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헨리 나우웬, 영적 발돋움 : 고독과 환대 그리고 기도..

억스리 2009. 5. 4. 14:01










 헨리 나우웬, 이상미 옮김,  영적 발돋움,  두란노,  2008(개정 2판 5쇄)

 

 

인간이 추구해야할 참된 자아상, 관계 공동체, 인격 공동체란 어때야 할까? 그 시작은 자아가 인격적으로 성숙해질 때 비로소 시작할 수 있다. 자아가 진정으로 자아를 마주할 수 있는 고독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성숙해 지는 것이 그 출발이 되겠다. 이 때 자아는 타자를 인격적으로 존중할 수 있게 된다. 타자에 대한 진심어린 공간을 열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의 욕심을 버리고 아무런 조건이나 대가가 필요없는 상태로 타자가 있는 그대로의 자아를 볼 수 있는 자유 공간을 생산해 낸다는 것이다. 신앙인은 여기서 하나님을 고백한다. 자아가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그리고 타자에 대한 적대심에서 환대로 전화시킨 이 지점은 실상 보다 새로운 만남, 본질적인 만남을 지향하기 위한 발돋움이다. 곧 하나님을 향한 영적 발돋움이라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기도라는 방법이 제시된다. 자아가 만들어내는 환상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움직임은 고독으로 향하는움직임과 따뜻한 환대, 곧 타자에 대한 진심어린 공간을 향하는 움직임을 뒷받침한다. 이 속에서 인간은 인간의 유한성을 확인하며 인간 안에서 호흡하시며 인간에게 내적인 생명으로 친교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이로써 인간은 거듭나게 된다. 인간은 이 길을 찾아나가야 한다. 비록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자기 나름의 길을 찾는 특별한 방법이 요구된다. 이 때 공동체가 중요하다. 인간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함께 참을 수 있으며 매일의 고난을 통해 자신의 환상을 기도로 바꾸어 낼 수 있는 토양을 제공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유한함을 자각하고, 계속해서 가난해 지는 것, 마음과 생각이 가난해 지고, 더욱 풍성한 생명을 갈망하는 것, 이것이 기도가 아닐까.

나는 마음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기도의 훈련이 보다 필요해짐을 느낀다.


1부 자아를 향한 발돋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외로움에 대해서 아주 민감하게 느끼게 합니다. 가장 친밀한 관계일지라도 경쟁과 대결의 일부가 되어버린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느끼게 됩니다.(20) 외로움은 오늘날 인간 고통의 가장 보편적인 원인 중 하나입니다.(21) 우리의 문화는 고통을 피하는데 가장 세련되었습니다. 즉 기본적인 인간의 홀로됨을 매우 가까이 들여다보게 되고 또 뼛 속까지 파고드는 외로움을 느낄까 봐 두려워서 무엇인가 우리를 분주하게 만드는 일을 다시 시작하거나 다 잘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게임을 계속할 것입니다.(23) 외로움에서 멀리 달아나려 하고 또 사람들이나 특별한 경험에 마음을 빼앗김으로써 자신이 처한 곤경에서 실제적으로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25) 문제는 자유를 원하면서도 자유를 두려워한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외로움을 그다지도 못 참고 '최종 해결책' 일 성싶은 것들을 조급하게 붙잡는 것입니다.(27)

살아가다 외로움에 못 이겨 자신으로부터 떠나서 다른 이에게 기댄다면 결국 관계란 서로를 지치고 피곤하게 만들며 포옹으로 상대방을 옥죄는 관계가 돼버립니다. 서로에게 지나치게 매달리면 우정과 사랑은 발전할 수 없습니다.(27) 사랑과 우정에는 서로를 향해 다가가면서도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다정하고 편안한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외로움에 지친 나머지 함께라면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함께 하고자 하는 한, 우리는 채워지지 않고 실제적이지도 않은 하나됨과 내적인 평안과 끊어지지 않는 교제를 경험하고자 하는 갈망을 품은 채 서로를 비난하게 됩니다.(28)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인간 관계의 민감함을 매우 강조하고 의사 소통의 능력을 계발하도록 장려하며 여러 모양의 신체적, 지적, 정서적 교감을 실험해 보도록 권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외로움과 슬픔을 느끼는 것은 서로 마음을 충분히 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해 진정으로 자신을 열어놓는 것은 진정으로 자신을 닫아놓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람 사이의 친밀한 관계에는 서로 마음을 여는 것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존중하는 자세를 가지고 상대방의 독특함을 지켜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29)

