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모래 물거품

억스리 2009. 1. 1. 17:26

칼릴 지브란 - "모래. 물거품 (Sand and Foam)"

 

 

 




일곱번 나는 내 영혼을 경멸하였습니다.

제일 처음
나의 영혼이 저 높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
비굴해지는 것을 알았을 때입니다.

두번째는
나의 영혼이 육신의 다리를 저는 사람들 앞에서
절룩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입니다.

세번째는
나의 영혼이 쉬운 것과 어려운 것 사이에서
쉬운 것을 선택하는 것을 보았을 때입니다.

네번째는
나의 영혼이 잘못을 행하고서도
타인들도 잘못을 행하노라고
스스로 합리화하였을 때입니다.

다섯번째는
유약함으로 몸을 사려 놓고는
그것이 용기에서 나온 인내인 양 짐짓 꾸밀 때입니다.

여섯번째는
어떤 사람의 얼굴이 추하다고
마음 속으로 경멸했을 때입니다.
바로 그 얼굴이
내 마음 속의 가면들 중 하나라는 것은 모르는 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영혼이 아부의 노래를 부르고
그것을 덕이라 여길 때입니다.  

  

 

 

이제야 비로서 나는,
생명의 우주 속에 불규칙하게 떨고 있는
한 조각임을 알았습니다.

오늘 나는 내 자신이 바로 그 우주라는 것,
율동적인 조각들로 이루어진 모든 생명은
이제 내 안에서
고동치고 있음을 압니다.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나 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와 네가 살고 있는 세계는 무한한 바다 그 끝없는 해안에 뒹구는 모래 알갱이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면 나는 꿈속에서 그들에게 대답합니다.
"내 자신이 바로 그 무한의 바다.
그리고 모든 세상은 나의 해변에 뒹구는 모래 알갱이일 뿐이다."

단 한 번 침묵하지 않을 수 없던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 때입니다.
"너는 누구인가?"  
신께서 가장 먼저 생각해 내신 것은 '천사'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신의 입을 통해 흘러 나온 말씀은 '인간'이었습니다.

예전에 손 하나 가득 안개를 쥐어 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그 손을 펼쳐 보니 아, 안개는 한 마리 벌레로 변해 있지 않겠습니까?

다시 나는 손을 쥐었다 폈습니다.
그 안에 새 한 마리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 한 번 손을 쥐었다 펼쳤을 때,
손바닥 위에는 슬픈 얼굴을 하늘로 향한 채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 더 손을 쥐었다 폈을 때,
그 안에는 다시 한줌  가득 안개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들었습니다.
넘쳐 나는 환희의 노래를.

'믿음'이란 '생각'이라는 것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마음 속의 오아시스입니다.
우리는 그저 방황하며 무언가를 몹시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저 바다와 숲을 스치는 바람이 우리에게 말을 주기 수 백만 년 전에는.

그러니 오늘 우리가 어떻게 바로 어제의 소리만으로
우리 안에 살고 있는 그토록 오랜 옛날의 갈망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스핑크스가 단 한 번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알의 모래 알갱이는 하나의 사막.
그리고 하나의 사막은 한 알의 모래.
그러니 우리 모두 다시 침묵합시다."

나는 스핑크스의 그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전에 나는 한 여인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 얼굴에는 아직 세상에 나지 않은 그녀의 어린 아이 얼굴이 있었습니다.

한 여인이 나의 얼굴을 들여 다 보았습니다.
그녀는 나의 얼굴에서 내 모든 조상들의 얼굴을 발견해 내었습니다.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이제 나는 나 자신을 채우려 합니다.
내 자신 지성적인 생명들이 살고 잇는 우주가 되기 전에,
어떻게 스스로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모든 인간의 목표가 아니겠습니까?

한 알의 진주는 한 알의 모래 알갱이 둘레를 고통으로 쌓아 올린 신전입니다.
우리의 육체들은 어떠한 갈망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 육체들에 심지 박혀 있는 이 알갱이는 무엇입니까?

신이 나를, 하나의 자갈을,
이 경이로운 호수에 던졌을 때,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수면을  어지럽혔습니다.
그러나 호수 깊은 곳에 도달하자 나는 침묵하게 되었습니다.

