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검은 사기

억스리 2009. 4. 25. 14:25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검은 사기 1-13
쿠로마루 (지은이), 나츠하라 타케시(그림) | 서울문화사(만화)
출간일 : 2005-05-25 | ISBN(13) : 9788953262690  
238쪽 | 188*128mm (B6) | 각 권 3,500원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세상엔 세 종류의 사기꾼이 있다. 백로.. 인간을 속여 돈을 빼앗는 사기꾼. 홍로.. 이성을 먹이로 삼아 마음과 몸을 갖고 노는 사기꾼. 그리고 흑로.. 백로와 홍로만을 표적으로 삼고 그들이 사람들로부터 우려낸 돈으로 배가 불러 썩은 육체를 쪼아먹는 가장 흉악한 사기꾼." 주인공 쿠로사키는 흑로입니다. 사기꾼을 속여 파멸로 이끄는 프로사기꾼인 것이죠. 흑로를 일본식으로 읽으면 쿠로사키가 되는데 검은 사기와 동음이의어인 것에 착안한 작명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쿠로사키가 처음부터 사기꾼이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의 발단은 그의 아버지가 엄청난 금액의 사기피해를 입고 좌절한 끝에 가족들을 모두 칼로 찔러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사건에서 비롯됩니다. 지옥같은 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장남 쿠로사키가 자신의 가족을 파멸로 몰아넣은 사기꾼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자신도 사기꾼이 되기로 한거요. 사기피해자를 발견하면 픽서라고 부르는 사기설계자 및 정보제공자에게 돈을 주고 사기꾼에 대한 정보를 얻은 후 그의 수법을 역이용하여 큰 피해를 입히는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는 가족의 원수를 찾아 복수에 성공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 사기의 설계자이지만 지금은 정보를 얻어야 하는 입장이라 불안한 파트너쉽을 유지하고 있는 픽서에게는 어떤 복수를 할 수 있을지가 이 만화의 최종목표라고 하겠습니다.
 
각 권마다 등장하는 사기피해자, 일명 '봉'을 보고 있노라면 대략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를 할 수 있겠네요. 첫번째는 말 그대로 순진무구가련형입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성실하고 착하게 잘 살아온 사람들입니다만 온실 안의 화초입니다. 아직 험한 꼴을 당하지 않아서인지 약간의 호의만 보여도 덜컥 신뢰를 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기꺼이 돈을 갖다바치는 유형이죠. 두번째는 궁지에 몰린 쥐형입니다. 백로들은 어떤 연유에서든 난처하고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찾아내고 해결책을 제시하며 돈을 요구합니다. 이들이 유일한 희망이자 구원자처럼 보이겠지만 결국은 마지막 희망마저 앗아가는 범죄자일뿐입니다. 세번째는 대박추구형입니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것을 쉽게 까먹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또는 적은 돈으로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되죠.
 
신뢰와 욕망은 사람의 여러가지 마음 중에서 별난 어떤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가까이 있는 것이기에 정말 세상은 넓고, 봉은 많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이죠. 살다보면 '저 사람은 법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소리를 가끔 듣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런 사림들때문에 법은 반드시 있어야 하다는 것이죠.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고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필수요소 중의 하나이지만 그것때문에 사기꾼들은 먹고 삽니다. 뜨거운 가슴만으로는 살기 힘든 세상, 고로 뜨거운 가슴이 더 뜨겁게, 더 오래 뜨거우려면 차가운 머리가 절실합니다. 주인공인 쿠로사키의 아버지도 원래 나쁜 사람은 아니었을 겁니다. 젊어서부터 성실하게 살았고, 가정을 꾸미면서도 더 큰 책임감으로 잠못이루는 밤이 많았을 것이구요. 하지만 냉철한 이성을 가지지 못했던 까닭에 재산도 모두 날리고, 가족들조차 자기 손으로 죽이고 만 비정한 아버지이자 남편이 되었습니다.
 
사기꾼을 사기치는 사기꾼이라는 소재는 여러가지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 일단 피해자가 사기꾼이든 아니든 간에 쿠로사키는 사기라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가 흑로라는 것을 일선 경찰에서도 잘 알고 있지만 피해자가 진술을 거부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기소가 쉽지 않죠(그랬다가 자신의 수법이나 가해사실도 만천하에 드러날테니까요). 게다가 자신에게 사기꾼에 대한 정보를 준 피해자에게는 나중에 빼앗은 돈으로 피해액을 돌려받도록 배려를 해줍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판 로빈훗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이 로빈훗의 무기는 화살이 아니라 법률지식과 심리학이지만요. 자, 현행 법령에선 명백한 범죄자이지만 그는 사기꾼을 처단하고 피해자를 구제합니다. 현 제도로는 처벌도, 구제도 못하는 그런 상황에서 말이죠. 그를 다른 사기꾼에 우선하여 잡아넣어야 할까요. 여러분이 경찰/검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검사지망 법대 여학생이 느끼는 혼란은 여기에 있습니다.
 