하지만 절박한 외로움으로 우리의 의식 속에 자주 비집고 들어오는 이 본질적인 외로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상처받은 가슴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설사 우리를 어려운 길로 인도할지라도 이 질문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어려운 길은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바뀌는 전환의 길입니다. 영적인 삶을 살려면 먼저 외로움의 광야로 들어가서 조용하고 끈기있는 노력을 통해 그 광야를 고독의 동산으로 바꾸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33)

정말로 중요한 고독은 마음의 고독입니다. 마음의 고독이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에 좌우되지 않는 내적인 소양이나 태도입니다.(38) 마음의 고독을 가지고 살 때 다른 사람들의 말과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일 수 있지만, 외로움에 쫓겨 살 때는 자신의 갈급한 필요에 즉각적으로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말이나 사건들만을 고르려고 합니다.(39) 외로움 사람에게는 내면의 질문이 없습니다. 외로운 사람은 대답을 원하며 그것도 지금 당장 원합니다. 그러나 고독 속에서는 우리 내면의 자아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중심주의나 병적인 자기 성찰과는 다릅니다.(43)

마음의 고독이 없으면 우정과 결혼과 공동체 생활의 친밀감은 창조될 수 없습니다. 마음의 고독이 없으면 우리가 이웃과 맺는 관계는 쉽사리 빈곤해지고 욕심을 내어 무엇인가를 바라게 되며, 집착하고 매달리게 되며, 의존하고 감상에 빠지게 되며, 상대방을 이용하려 하고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고독이 없이는 다른 사람을 자신과는 다른 존재로 경험할 수 없고, 숨겨져 있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람들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신비라는 것은 사랑이 그 사람에게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어 주어서 그가 자신의 외로움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고독으로 바꿀 수 있게 해준다는 것입니다.(47)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바뀌는 움직임은 자기 안으로만 움츠러드는 움직임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쟁점이 되는 문제에 더 깊이 참여하는 움직임입니다. 외로움에서 고독으로의 움직임이 진전되면 우리가 두려움을 가지고 대응하던 것들은 서서히 사랑에서 우러난 반응으로 바뀌어 갈 수 있습니다.(54) 참된 영적인 삶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하여 민감하게 의식하도록 만듭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우리의 명상과 묵상의 일부로 삼게 하며 또 우리가 자유롭고 담대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이끕니다.(56) 역사라는 것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사건들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비인격적으로 이어져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소망과 열망이 성취되는 어떤 인격적인 만남으로 우리를 이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삶이 될 것입니다.(60)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현실에 자신을 열지 않습니까? 우리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또 우리가 스스로 고칠 수 잇는 상처만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 세계의 주인이며 따라서 삶의 모든 사건이 안전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확신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닙니까?(65) 우리가 각자 개인적으로 모든 인간적인 고통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무기력증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의 그 모든 고통들에 대해 반응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소식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이러한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최초의 시도는 다른 사람과의 내적인 연대로부터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68)

고통으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긍휼한 마음으로 그 고통을 만지는 사람은 치유와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치유가 시작되는 것은 고통과 일치감을 맛볼 때라는 것은 사실 역설입니다.(71-72)

2부 동료 인간을 향한 발돋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감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낯선 이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환대받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줌으로써 그들이 이질감을 벗어던지고 우리의 동료가 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손님으로 바꾸는 것 그리고 형제애와 자매애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자유롭고 두려움 없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77)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우리의 삶 속으로 맞아들이는 것은 기독교 영성의 핵심입니다.(80)

환대는 무엇보다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적이 아닌 친구가 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자리를 그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환대는 사람을 우리 옆으로 데려다놓는 것이 아니라 선을 그어줌으로써 침해당하지 않는 자유를 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환대는 선택할 다른 대안이 없는 구석으로 이웃을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폭넓게 선택할 수 있도록 장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책이나 이야기나 일로 교양 있게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무서움에 질린 마음을 자유롭게 해주어서 근거있는 말, 풍성한 열매가 맺히는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환대는 우리의 하나님과 우리의 길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는 방법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그들의 하나님과 그들의 방법을 찾도록 기회를 열어주는 것입니다.(85)