내게 침묵을 주십시오.
그리하면 나는 밤을 견디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 나는 유난히 귀가 밝은 사람을 알고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벙어리였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혀를 잃었던 것입니다.
이제 나는 그에게 이 위대한 침묵이 오기 전에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가 알 것 같습니다.

그가 죽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 둘을 다 수용할 만큼 충분히 넓지 못했던 까닭입니다.

나는 영원토록 이 해변을 거닐고 있습니다.
모래와 물거품 그 사이.
높은 파도에 나의 발자국은 지워져 버릴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와 물거품 또한 날려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바다와 이 해안은 영원까지 남을 것입니다.

나의 영혼과 육신이 서로를 사랑하여
결혼하던 날, 나는 제2의 탄생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래도록 나는 이집트 사막의 먼지 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소리 없이, 계절의 바뀜도 모르는 채.
그 때 태양이 내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일어서서 나일 강둑을 따라 걸었습니다.
낮고 함께 노래하고 밤과 함께 꿈을 꾸며.

이제
태양은 그 수 천의 발로 나를 짓밟아 다시 이집트의 먼지 속에 묻어 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수수께끼를 보십시오.
나를 거두어 내게 생명을 주었던 바로 그 태양이 나를 다시 짓밟아 흩뜨려 버릴 수 없음을.

아직도 나는 곧게 서서 나의 두 발이 나일 강둑 위를 걷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낍니다.  

기억은 만남의 또 다른 형태.
망각은 자유의 한 형태 입니다.  
고독은 우리의 말라죽은 가지들을 부러뜨리는 고요한 폭풍.

우리의 살아 있는 뿌리들을 숨쉬는 대지의 고동치는 가슴 속에 더욱 깊이 박아줍니다.  
우리는 끝없는 태양의 움직임을 보고 시간을 헤아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머니 속에 있는 작은 기계로 시간을 헤아립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어떻게 우리 모두가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서로 만날 수 있는지를. 

 

 

 

우주는 지구와 태양 사이의 공간을 뜻하지 않습니다.
은하수의 창을 통하여 내려다 보고 있는 사람의 눈에는.  

천국으로 가는 도중에 나는 한 사람의 순례자를 만나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 길이 진짜 천국으로 가는 길입니까?"
"저를 따라 오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하루 낮 하루 밤 만에 천국에 다다를 것입니다."
그의 말에, 나는 그를 따라 갔습니다.

우리는 여러 날 여러 밤을 걸었습니다만 아직도 천국에 도착하지 못하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나를 잘못 인도한 데 대해 그 사람이 내게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천상에 사는 영혼들은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의 고통을 부러워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인간애.
그것은 영원 그 이전으로부터 영원까지 이어지는 빛의 강줄기입니다.

인간애는 침묵하는 감성 속에 있는 것.
결코 수다스러운 지성 속에 있지 않습니다.  

신이시여 부디 저를 사자의 밥이 되게 해주십시오.
저 토끼가 저의 먹이가 되기 전에.

밤의 길목을 지나지 않고 새벽에 다다를 수는 없습니다.
나의 집이 내게 말합니다.
"나를 떠나지 마세요. 당신의 과거가 여기에 살고 있으니까요."

길은 또 내게 말합니다.
"이리 와서 나를 따르세요.
내가 바로 당신의 미래니까요."

나는 집과 길, 모두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나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만약 내가 여기 머무른다면 그 나아감 속에 또한 머무름이 있다.
단지 사랑과 죽음만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 뿐."

기다림은 시간이 새겨 놓은 자국입니다.  
어떻게 삶의 정의로움에 대한 나의 신념을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깃털 침대 위에서 자는 이들의 꿈이
차가운 땅바닥에서 자는 이들의 꿈만큼 아름답지 못한 이때에.

참 이상한 일입니다.
쾌락을 향한 나의 욕망이 나의 고통의 일부인 것은.  

밤이 오고 그대가 어둠에 묻혔을 때,
자리에 누워 진정 어둠이 되십시오.
아침이 오고 그대가 아직 어둠일 때,
일어나 한낮에게 진심으로 말하십시오.
"나는 아직도 어둠입니다."
어둠인 그대가 낮이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밤과 낮 둘 다 그대를 비웃을 것입니다.  

