더불어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특징이라면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공포장르에서 다룰 수 있는 여러 소재들을 무리없이 쓰고 있다는 점이다.

'버려진 집'에서는 폐가를 둘러싼 빙의와 저주가 장마철과 함께 고립되는 주인공들의 심리적 공포까지 제대로 다루어주어 긴 여름밤을 잊게 했고, '먹는 자와 먹히는 자' 에서는 유럽에서 실제 있었던 인육사건을 소재로 하여 사이코패스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누군가에게 몸서리쳐지는 공포를 보여줬다. '스티커 사진'에서는 당시 여중고생들에게서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스티커 사진을 소재로 한 10대의 학원공포물을 통해 나를 스티커 사진 한 번 안 찍어본 녀석으로 만드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톨게이트'에서는 비오는 2월29일이면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다루면서 주인공이 기억하는 살인사건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함께 고민하게 만드는 음울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엘리베이터'를 통해 네모난 콘크리트 속 네모난 박스같은 엘리베이터에 얽힌 원혼의 넋을...

'독서실'에서는 한동안 공부하러 가기 무서워질만한 공포를 조장한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에서는 세상 사람들 그 누구도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맑은 영혼과 사명감을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하기도 한다.

놀랍게도 '모든 것을 보는 아이'는 할리우드 영화 '식스센스' 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같은 소재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외의 다른 '어느날 갑자기'의 이야기들 역시 모두 이렇게 흥미진진한 소재와 일상적인 캐릭터들로 공포를 극대화시키는 재주가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이끌어가는 화자는 작가의 또 다른 분신이라고도 할만한 '일한' 이라는 캐릭터이다.

마치 X파일처럼 과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사건들을 이성을 신봉하는 주인공을 통해 독자들을 설득시킨다.

멀더와 스컬리를 합친 것 같은 '일한'의 캐릭터는 그래서 매력적이었다.

 

온라인의 대성공에 비해 부족했던 오프라인의 흥행 그 전략의 아쉬움...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런 수많은 매력들에도 불구하고 온라인을 벗어난 오프라인에서 그 힘을 많이 잃어버렸다. 작품의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출판과정과 홍보가 실패해버린 탓이다.

처음으로 계약을 맺고 출판되었던 '느낌'판은 출판사의 부도와 더불어 공중분해되었고, 2000년대 들어 다시 계약을 맺은 '청어'판은

제대로 홍보가 되지 않은 셈이었다. 

같은 작품을 몇번씩 개작한다는 건 그렇게 호재가 될 수 없기에 또 그렇게 묻혀버린 느낌이다.

이는 또 다른 초대형 히트작이었던 '퇴마록'의 성공에 비추어보면 팬의 입장에서 정말 아쉬움 그 자체이다.

 

또 하나의 아쉬움은 역시 영화와 드라마 제작에 관련된 문제인데 만일 이 작품이 단편적이 아니라 시즌제로 제작될 수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걸작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2000년대가 한참 지나고서야 영화로 제작된 4부작 '어느 날 갑자기' 와 98년 이찬, 이정현 주연으로 드라마로 제작된 

'스티커 사진', 그리고 최근 전지현, 황정민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던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를 보면서 드는 아쉬움이 이런 수많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는 시기가 번번히 늦어버림으로써 흥행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이제 이 작품이 또 어떻게 영화로 등장할 수 있을지 드라마화될 수 있을지 솔직히 장담할 수가 없다.

번번히 닥쳐왔던 그 불운이 내마음속의 걸작인 이 작품과 함께 해왔기에 이제는 어쩌면 그 하나만으로 의미를 삼아야 할지도 모르는 시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