쿠로사키가 법의 힘을 빌지 않고 자신이 직접 사기꾼들을 처단하겠다고 나선 것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오는 공권력에 대한 철저한 불신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과연 일본보다 상황이 나을까요? 다음은 위클리조선 2006년 3월 21일자 기사 내용입니다.
- 1995년부터 2004년까지 1심에서 실형을 선고하는 비율은 23.6%에서 20.4%로 낮아졌다. 하지만 같은 기간 범죄율(인구 10만명당 범죄발생 건수)은 3108건에서 4283건으로 37.8% 증가했다. 같은 기간 형사 입건자 중 구속 비율도 4.5%에서 2.7%로 낮아졌다.
- 2000년 통계에 따르면 전체 강도사건 피고인에 대한 프랑스 법원의 5년 이상 선고형 비율은 66.7%인 반면 우리는 12.5%에 그쳤다. 또 전체 선고형 대비 집행유예율의 경우 프랑스는 6.1%인 반면 우리나라는 36.9%였다.
- 대표적 성범죄인 강간의 경우도 우리가 형량이 관대한 편이었다. 프랑스의 경우 5년 이상 징역형이 70.5%나 차지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18.6%에 불과했다. 영국도 강간범에 대한 구금형 비율이 94% 이상, 평균 형기가 6년 이상이어서 우리보다 형이 엄했다.
- 2003년 발간된 ‘2000년 미국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강도, 상해, 마약, 절도 등 중범죄를 저지른 피고인 가운데 69%가 실형을 선고받았다. 교통법규 위반 등 경범죄의 경우도 실형 선고율이 53%에 이르렀다. 실형 선고율이 20%대인 우리와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난다.
- 사기죄에 대한 우리의 형량은 피해자와의 합의를 중시한다. 특히 벌금형의 경우 피해자와 합의가 되면 이득 금액의 25% 정도, 합의가 안되면 이득 금액의 50% 수준의 벌금형을 부과하고 있어 벌금을 내고도 사기범들에게는 ‘남는 장사’가 되는 수도 있다.
- 2002년 당시 불법 대선자금에 연루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정치인 17명 중 실형을 선고받은 정치인은 불과 4명뿐이고 나머지 13명은 집행유예(10명)와 벌금형(3명)에 그쳤다.
 
데스노트의 야가미 라이토나 검은 사기의 쿠로사키 같은 인물이 영웅이 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있는 사회는 희망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공권력의 힘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가 늘어나고 있고, 따라서 공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얇아지고 있다고 봐야하기 때문이죠. 갈수록 복잡해지고 법과 현실의 갭이 커져가는 사회에서 언제까지 국가를 의지할 수만은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 스스로 분석하고 판단하는 힘을 기르지 않으면 피해자는 계속해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이죠. 이 만화가 각 권 후반부에 각종 사기수법에 대해서 자세하게 분석을 해놓는 이유는 독자들이 자기 힘으로, 자기 머리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길 바라는 저자의 배려가 아닐까 합니다.
 
ps. 쿠로사키의 아버지처럼 자신의 실패한 인생을 끝내는데 자식들을 동반시키는 비정한 부모들이 종종 신문에 나옵니다. 이런 현상은 자식들을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일종의 소유물로 여기는 문화에서 자주 일어난다네요. 여러분은 자녀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ps. 저도 법대를 졸업했지만 법조계 종사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턱없는 존경과 신뢰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법고시는 자격시험이지 품성시험이 아닙니다. 쿠로사키가 쉬는 날이면 집안에 틀어박혀 각종 법률체계를 공부하듯이 사기꾼도 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빠삭하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어떤 존경할만한 구석을 찾을 수 있을까요. 판검사 나으리들도 공무원 박봉으로 자녀들을 가르치고 배우자에게 생활비를 벌어다줘야 하는 가장이며 승진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조직원입니다. 변호사 나으리들도 직원들 월급 챙겨줘야 하고 사무실 임대비를 벌어야 하는 생활인입니다. 무턱대고 경계하거나 신뢰하는 것은 이제 그만두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 때입니다.
 
One Day
One Book
One Review
 
2007.8.18.
북코치 권윤구 (www.bookcoach.kr)의 942번째 북코칭
 
인상깊은 구절 : 실제로 사기만큼 방치된 범죄도 없을걸. 그건 사기가 무진장 '입증'하기 어려운 범죄라서 그래. 사기죄를 입증하려면 먼저 사기꾼이 피해자를 '속일 작정이었다'란 사실을 증명해야 해. '기망'이라고 하는데 이게 만만한 일이 아니거든. 이유는 마음이기 때문이야. '돈을 빌렸을 뿐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런 주장이 인정되면 사기죄로 고발할 수 없어. '입증' 못하면 법률은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어. 법정에서 싸우는 것도 좋지만 변호사를 고용하면 피해액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줘야 할 테고, 가령 업자가 체포돼도 돈을 되찾을 순 없을 거야.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은 살아있을 이유가 없어. 넌 때로는 이용가치가 있어서 그에 걸맞는 대접을 해주는 거야. 허나 지금은 때가 아니라 아무 도움도 안 돼. 따라서 넌 지금 그 어떤 존재가치도 없단 얘기지.
 
넌 모르겠지만, 예전에 좀 시끄러운 일이 있었거든. 그때 법률의 정체를 똑똑히 알게 됐어. 난 검사란 놈들을 잘 알아. 녀석들은 패소하는 게 두려워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불기소를 연발해. 대신 뻔한 범죄는 정의의 가면을 쓰고 덤벼들지. 어차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주제에. 현실도 모르면서 검사가 되겠다니 정말 축하할 일이야. 이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걸.
 
어째서 당신은 자신의 머리로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거야. 어째서 '변호사'가 말하는 거라면 전부 옳다고 생각하는 거지? 배지를 달고 있어서? 국가가 보증하고 있어서인가? 사법과 정의는 같은 게 아니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져. 설령 다소 터무니없는 해석이라도 법정에서 인정받으면 그게 옳은 일이 돼. 그런데도 당신들은, '법률은 올바른 인간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완전히 믿고 학습도 안 하고 경계도 하지 않지! 법의 기본원칙 따위 표면상의 방침 같은 거라고. 법률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 그게 사회의 규칙이라는 거야. 거기에 대항하려면 '자신의 규칙'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