 

 

그대는 눈이 멀고, 나는 귀머거리 벙어리 입니다.
그러니 우리 서로 손을 잡고 서로를 이해합시다.  

우리들 중 몇몇은 검은색 잉크와 같고
또 어떤 이들은 하얀 종이와 같습니다.

그 몇몇의 '검은색'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벙어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 어떤 이들의 '하얀 색'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눈이 멀어 버렸을 것입니다.

나에게 귀를 주십시오.
그리하면 내 그대에게 목소리를 드리겠습니다.

나는 절대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무지에 대해 겸손할 줄은 압니다.
바로 거기에 나의 긍지가 있습니다.

천국은 저기, 저 문 너머  바로 옆방에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방의 열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그것을 놓아둔 곳을 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상상과 성취 사이에는 커다란 공간이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열망 만으로만 뛰어 넘을 수 있는.  
인간의 의미는 그가 성취한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가 그토록 성취하고자 하는 열망 속에 있습니다.

그대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축복을 갈망하고 까닭도 없이 슬퍼질 때,
그때 비로서 그대는 자라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자라나며,
더욱 큰 자아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가지 꿈에 취해 있을 때 그것을 아주 조금 표현하기만 해도
부드러운 술과 같이 향기롭게 느껴집니다.  

그대는 취하기 위해 술을 마시지만
나는 다른 술로부터 깨어나기 위해 술을 마십니다.  

나의 잔이 비었을 때 나는 그 비어 있음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잔이 반쯤 차 있다면 오히려 그 반밖에 없음을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성은 해면이고,
우리들의 감성은 강물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이 흘러가기보다는 빨아들이는 쪽을 선택함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타인의 실체는 그가 그대에게 보여주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그가 그대에게 보여줄 수 없는 부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대여,
타인을 진정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가 하는 말을 듣지 말고,
그가 하지 않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내가 하는 말의 반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무의미하지 않은 그 나머지 반을  그대에게 전하고자
의미롭지 못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머 감각은 균형에 대한 감각입니다.
만약 겨울이 "내 가슴 속에는 봄이 있다." 라고 말한다면 누가 겨울의 말을 믿겠습니까?"  

모든 씨앗은 하나의 갈망입니다.  
신이시여,  넘치도록 풍부한 이들도 채워 주소서.

타인들이 내가 큰 소리로 떠벌린 결점들은 칭찬하면서도
오히려 자랑하지 않은 미덕은 비난할 때,
나의 외로움은 시작됩니다.  

인생이 자신의 마음을 노래해 줄 가수를 찾지 못하게 될 때,
인생은 자신의 사상을 말해 줄 철학자를 탄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은 언제나 알려지는 법,
그러나 진실은 가끔 아주 가끔만 이야기되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본질적인 것들은 침묵합니다.
반면에 비본질적인 요소들은 시끄럽게 떠들어 댑니다.  

내 안에 있는 生의 목소리는 그대 안에 있는 인생의 귀에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그럴지라도 우리, 서로 외로워지지 않도록 이야기 나누며 살아갑시다.  

두 여인이 이야기할 때, 그들은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여인이 말을 할 때 그녀는 삶의 모든 것을 드러내어 줍니다.

개구리는 황소보다 더 큰 소리로 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개구리는 쟁기를 끌 줄도,
연자방아를 돌릴 줄도 모르고,  그 가죽으로는 신발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벙어리만이 수다쟁이를 부러워합니다.  
여인은 그녀의 얼굴을 한 자락의 미소로 가릴 수 있습니다.

여자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  
천재를 해부해 보고자 하는 사람,
또는 침묵의 신비를 풀고자 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밤의 꿈에서 깨어나 아침 식탁에 앉으려는 사람입니다.  

그대가 그대의 눈을 진정으로 열고 본다면,
그대는 모든 영상들 속에  그대 자신의 영상을 볼 것입니다.  
그대가 진정으로 그대의 귀를 열어 듣는다면,
그대는 모든 목소리들 틈에서 그대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 위에는 끝없는 말의 파도가 넘실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깊은 곳은 영원토록 침묵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원칙들은 한 장의 유리창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토해 진실을 보지만, 그것은 우리들을 진실로부터 갈라놓습니다.  