사실 우리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공허함과 침묵 속의 고독을 두려워 한 나머지 무엇에든 깊이 몰입해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실상 우리가 몰입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경험을 갖지 못하고 항상 익숙했던 방식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어디엔가 몰입하려는 행동은 우리 안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매사를 이전과 똑같게 유지하려는 하나의 방식입니다.(89)

채워져 있고 또 몰두하여 있는 이 사회에서 창조적인 공간을 갖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구원과 구속과 치유와 새로운 삶을 기대한다면 우리에게 맨 먼저 필요한 것은 열려 있는 수용의 자리입니다. 즉, 우리에게 무언가가 일어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환대는 그만큼 중요한 태도입니다. 새로운 계획이나 방안이나 사상으로는 세계를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확신, 이야기들, 조언과 제안들로는 다른 사람들을 바꾸기조차 힘듭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어떤 공간을 마련해 줌으로써 사람들이 거기에서 스스로 적대감을 풀고 그들이 채워져 있는 것들과 몰두하고 있는 것들을 제쳐두고 자신이 중심에서 말하고 있는 소리에 주의 깊고 신중하게 귀를 기울이도록 할 수 있습니다.(91-92)

환대를 이방인들에게 나아가 그들을 우리의 친구들로 초청할 수 있는 자유롭고 친밀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분명 그런 일이 여러 차원에서 그리고 많은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95) 자녀는 우리의 가정으로 들어와서 조심스러운 관심을 요구하고 얼마 동안 머물다가 때가 되면 자기 나름의 길을 찾아 떠나는 가장 소중한 손님입니다. 자녀는 우리가 알아가야 하는 낯선 사람입니다.(97) 부모의 막중한 임무는 아이들이 신체적, 지적, 영적으로 제 발로 설 수 있고 제 나름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자유를 행사하기까지 자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입니다.(100)

우리가 교사의 위치에 있을 때는 학생을 어떤 특정한 모양의 선한 삶으로 붙박아 놓을 수 없다는 점과, 그들은 우리의 교실에 오기 전에 이미 많은 교실을 거쳐왔으며, 잠시 머물다 가는 방문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게 좋습니다. 교사가 학생들과 맺는 관계는 무엇보다도, 탐구의 과정에 있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자신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일어나는 많은 단상들을 구체화시키고 또 자신들의 삶을 세워나갈 바탕이 되는 사고와 감정의 유형을 발견하도록 돕는 관계입니다. 조력자로 곁에 있어줌으로써 우리는 안전한 경계선이 있는 공간을 그들에게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 공간 안에서 학생들은 움츠러든 방어적인 자세를 버리고 자기 삶에서 강한 면과 약한 면 모두를 부지런히 살펴서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인생의 목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교사는 학생들이 교사들의 꿈이 아닌 그들의 꿈으로 자신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되라고 격려해야 합니다.(109)

기독교 영성의 관점에서는 모든 사람이 치유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이들에게 건강해지도록 치유를 베풀 수 있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우리는 끊임없이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입니다.(113) 우리가 참으로 어느 사람에게 다가가서 치유자가 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해 충분히 알고 싶어하는 자발적인 태도를 가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유란 무엇보다도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정말로 관심 있게 들어주는 사람에게 자기의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밀한 빈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116) 그러므로 치유란 주인이 손님의 이야기를 받아주고 충분히 이해해주는 것을 통해서 낯선 방문객이 주인의 시각으로 자기 나름의 독특한 길을 찾아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118) 

참으로 정칙한 수용이란 방문객을 우리의 조건이 아닌 그들의 조건에서 우리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을 말합니다.(120) 참된 수용에는 대립도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명한 선이 그어 있는 자리만이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자리가 될 수 있으며 경계선은 우리 자신의 위치를 정하는 한계선이 되기 때문입니다.(121) 수용과 대립은 그리스도인의 전도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가지 요소입니다. 이 둘은 조심스럽게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대립이 없는 수용은 어느 누구도 심기지 못하는 상냥한 중립성이 되고, 수용이 없는 대립은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무서운 공격성이 됩니다.(122)

