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스마트 월드: 집단은 한 명의 천재보다 똑똑하다.

억스리 2008. 12. 4. 10:00

출처 : http://blog.periskop.info/111?category=8

 

유용한 정보를 모으자면 당연히 많은 시간과 열정, 수고가 따른다. 그러나 역시 뭐니뭐니해도 돈이 만만치 않게 든다. 홈지기야 직장 도서관이 어느 정도는 해결해 준다지만, 그래도 이 책 저 책 사다 보면 婦納金 맞추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가끔 부업 삼아 여기저기 기고문을 써서 메꾸는 수밖에. 다행히 이번 주에는 H경제신문에 서평을 하나 싣게 되었다 — 리처드 오글(Richard Ogle)이 1년 전쯤 내놓은 『Smart World: Breakthrough Creativity and the New Science of Ideas (스마트 월드: 혁신적 창조성과 아이디어의 新과학)』에 대한 서평이다.

Richard Smart 스마트

따끈따끈한 번역서를 받아들고 신문 주말판의 서평 섹션을 채우기 위해 황급히 써내려간 원고는 이렇다:

집단은 한 명의 천재보다 똑똑하다

최근 정부, 기업할 것 없이 지식경제 시대의 새로운 성장의 동력을 찾으려는 노력이 경주되고 있다. 이미 개발 시대의 성장 모델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해졌다. 그렇다고 소수의 첨단 수출산업에 의존하는 현재의 성장은 양극화와 불안한 국제 환경에 의해 한계에 봉착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지식과 혁신적 아이디어를 창출해낼 수 있는 '혁신적 창조성(breakthrough creativity)'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한때 우리는 이러한 ‘혁신적 창조성’이 그저 '천재'라 불리는 몇몇 뛰어난 개인들의 뇌 속에서 이뤄지는 것으로만 여겨왔다. 이러한 인식은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혁신과 창조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러나 『스마트 월드(Smart World)』의 저자 리처드 오글(Richard Ogle)은 이러한 통념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그는 동서고금의 비즈니스, 과학, 기술, 예술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난 창조에 대한 연구와, 최근의 뇌과학의 발달을 두루 살펴보며 색다른 결론을 내고 있다. 즉, 세상을 발전시킨 창조성은 개개인의 천재성만이 아닌, 사회의 아이디어 네트워크와의 통합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오글은 창조적 도약을 이룬 천재나 거장들은 공통적으로 다양한 지식으로 구성된 아이디어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음을 보이고 있다. 피카소의 걸작 '아비뇽의 아가씨들(Les Demoiselles d'Avignon)'은 그의 두뇌에서 완성되어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트로카데로(Trocadero) 박물관에서 접한 아프리카 미술의 영향 때문에 창조될 수 있었다. 반세기 넘는 히트작 '바비(Barbie) 인형'은 인형을 통해 자신을 성인 여성의 모습에 투영하려던 아이들의 은밀한 욕구와 독일 성인만화 주인공('Bild-Lilli')이 결합됨으로써 탄생했다. 건축계의 흐름을 바꾼 프랭크 게리(Frank Gehry)구겐하임 미술관 빌바오는 건축에 미술과 과학적 원리가 결합되어 탄생했다.

 

창조의 주인공들은 이처럼 이미 사회 곳곳에 존재하고 있던 지식 및 아이디어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두뇌뿐 아니라 이런 네트워크에 내재된 이른바 '배태 지능(embedded intelligence)'까지 폭넓게 활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네트워크를 이용해 아이디어의 상호작용을 끌어내었고, 거기서 발생한 시너지가 창조적 도약으로 영근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만나 상호작용함으로써 영리해진 세상, 즉 아이디어 네트워크로 짜인 유기체적 공간을 '스마트 월드'라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스마트 월드'에서 일어나는 창조의 원리를 최근의 네트워크 과학 및 복잡계 이론과 접목시켜 한층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스티븐 스트로가츠(S. Strogatz), 던컨 와츠(D. J. Watts), 알베르트-라슬로 바라바시(A.-L. Barabasi) 등의 선구적 연구 작업에서 유래한 네트워크 과학은 새롭고도 흥미로운 학문 영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 같은 네트워크 과학은 역동적이고 자기조직적이며 자기변형적인 광대한 아이디어 네트워크의 생성과 진화를 통찰할 강력한 사고의 틀을 제시해준다.