진리를 발견하는 데는  우리 두 사람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은 진리를 말하기 위하여,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나는 걸어가고 있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걷고 싶습니다.
나는 행령이 지나가는 것을 그저 서서 바라보기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마음이 들고 한데 어울려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려 애쓰는
슬픈 마음은 얼마나 고귀한 마음입니까?  

위대한 사람은 두 개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고통으로 아파하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인내하는 마음입니다.  

자, 이제 우리 술래잡기를 합시다.
그대가 내 마음 속에 숨는다면 그대를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그대의 껍질 뒤로 숨는다면  그 누가 그대를 찾으려 한들 부질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대에게 봉사하는 이에게 그대는 황금보다 더한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당신의 마음을 주십시오.
아니면, 차라리 그를 섬기십시오.

 

 

 

 

그렇게 까다롭게 굴거나 편파적으로 굴지 맙시다.
시인의 영혼이나 전갈의 꼬리나 모두 벅찬 기쁨으로 솟아오릅니다.
이 똑같은 지상에서.

한 그루의 나무는 대지가 하늘에 쓰는 한 편의 詩.
우리는 우리의 공허를 기록하기 위해 그 나무를 베어 종이를 만듭니다.

그대가 진실로 글쓰기를 좋아한다면
(물론 신만이 그 까닭을 알지만)
반드시 지식과 기술, 그리고 마법을 갖추어야 합니다.

-언어라는 음악에 대한 지식,

-꾸밈없는 기술,

-그리고 그대의 독자를 사랑할 수 있는 마법을.

사람들은 그들의 펜을 우리의 마음 속 잉크에 적셔 놓고 영감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한 그루의 나무가 자서전을 쓴다면  그것은 한 종족의 역사와 다름없을 것입니다.  

만약 내게 시를 쓸 수 있는 힘과 미처 형상화되지 못한 시에서 느끼는 황홀 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황홀 감 쪽을 택할 것입니다.
물론 그대와 내 주위의 사람들은 언제나 나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을 할 것입니다만.  

詩란 의견의 표명이 아닙니다.
詩는 피 흘리는 상처로부터
혹은 미소하는 입술로부터 태어난 한 소절의 노래입니다.  

말은 영원한 것.
그대가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
반드시 그 무한함을 알아야 합니다.  

시인은 폐허가 되어 버린 성
그 잿더미 속에 주저 앉아 재속에서 과거 영광의 영상들을 짜맞추려 안간힘을 쓰는
왕위를 빼앗긴 한 사람의 왕입니다.  

시는 무진장의 기쁨과 고통, 경이로움,
그리고 단 한 줌의 어휘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시인은 그의 가슴 속에 간직한 노래의 뿌리를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일입니다.  

예전에 나는 한 시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죽기 전에는 당신의 가치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언제나 진실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나의 가치를 알고자 하신다면,
그것은 나의 혀보다는  나의 가슴 속에,
나의 손 끝보다는 나의 소망 속에 간직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대가 아름다움을 노래한다면,
비록 사막 한가운데 홀로 있다 하여도 들어주는 이가 있을 것입니다.  

詩는 마음을 사로잡는 지혜.
지혜는 머리 속에서 읊어지는 한 편의 詩.
우리가 만일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고
동시에 머리 속에서 노래할 수도 있다면
진실로 우리는 신의 넉넉한 그늘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靈感은 언제나 노래합니다.
결코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곧잘 우리 아이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줍니다.
그러나  그 자장가 소리는 오히려 우리들을 잠재웁니다.  
모든 우리의 말들은 영혼의 성찬에서 떨어져 흩어진 빵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각은 언제나 詩를 가로막는 방해물입니다.  
위대한 음유 시인은 우리들의 침묵조차 노래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대의 입 속에 음식이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게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의 손에 황금이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게 그대의 손을 축복 속에 환호하면 들어올릴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이팅게일이 사랑의 노래를 부를 때는 가시로 제 가슴을 찌른다고
우리네 인간도 그러합니다.
그러지 않고 우리들이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미친 사람도 그대나 나에 못 지 않은 음악가입니다.
단지 그가 연주하는 악기가 음률에서 조금 벗어났을 뿐입니다.  