외로움을 느끼면 우리는 사랑과 애정을 받고 싶은 욕구를 갖게 된 나머지 주위의 많은 증표에 지나치게 민감해져서 우리를 거절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사람에게 쉽사리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마음 속에서 삶의 중심을 발견하고 고독을 운명이 아닌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는 상대방에게 자유를 줄 수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온전히 충족되고자 하는 욕구를 포기하면 우리는 상대방에게 비어 있을 여지를 줄 수 있습니다. 가난에 처하게 되면 훌륭한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127-128)

사상과 개념과 견해와 신념으로 가득 찬 사람은 좋은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귀 기울일 수 있는 내면의 자리와 상대방의 선물을 발견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마음가짐인 생각의 가난이란 인생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점점 더 인정해 가는 자세입니다. 성숙할 수록 삶의 충만한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깨달으려는 성향을 포기할 수 있을 것이며 삶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기 위한 채비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129) 잔뜩 우쭐해진 마음은 우쭐해진 지성만큼이나 위험스럽습니다. 훌륭한 주인을 만들어주는 것은 마음의 가난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기에 다른 사람의 체험을 우리에게 주는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133)

섬김의 주된 문제는 '길을 가로막지' 않으면서 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섬김을 위한 훈련은 부유해지기 위한 훈련이 아니라 자원해서 가난해지려는 훈련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려는 훈련이며, 하나님을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자신을 맡기는 훈련입니다.(135) 

3부 하나님을 향한 발돋움

고독과 따뜻한 환대는 그것에 생명력을 주는 더 넓고 깊고 높은 실재와 연결될 때에만 지속성 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움직임을 통해 영원히 실재하시고 자신으로부터 모든 실재를 나오게 하시는 하나님께로 발돋움합니다. (141) 우리 삶이 기도의 심오한 영역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내면 깊이 스며 있는 영원성에 대한 환상입니다.(144) 환상의 가장 눈에 띄는 두 가지 증상은 감상적 태도와 폭력입니다.(146) 

우리 내면의 자아를 향한 발돋움은 단순히 자아의 더 많은 부분을 향한 발돋움이거나 자신의 내면에 있는 콤플렉스들을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한 발돋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발돋움은 사실 새로운 만남이 일어날 수 있는 중심, 고독 가운데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분을 향해 자아를 넘어서 도달할 수 있는 중심을 향한 발돋움이었습니다. 낯선 방문객을 향한 발돋움은 누가 보아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즉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여러 보살핌이 필요한 수많은 사람들을 향한 것 뿐만 아니라 도움을 주는 주인들에게 줄 선물로 그들이 가지고 오는 약속을 향한 발돋움도 의미합니다. 고독과 따뜻한 환대에 대한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미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으신 분, 우리 마음이 느낄 수 있는 것보다 더 깊으신 분, 우리가 팔로 안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넓으신 분, 우리가 그 날개 아래로 피할 수 있는 분, 그 사랑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분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부른다는 것입니다.(152-153)

기도의 훈련에 대해서 말하는 성도들과 영적 인도자들이 계속 되새겨 주는 것은 기도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혼자 힘으로는 진실로 기도할 수 없으며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어떤 관계 안으로 밀어넣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먼저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지 어떤 훈련이나 노력이나 고행이 하나님을 오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는 '은혜', 즉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사이며 우리는 거기에 감사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고귀한 선물이 실로 우리가 손을 뻗어 잡을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는 점을 주저하지 않고 덧붙여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가장 본질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오셨고 이로써 우리는 성령을 통해 그분의 생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15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 그분의 은밀한 생명 가운데 동참한다는 것입니다.(157)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호흡하시는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내적인 생명으로 친교를 나누는 일원이 됩니다. 또 이를 통해 우리는 거듭납니다.(158) 

기도는 위대한 모험입니다. 환상에서 기도를 향하여 움직이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거짓 확신에서 참된 불확신으로 이끌고, 또 손쉬운 버팀목으로부터 위험스런 항복으로, 수많은 안전한 우상들로부터 끝없는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께로 이끌기 때문입니다.(159) 인간이 되신 하나님, 당신께서 단절이라는 우리의 가장 고통스런 경험에 동참하셨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임재하셨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경험하는 것이 바로 이 신비입니다. 무엇보다도 영적인 삶은 끈기있게 기다리는 삶입니다. 즉, 수많은 좌절의 경험들을 통해 하나님이 부재하신다는 생각을 깨달아가는 고통스런 시간 가운데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 속에서의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 한가운데로 오신다는 것을 최초로 알아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임재의 신비는 하나님의 부재를 깊이 의식하는 것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160-161)

