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파친코

억스리 2022. 4. 23. 22:29

[출처] https://bandiburi-life.tistory.com/1255

 

독서습관491_좌절한 노아의 죽음과 파친코로 돌아온 모자수 그리고 여자의 일생_파친코2_이민진_2

미국에서 활동하는 교포작가 이민진의 <파친코>는 1910년부터 1989년에 이르는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배경으로, 재일교포들의 4대에 걸친 삶의 애환을 생생하게 그려낸 기념비적 대 서사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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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활동하는 교포작가 이민진의 <파친코>는 1910년부터 1989년에 이르는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배경으로, 재일교포들의 4대에 걸친 삶의 애환을 생생하게 그려낸 기념비적 대 서사시이다. 대단히 한국적인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전 세계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389)
저자가 교포로서 미국에서 살아온 경험과 남편을 따라 일본에서 생활하며 재일 조선인들의 삶을 연구하며 완성한 소설이라는 게 느껴졌다. 장편소설 한데 한 가족의 4대의 삶을 압축하여 넣고 약 80년의 세월의 흐름 속에 사건을 나열하다 보니 2부에서는 3대인 노아와 모자수의 이야기를 지나 4대인 솔로몬까지 빠르게 진행되었다. 작은 장이 지날 때마다 청년은 중년이 되고 중년은 노년이 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게 따라가기 쉽지는 않았다. 

 

조국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일본에 남은 사람들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취업이 어렵고 출세가 불가능해지게 되었다. 남겨진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었다. 파친코는 운명을 알 수 없는 도박이라는 점에서 재일교포들의 삶을 상징하는 좋은 은유라고 할 수 있다. (390)

 

장로교회 목사였던 아버지는 하나님의 의도를 믿었지만, 모자수는 인생이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기대하는 파친코 게임과 같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희망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게임에 손님들이 빠지는 이유를 모자수는 이해할 수 있었다. (95)

 

이 소설은 통해 1910년 일제강점기 이후 조선인들의 삶의 단면을 볼 수 있었고, 특히 여러 가지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차별을 당하면서도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흔적을 봤다. 1989년 현재까지 이어지는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차별은 미국에서 살다온 피비의 눈에는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표현된다. 일본에서 태어난 부모가 있고 자신도 일본에서 태어났는데 재일 외국인으로 차별을 받고 해외 출입국도 제한된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전쟁으로 모든 사람들이 달라져버린 것만 같았다. 현재 조선은 전쟁으로 모든 것이 악화되었다. 한때 마음이 부드러웠던 사람들도 모두 날카로워지고 거칠어지는 것 같았다. 순수함은 아주 어린 아이들한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11)

 

"그런 두고 봐야죠." 고로가 순자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모자수를 파친코 소년으로 만들 겁니다. 거리의 부랑아가 되지 않게 해야죠." 모자수가 의자에서 일어나 새로운 자신의 사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33)

 

공부도 잘하고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며 성실했던 노아가 와세대 대학에 진학했지만 고한수가 아버지인 것을 알고 은둔해서 살아간다. 일본인 행세를 하며 가족을 꾸리고 살아가는 부분은 어쩌면 노아의 모습은 유명대학을 진학해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숨기고 일본인으로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조선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인 순자와 아버지인 고한수가 찾아갔을 때 자신의 정체성이 드러난 것에 좌절해서 자살한 것으로 생각한다. 

 

고로는 기계 하나를 골라서 핀을 조절하고 있었다. 매일 게임장 문을 열기 전에 고로는 고무를 씌운 작은 망치로 파친코 기계의 곧은 핀 몇 개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그 핀들을 아주 살짝 두드려서 배당금에 영향을 미치는 금속 공의 진로를 바꾸는 것이었다. 고로가 어떤 기계를 고를지, 어떤 핀을 어떤 방향으로 놓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36~37)

 

"니 어머니는 좋은 분이셨을 끼다. 니를 무척 아끼셨을 끼라." 순자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순자는 한수를 사랑했고, 이삭도 사랑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남자들에게 느꼈던 사랑보다 훨씬 더 컸다. 아이들을 향한 사랑은 자신의 생명이자 죽음이었다. 노아가 떠난 후, 순자는 거의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160)

 

그리고 둘째인 모자수는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기에 일찌감치 가족의 생계에 도움이 되고자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었고 이후 큰돈을 벌게 된다. 재일 조선인은 취업에 제한이 있었기에 '파친코'와 같은 사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파친코는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에 내놓은 조선인들의 삶은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것에 공감된다. 