어머니의 가슴 속에 조용히 간직 되어 있던 노래는
어린아이의 입술을 통해 흘러 나옵니다.  

 

 

 

 

 

 

 

 

나는 결코 나의 또 하나의 자아와 조화를 이루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문제의 진실은 우리 둘 사이에 놓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대의 또 다른 자아는 늘 그대를 불쌍히 여깁니다.
그러나, 그 자아는 슬픔을 먹고 자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의 갈등이란 없을 것입니다.
육체는 음조를 벗어난 채 방황하고,
영혼은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마음 속 이외에는.

그대가 생의 한가운데 도달한다면,
그대는 모든 물상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볼 수 없는 눈 먼 사람들의  탁한 눈동자 속에서조차.  

우리는 단지 아름다움을 찾아내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기다림의 한 형태일 뿐입니다.  

씨를 뿌리십시오.
그러면 대지가 그대에게 꽃을 피워 줄 것입니다.
하늘에까지 이르도록 소망하는 바를 꿈 꾸십시오.
그러면 하늘은 그대에게 사랑하는 이를 보내 줄 것입니다.  

봄에 핀 꽃은 천사들이 식탁에서 주고 받는 겨울날의 꿈 이야기입니다.

수많은 여인들이 남자의 마음을 빌립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남자의 마음을 소유할 줄 아는 여인은 드뭅니다.  

그대가 진실로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그대의 것임을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남자의 손이 한 여자의 손을 맞잡을 때
그 두 손은 합쳐져 영원의 정수를 어루만집니다.  

사랑은 연인과 연인 사이에 늘어진 베일입니다.  

모든 남자는 두 사람의 여인을 사랑합니다.
그 하나는 그의 상상이 탄생시킨 여인이며,
또 다른 하나는 미처 태어나지 않은 여인입니다.  

여인의 사소한 잘못을 용서할 줄 모르는 남자는
그 여인이 갖고 있는 위대한 덕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매일 매일 스스로 새로워 지지 않는 사랑은
습관이 되어 버리고 결국은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여인들은 서로를 끌어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있는 그 무엇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사랑과 의심은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입니다.

사랑은 빛의 종이 위에 빛의 손길로 쓰여진
빛의 언어.  

그대가 가진 가장 빛나는 옷은 타인의 솜씨로 지어진 것.
그대가 먹는 가장 맛있는 음식은 타인의 식탁에서 먹는 음식.
그대가 누워 자는 가장 편안한 침대는 타인의 집에 놓인 것.

그러니 말씀해 보십시오.
과연 그대가 그대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 있는가를.

그대의 이성과 나의 감성은 결코 서로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대의 이성이 숫자 헤아리기를 멈추고
나의 감성이 안개 속을 헤매는 것을 멈출 때까지는.

우리가 하고 있는 말을 일곱 마디로 줄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의 마음이 깨어지지 않고서 어떻게 열릴 수 있겠습니까?

우정은 항상 달콤한 책임.
결코 이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닙니다.

그대의 친구가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영원히 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 이 역설을 보십시오.
가장 깊은 것과 가장 높은 것은 그 사이에 있는 것보다
서로에게 더욱 가깝습니다.


 

 

커다란 슬픔, 혹은 위대한 환희만이
그대가 간직한 진실을 드러내 줍니다.
만일 그대가 모든 것을 다 드러내고자 한다면
그대는 태양 아래 옷을 벗고 춤을 추거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대는 자유롭습니다.
한낮의 태양 앞에, 깊은 밤 별들 앞에.
또한 그대는 자유롭습니다.
태양도 달도 별도 모두 존재하지 않을 때.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있는 앞에서도 두 눈을 감을 수 있다면 그대는 진정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사랑하고 있는 이 앞에서 그대는 노예입니다.
그대가 바로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그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에.  