 

저명한 철학자이자 뇌과학자인 앤디 클라크(Andy Clark)는 "우리는 지능을 보다 덜 사용하고도 성공할 수 있도록 우리의 환경을 구축하는 데 우리의 지능을 활용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그간의 학문적, 상식적 견해와는 정반대로 사고가 세상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제시하는 것으로서, 왜 우리가 역동적인 아이디어 공간인 스마트 월드를 이해하고 이를 적극 활용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도 각자의 두뇌의 경계를 넘어 스마트 월드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움으로써 창조의 주인공으로 얼마든지 나설 수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인들은 수많은 인맥 속에서 사고체계에 자연스럽게 네트워크 개념이 스며있다는 장점도 갖고 있다. 『블링크(Blink)』의 저자 말콤 글래드웰도 이러한 동아시아인들의 관계적 사고의 틀이, 창조적 사고와 현대 사회의 성공에 더욱 적합하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우리 스스로가 스마트 월드를 활용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능력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티핑 포인트의 법칙', '핫스팟의 법칙' 등 9가지 법칙을 숙고하고 창조적 도약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현안들에도 분명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언제나 한정된 분량의 신문 지면에 꽉 맞춰 넣으려면 군더더기는 다 빼고, 적당히 좋은 말 많이 골라 써야 된다는 제약이 있으니 그 점 이해 바란다.

 

이 책은 올해 출판계에서 계속 공략하고 있는 주요 키워드인 "창조" 유행의 맥락에서 번역·출간된 책이다. 창조경영을 외치던 회장님께서는 잠수 중이시지만, 창조성과 거리가 먼 대통령이 앉아 있어서 그런지 현장에서 느끼는 목마름은 더한 것 같다. 경제상황은 좋지 않고, 예전처럼 잘나가는 선진국을 열심히 벤치마킹하여 모방하고 각종 요소투입을 늘려 추격하는 식으로는 어림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너나할 것 없이 새로운 활로를 찾겠다고 혁신에 이어 창조까지 외치고 있다. 여기에 국내외 수많은 지식인들이 듣기 좋게 갖가지로 창조의 본성을 해석하고 포장하여 책으로, 강연으로 설파하고 있다. 하지만 각계 경영자들을 가만히 관찰하다보면 여전히 이에 대한 인식이 피상적이거나 아예 잘못된 분들도 여전히 많은 것 같다.

 

가장 큰 문제라면 이른바 '천재론' — 한 사람의 천재가 x명을 먹여 살린다 — 의 허상이 아닐까 싶다. 본질이 곡해된 측면도 있지만, 저 말은 천재가 창조적 드라이브를 걸고 나머지 사람들은 거기에 '묻어 가면' 먹고 살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대기업 임원들은 최고의 인재를 찾겠다고 미국의 유명 대학을 쏘다니며 유학생들에게 공짜밥을 먹여 주는 일에 많은 시간과 돈을 쏟는다. 그런데 정작 가까이에 있는 임직원들을 다독이고 그들의 창조성을 끌어내는 데는 인색하다. 힘들게 유능한 사람들을 채용해와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허드렛일만 시키다가 얼마 안 있어 사표 쓰게 만든다. 그리고는 또 낚아올 사람이 없는지 나가서 출장비와 사이닝 보너스만 축낸다. 이런 식이다 보니 창조는 그저 밖으로 황금알 낳는 닭이 어디 없나 찾아다니고, 안으로 공돌이를 더 효과적으로 쥐어짜는 방법 고민하는 식으로 전락해버렸다.