자신만의 내력과 환경, 개인적인 성격, 독특한 통찰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자기 나름의 자유가 있는 개별적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친교를 맺도록 부름 받았는지 발견하려면 어디를 보아야 하고, 무엇을 하며 누구에게 가야 합니까? 사실 마음의 기도에 대한 물음은 우리 자신의 가장 개인적인 소명에 대한 물음입니다.(170) 기도를 진실로 꼭 필요한 단 한 가지 것으로 여겼던 사람들의 삶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언제나 다음 세 가지 '규율'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읽는 것, 하나님의 음성을 조용히 듣는 것, 그리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영적인 인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171) 여러 가지 영성은 깊은 통찰력을 지니고서 큰 영향을 끼친 역사상의 인물들과 관련이 있기에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실제적인 안내자로 삼아 우리만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176)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게 되고 불편함을 느끼고 또 어떤 이들에 대해서는 짜증이 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몇 사람 혹은 아마도 한두 사람쯤, 우리 마음의 언어로 말하고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을 역사상의 인물들 중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들이 우리의 안내자들입니다.(178)

우리가 우리의 생각에서 모든 사고들을 비워내고 마음에서 모든 경험을 비워낼 때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집을 내면 존재의 중심에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189) 

환상에서 기도를 향해 움직이기 위해서는 우리를 묶고 있던 모든 거짓된 속박에서 점차 벗어나서, 모든 선한 것을 주시는 그분께 점점 더 복종해야 합니다. 안전한 장소가 그릇된 안전을 주며 미지의 곳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약속해준다는 점을 안다 할지라도, 안전한 장소에서 미지의 곳으로 움직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친숙한 것을 포기하고, 팔을 벌려 우리가 정신적으로 붙들고 매달리는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그분을 향해 발돋움하면 우리는 매우 상처받기 쉬운 위치에 있게 됩니다. 환상에 집착하면 불완전한 삶을 살게 되지만 사랑 안에서 항복하면 십자가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점을 어디에선가 알게 됩니다.(191-192) 그러므로 기도란 결코 달콤하거나 쉬운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가장 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우리에게서 고통을 없애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도는 더 고난을 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고, 우리가 느끼게 되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그분이 사랑으로 인간의 모든 고통을 품으시는 친밀함이기 때문입니다.(192-193)

소망 가운데서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은 영적인 삶의 기초입니다. 하지만 이 기다림이 기쁨으로 충만한 것임을 아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그분의 영광을 미리 보기 때문입니다.(194) 기도가 바로 개인적인 것이고 또 우리 삶의 중심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합니다. 기도는 인간됨의 가장 귀중한 표현이기 때문에 기도를 자라나게 하고 꽃필 수 있게 하는 공동체의 끊임없는 뒷받침과 보호가 있어야 합니다.(195) 신앙 공동체는 실상 모든 기도의 토양과 근원이 되는 곳입니다.(196)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도움이 되는 것은 공통의 소망 안에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안전한 피난처로 삼거나 아늑함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삼으려는 이들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앞으로 올 것을 바라보도록 계속해서 격려해야 합니다.(197) 우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무엇보다 먼저 서로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존재라는 점을 서로에게 일깨워주어야 합니다.(198)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하나님이 만드신 백성이라는 자기 이해에 비추어 그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시도들을 통해 그런 양식과 기법들을 상대화해야 할 것입니다.(200) 기도는 오히려 공동체의 본질입니다.(201) 

공동체가 없을 때 개인 기도는 쉽게 자기중심적이고 별난 행동으로 전락해버리지만 개인 기도가 없을 때 공동체의 기도는 쉽사리 의미 없는 상투적인 일과로 바뀌고 맙니다. 개인 기도와 공동 기도를 나누면 틀림없이 해를 입게 됩니다.(203) 마음의 기도는 신앙 공동체의 경계선 안에서 강해지고 깊어질 수 있습니다.(204)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하나님께 발돋움하면서 우리를 얽어매는 환상을 끊임없이 떨쳐버릴 때, 마침내 그분이 돌아오실 날을 여전히 기다리면서도 그분과 친밀한 하나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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