우리가 만족에 겨우 하는 말을 자연이 듣는다면 강물은 더 이상 바다를 찾지 않을 것이고
겨울은 더 이상 봄이 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검약에 대해 하는 말을 자연이 듣는다면
우리들 중 이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대가 태양으로부터 등을 돌릴 때
그대는 그대의 그림자만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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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소개 >>

 

위대한 정신 칼릴 지브란과의 만남


<모래 물거품>은 폭넓은 철학의 세계를 지닌 시인 칼릴 지브란의 깊은 정신과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그는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인간 세상의 모습들을 읊어 내는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인생의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인식의 방법을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발견하게 한다.
자아와 세계, 神 그리고 아름다움과 죄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간들이 세상 속에서 만나게 되는 숱한 삶의 모습들을 깊은 성찰과 사랑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칼릴 지브란의 말년을 공유한 벗이며 그의 전기를 쓰기도 했던 바바라 영은 "<모래 물거품>은 다른 책의 언어들이 갖지 못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 높이, 깊이, 넓이 등으로 이루어진 3차원의 세계뿐 아니라 4차원의 세계 즉, 영원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우리의 의식을 필연적으로 그리고 깊숙이 꿰뚫어 낼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시인, 철학자, 화가로서 완전한 자아, 완전한 예술가를 추구했던 칼릴 지브란의 지혜와 철학이 빛나고 있는 영원성의 세계 <모래 물거품>은 우리에게 참된 삶의 의미와 진리를 일깨워 줄 것이다.

 

<< 저자 소개 >>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2.6~1931.4.10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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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며 화가이고 '예언자'인 칼릴 지브란은 1883년 1월 6일 아름다운 삼나무 숲이 향기를 뿜는

예언자의 땅 레바논의 비샤리(Bsharri ; 베챠리)에서, 마론파(Maronite) 교회 목사의 딸인 어머니와 부유한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지브란의 아버지는 가산을 탕진하고 가정 불화가 심화되자, 그의 어머니는 남편을 남겨둔채 아이들을 데리고 1895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보스톤의 빈민가에 정착을 했다.

지브란은 1898년 8월 레바논으로 돌아와 베이루트의 지혜의 학교(Madrasat Al Hikmat)에 입학했다. 이 기간 중(1899)에 할라라는 여인과 이루지 못할 사랑을 경험한다.
1902년 레바논을 떠나, 보스톤으로 돌아온 지브란은 그림을 그리며 아랍어 저술을 시작했다. 1904년 5월 그림 전시회 기간 중에 메리 헤스켈(Mary Elizabeth Haskell)을 만나게 된다.
1908년 M.E.H의 도움으로, 지브란은 미술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났으며 그를 '20세기의 블레이크'라고 불렀다는 로댕을 만나기도 했다. 영국 작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와 그림은 니체의 작품과 함께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10년 미국으로 돌아왔다.귀국후 뉴욕으로 자리를 옮겨 그리니치 빌리지의 작업실, 즉 아랍 문인들이 '은자의 집'이라 부른 공간에서 창작에 몰두하였다.
1923년, 지브란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예언자]를 완성하였으며, 생애 대부분을 뉴욕에서 보냈다.

젊은 시절의 지브란은 오토만 투르크의 압제와 착취에 신음하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작은 화산'처럼 분노와 투지를 폭발시킨 '반항하는 정신'이었으며, 빈곤과 불의와 부패, 제도화된 폭력을 규탄하여 인권이 주목받지 못했던 시대에 인간의 존엄을 강조한 열렬한 인권옹호자였다.
또한 이미 20세기 초에 오늘의 생태주의자들처럼 아름다운 지구의 소중함을 일깨우면서 자연을 경배하고 보호하며 자연과 교감하면서 자연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선각자였다.

지브란은 1931년 4월 10일, 부활절 후 첫 번째 금요일 밤 10시 50분, 48세로 뉴욕 성 빈센트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 참고자료 목록 :
 
  1) [아름다운 영혼의 순례자, 칼릴 지브란] / 이창희 옮김 / 두레 / 2000
    2) [모래,물거품] / 정은하 옮김 / 진선출판사 / 1989
    3) [부러진 날개] / 이종욱 옮김 / 한길사 / 1999

 

 

 

 칼릴 지브란의 작품 연보

 

Nymphs of the Valley (1906) : 계곡의 요정(님프)

  칼릴 지브란이 1906년을 전후로 쓴 '마르타, 미친 유한나, 천년의 먼지와 영원한 불'을 일컫는다. 1948년에 한 데 묶어 출판하였다. '마르타'는 중동 지역의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 자연과 도시의 대조, 시골과 도시의 대조를 그리고 있다. '미친 유한나'에서는 중동의 부패, 착취, 위선을 고발했다. '천년의 먼지와 영원한 불'은 윤회와 예정된 사랑을 다루고 있다.