 

한국처럼 인구 5천만 명이나 되는 경제 구조에서 이런 인식은 치명적이다.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는 사회 인력들이 새로운 용처를 찾지 못하고 계속 생계형 자영업으로 밀려가는 구조적 악순환이 벌어진지는 이미 오래다. 그저 소수의 잘 나가는 기업들로부터의 적하효과(tricke-down effect)나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성장에 솔깃해서 MB 뽑아놓고, 바구니 달랑 짜서 만나(manna)가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모습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천재성, 창조성에 대한 재인식이 무엇보다 긴요하지 않나 싶다. 지난 번에 말콤 글래드웰의 뉴요커 誌 기사 「In the Air: Who says big ideas are rare?」를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도 글래드웰은 '대박 아이디어가 결코 드물지 않다', 즉 위대한 진보가 천재의 전유물이 아님을 꿰뚫어 보고 있다. 시대를 이끌어온 지적인 발전은 기존에 쌓여 있는 수많은 지식과 아이디어로부터 출발한다. 역사 속의 위대한 발명가들 가운데, 그들 누군가 한 명이 없었다고 세계가 퇴보의 늪에서 헤매고 있기라도 할까? 천재는 태초의 광막한 공간에서 뚝딱 세상을 만들어내는 (허구의) 조물주가 아니다. 주변 세계에 있는 지식과 아이디어를 활용하고 조합하여 새로운 형태로 체계화시키는 효율이 뛰어난, 진화의 연쇄고리를 자극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지적 능력의 한계에 갇혀서는 제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창조성에는 한계에 부딪히는 법이다. 오히려 끊임없이 외부의 지식과 아이디어를 접촉하며 이들을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더 큰 성과를 내는 것을 여러 번 보아왔다. 홈지기도 별 성과랄 것은 없지만, 포럼을 운영하던 시절부터 블로깅을 하고 있는 요즘까지 이러한 다이내믹스의 덕을 톡톡히 보아왔음을 느낀다. 포럼에서 색다른 관점을 제시하기 위해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자연스레 더 많은 자료를 찾고 스스로도 공부하기 마련이다. 그런 과정에서 논의에 참여하는 다른 뛰어난 분들의 아이디어와 지적 자극이 없었다면 그만한 진전을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책 『스마트 월드』의 표현대로라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아이디어 공간의 네트워크 속에서 소통하며 시너지를 끌어내는 법을 조금이나마 배웠다고 할까.

 

그러나 『스마트 월드』가 이러한 창조성의 외생적 요인만을 지적하는 것이라면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해외 서평들을 보노라면, 크게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를 번드르하게 포장한 것이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언어가 달랐다 뿐이지 이러한 창조의 속성은 여러 군데서 이미 이야기되던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홈지기의 글에 솔깃하여 이 책을 읽어보시는 분들 가운데서도, 제법 많은 수가 이런 의구심과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까 한다.

 

『스마트 월드』의 가치 포인트는 이를 최근의 네트워크 이론과 뇌과학, 복잡성 과학의 틀에서 이해하고 한데 묶어내려는 시도라는 점에 찾아야 한다. 위에서 이야기한 아이디어의 속성처럼, 하늘 아래 없던 이야기가 터져나온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과학적 지식들과 창조적 경험의 접목으로서의 가치다. 그런만큼 이 책은 창조성의 속성을 담아내는데 이용한 최근의 과학적 논의들을 함께 알아갈 때 훨씬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책이다. 일상에서 느껴왔던 사실이 일견 다른 분야에서 발전된 과학적 체계와 맞닿아 있음은 아드레날린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이런 자극 하나하나가 결국 자기가 익숙하지 않은 분야에까지 지적인 호기심을 뻗고, '스마트 월드'와의 링크를 더 확장시켜주는 요인이 될 것이다. (홈지기도 다음 번에는 이를 좀 더 포괄적으로 음미할 수 있는 추천 독서 목록을 한 번 만들어보든지 하겠다.)

 

결국 기업 현장이건, 교육 현장이건 평범해'보이는' 사람들에게 이런 소통의 능력을 함양시키는 데 더 많은 노력이 기울여져야 한다고 본다. 'copy & paste + 감정 배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보된 기술이 제공해주는 공간을 자신의 아이디어 네트워크로 활용하는 능력 말이다. 스스로가 그런 네트워크에 속에서 의미 있는 링크를 많이 맺고, 자신의 노력을 더해나가는 선순환이 활발히 벌어질 때, 그토록 우리를 짓누르는 '성장'의 활로가 열리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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