 

 

 

모자수는 유미를 그곳에 데려가지 못했다. 언젠가는 가려고 했다. 어렵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이제는 여권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자수는 굳이 여권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일본에 사는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여행을 할 수 없었다. 아무런 문제없이 재입국 가능한 일본인 여권을 구하려면 일본 국민이 되어야 했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모자수가 아는 사람 중에는 일본 국민이 되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게 아니면 민단을 통해서 남한 여권을 구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과 연관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가난에 시달리는 그 나라는 독재자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니까. (165)

 

"잘 들어.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이 나라는 변하지 않아. 나같은 조선인들은 이 나라를 떠날 수 없어.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고국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달라진 게 없어. 서울에서는 나같은 사람들을 일본인 새끼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근사하게 차려입어도 더러운 조선인 소리를 듣고. 대체 우리 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공포에 떨고 있어."(220)

 

저자의 의도대로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고, 일본에서 살고 있는 교포들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대한민국이 가난했던 시절에는 남한으로 되돌아오기를 꺼렸을 것이고, 북한으로 간 사람들은 공산주의라는 이념 속에서 총살이 되거나 갈수록 가난해지는 삶을 접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에서 계속 거주하면 남한이나 북한의 여권을 가지고 살고 있어 때가 되면 돌아올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이미 몇 세대를 지났기에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들은 일본인에 가깝지 않을까. 한국으로 돌아와도 적응이 어려울 것이다. 

 

"저는 제 자식들을 위해서 살았심더."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교회에서 목사는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지나치게 보살핀다고 말하며, 가족을 숭배하는 것도 일종의 우상숭배라고 했다. 가족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목사는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것을 가족은 절대 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자식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엄마가 되자 순자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할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는 노아도 아이 아버지가 되었으니, 엄마가 얼마나 자신을 위해서 살았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227)

 

"어쨌든 그때 그 직원은 나쁘지 않았어. 솔로몬은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우리는 추방당할 수 있으니까. 우리에게는 조국이 없어. 인생이란 저 아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니까, 그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지. 내 아들은 살아남아야 해." 솔로몬이 두 사람에게 돌아왔다. 다음에는 사진을 찍었고, 그 후에 다른 방으로 들어가 지문을 찍었다. 그러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248)

 

마지막에 인용된 "이 세상 모두가 다 타국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사람이다."라는 성 빅토르의 휴의 말처럼 살 수 있을까? 

 

 

 

에스코가 웃으며 솔로몬의 왼손을 씽크대에 담그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아직 잉크가 남아 있어."
"그 사람들이 절 쫓아낼 수 있나요? 정말 절 추방할 수 있어요?"
"오늘은 모든 일이 잘 풀렸어." 에쓰코가 이렇게 대답하고는 솔로몬의 손가락 끝과 손톱을 식기 씻는 솔로 부드럽게 문질렀다.(269)

 

"미국에서는 강꼬꾸징이니 조센징이라는 게 없었어. 왜 내가 남한 사람 아니면 북한 사람이 돼야 하는 거야? 이건 말도 안 돼! 난 시애들에서 태어났어. 우리 부모님은 조선이 분단되지 않았을 때 미국으로 갔고." 피비가 그날 하루 동안 편협한 대우를 받았던 일들 가운데 하나를 소리 높여 이야기했다. "왜 일본은 아직도 조선인 거주자들의 국적을 구분하려고 드는 거야? 자기 나라에서 4대째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말이야. 넌 여기서 태어났어. 외국인이 아니라고! 이건 완전 미친 짓이야. 네 아버지도 여기서 태어났는데 왜 너희 두 사람은 아직도 남한 여권을 가지고 다니는 거야? 정말 이상해."(314~315)

 

조선인들에게는 일반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 너희 아버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파친코를 선택한 게 분명해. 아무 훌륭한 사업가겠지. 네 포커 기술이 무에서 나왔다고 생각해? 네 아버지는 후지나 소니에서 일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회사에서는 조선인을 고용하지 않잖아. 알지? 어이, 컬럼비아 대학생 청년, 사실 너도 고용해줄지도 의심스러워. 일본의 많은 곳에서는 아직도 조선인들을 교사와 경찰, 간호사로 고용하지 않아. 넌 돈을 많이 버는 데도 도쿄에서 방을 빌릴 수도 없잖아. 빌어먹을 1989년!(327)

 

유전병인 '언청이'의 유전자는 격동의 한국사 속에서 한국인이면 누구나 숙명적으로 지니고 태어나게 되는, 피할 수 없는 기형적인 삶의 상징처럼 보인다. 입술이 갈라지면 발음이 새기 때문에 말을 잘 하지 못하는데, 이 또한 국제사회에서 자신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한국인이 겪어온 운명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391)

 

책을 덮으며 12세기 유럽의 사상가 성 빅토르의 휴의 말을 떠올려본다. "자신의 조국만 좋아하는 사람은 아직 어린아이와 같아. 어디를 가도 자신의 조국처럼 느끼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세상 모두가 다 타국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사람이다."(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