Spirits Rebellious (1908) : 반항하는 영혼 (=반항하는 정신)
  '반항하는 영혼'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앞선 '계곡의 님프'처럼 레바논의 억압적 사회 체제를 중심 주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같은 주제를 더욱 직접적이고도 자신만만한 톤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권력의 부당한 남용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데 그친 '계곡의 님프'와는 달리 긍정적인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작품은 '이단자 칼릴, 무덤들의 외침, 와르데 알 하니, 신부의 꽃가마' 등 네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아랍어로 쓴 작품이다.

The Broken Wings (1912) : 부러진 날개
  1912년 1월 아랍어 단편 '부러진 날개'가 출간되었다. 그는 아랍어로 된 헌사를 영어로 번역해서 책에 쓴 뒤 M.E.H 에게 보냈다. 이 책으로 아랍 세계에서 그는 유명해졌으며, May Ziadeh 라는 비평가의 눈길을 끌었다. 그녀와는 나중에 특이하고도 깊은 친분을 갖는다.
'부러진 날개'는 그의 몇 권 밖에 되지 않는 소설 가운데 가장 긴 작품으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예언자'가 영어로 쓴 걸작이라면 '부러진 날개'는 아랍어로 쓴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2년 유세프 말루프 감독에 의해 1시간 30분 길이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

A Tear and A Smile (1914) : 눈물과 미소
  아랍어 작품인 '눈물과 미소'에서는 이민 초기 지브란이 느꼈던 소외감을 반영하고 있으며, 여기서 '미소'는 그의 상상 속에서 레바논이 형이상학적인 고향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의 희열을 그린 것이다.

The Madman (1918) : 광인
  1918년, 36세가 된 칼릴 지브란은 영어로 쓴 첫번째 작품 '광인(The Madman)'을 발표했다(니체식의 아이러니 동원). '광인'에 나오는 각 우화는 교훈을 담고 있으며, 지브란이 후기 작품에서 다루게 될 주제를 암시하는 것도 있다. 악의, 위선, 불의, 순응, 야망, 맹목성, 청교도주의 등이 신랄하게 풍자되어 있으며, 비록 서정적으로 표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냉소적인 어조가 지배적이다.
일부 번역서 중에 그의 연보를 실으면서 '아씨(Madam)'가 영어로 쓴 최초의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

The Procession (1919) : 행렬 (=영가)
  1919년 아랍어로 출판된 '행렬(The Procession)'은 자유와 기쁨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젊은이와 세상의 무익함을 한탄하는 현자와의 대화 형식으로 쒸어졌다. 현자는 '노인'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더 적절했을지 모르는데, 지브란의 세상에 대한 권태감, 세상의 패러독스와 비참함, 그리고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
'행렬'의 아랍어 원본은 200행이나 되며, 4행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각각의 4행시에는 운율이 있다. 4행시 다음에는 젊은이가 노래하는 후렴구 형태의 2행시가 이어진다. 젊은이가 말하는 부분의 운율은 활기 차고 밝은 반면 현자의 운율은 좀 더 무겁고 설교조와 웅변조이다.
국내 번역서의 경우 '행렬(행진)' 대신에 '영가'라는 표제어를 사용하고 있다.

The Tempest (1920) : 폭풍우 (=대폭풍우)
  1920년 여름 칼릴 지브란은 '폭풍우'를 발표했다. 이 책에서는 니체의 독설적 시각에 영향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집에서 받는 일반적인 인상은 비록 '눈물과 미소'에서 보여 준 더 낙천적인 분위기와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또다시 절망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있음을 느끼게 한다.

The Forerunner (1920) : 선구자
  1920년 9월 칼릴 지브란의 두번째 영어 작품 '선구자 - 그의 우화와 시'가 출판되었다. 이 모음집의 중요 주제는 각성의 필요성으로서 이 시대에 대한 지브란 자신의 열망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The Prophet (1923) : 예언자
  칼릴 지브란의 대표작이다. 1923년 9월 말에 산뜻하면서도 검은 표지의 2달러 25센트짜리 작은 책이 복잡한 뉴욕 서점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겨우 2만 단어밖에 안되는 철학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이 책은 일반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 달만에 초판 1,300부가 모두 팔렸고, 1937년까지 129,233부가 팔렸으며 지금 현재까지도 세계 각국에 번역되어 20세기에 가장 널리 배포된 책 중의 하나가 되었다.

Sand and Foam (1926) : 모래, 물거품 (=모래와 물거품)
  1926년 영어로 쓴 이 작품은 블레이크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다루고 있는 주제는 대부분 '예언자'에서 지브란이 탐색했던 것들로서 시인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반영하는 것들도 포함하고 있다.

Jesus, the Son of Man (1928) : 사람의 아들 예수
  지브란은 1926년 11월에 '사람의 아들 예수'를 쓰기 시작했으며, 대부분을 정신적 압박이 심한 뉴욕을 피하여 보스턴에서 썼다. 1928년 10월 출간되었다.
이 책의 특징은 복음서를 통해 잘 알려진 여러 인물들의 시각에서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The Earth Gods (1931) : 지신(地神)들 (=대지의 신들)
  '대지의 신들'에서는 첫 번째 신과 두 번째 신의 토론, 세 번째 신의 중재형식으로 되어 있다. 비록 이 책에서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의 힘에 관심을 갖고 있기는 하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두운 편이다.

The Wanderer (1932) : 방랑자
  '방랑자'는 지브란이 생의 마지막 3주 동안 쓴 글이다.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우화집으로서 주로 동물이나 식물을 의인화해 처세에 관한 교훈을 암시한 '이솝우화'나 퐁텐의 '우화집'과는 전혀 다른 주제의식과 표현의식을 선보였다. 한 비평가는 이를 '시적인 우화'라 불렀다.

The Garden of the Prophet (1933) : 예언자의 동산(=예언자의 정원)
  지브란은 원래 '예언자'를 3부작 중의 첫 권(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논함)으로 하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다룬 '예언자의 동산'을 다음 권으로, 그리고 인간과 신의 관계를 다룬 '예언자의 죽음'을 마지막 권으로 낼 예정이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예언자의 동산'의 원고를 썼고 사후에 바바라 영에 의해 완성되어 출간되었으나, 그의 야망이 실현되지는 못했다.


작품 연보 작성시 참고한 자료 목록 :
 
  • 아름다운 영혼의 순례자 칼릴 지브란 / S.부쉬루이 / 두레 / 2000년 발행
  • 방랑자 / 이종욱 옮김 / 한길사 / 1999년 발행
  • 부러진 날개 / 이종욱 옮김 / 한길사 / 1999년 발행
  •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 정은하 엮음 / 진선출판사 / 1988년 발행
  • 예언자.영가 / 유제하, 윤삼하 옮김 / 범우사 / 1982년 발행
  •  

     

     

     

     칼릴 지브란의 작품 구분

     

     

    칼릴 지브란의 작품 구분은 일반적으로 미카일 나이미의 구분과 사힐 바디이 바쉬루이의 구분인 두 방법이 있다. 미카일 나이미의 구분은 작품 속에 나타난 사상의 변천 과정에 따른 사상적 측면에서의 구분이며 사힐 바디이 바쉬루이의 구분은 주로 문학 활동상 사용하였던 언어에 의한 구분이다.

    나이미는 칼릴 지브란 사상의 변천기를 3기로 구분하였는데 초기는 1905~1912년, 중기는 1914~1923년, 후기는 1923년 [예언자]가 출판된 이후의 시기이다. 한편 사힐 바디이는 칼릴 지브란의 문학 활동시기를 아랍어로 작품활동을 하던 제1기(1905~1918)와 그 이후에 영어로 작품활동을 하던 때를 제2기로 보고 있다.

    칼릴 지브란의 작품들을 전술한 나이미의 구분으로 보면 초기·중기는 아랍어로 발표했으며 그후는 영어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출처 : [누구를 위하여 사랑하는가?](칼릴 지브란, 정진우 옮김) / 영아출판사/ 제1판 1990.8.30 / 135쪽)

     

     

    칼릴 지브란 자료출처:http://www.ixia.pe.kr/kahlilgib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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