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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의 전쟁

억스리 2020. 11. 10.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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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파헤치기] 18세기 유럽의 전쟁

통세계사 2 작가 김상훈 출판 다산에듀 발매 2009.06.26. 리뷰보기 (이 글은 위 책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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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세계사 2작가김상훈출판다산에듀발매2009.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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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위 책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8세기 유럽의 전쟁

 

18세기 초반, 이때 유럽에는 패권주의 전쟁이 많이 터졌다. 강한 나라는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 약한 나라는 강대국이 되려고 전쟁을 벌였다. 전쟁 후에는 강대국과 약소국이 분명하게 나뉘게 됐다.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다섯 나라를 강대국으로 부를 수 있다. 영국이 가장 강했고 프랑스가 다음이었는데, 프랑스는 점점 가라앉았다.

 

(1)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연 루이 14세가 있을 때,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최고 강대국이 됐다. 루이 14세는 많은 전쟁에 개입했다. 18세기로 들어서자마자 터진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1701~1714)도 그 가운데 하나다.

1701년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2세 왕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뒤를 이어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립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강대국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었던 것이다. 필립은 펠리페 5세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이를 오스트리아가 강하게 반박했다.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에스파냐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가 너무 커지는 걸 두려워하던 영국과 네덜란드가 오스트리아의 편에 섰다. 이어 프로이센과 포르투갈도 전쟁에 뛰어들었다. 에스파냐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쟁 초반부에는 프랑스가 우세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영국, 네덜란드의 연합군이 이탈리아, 에스파냐에서 계속 승리를 거뒀다. 전쟁은 14년간 계속됐다. 전쟁에 참여한 나라들은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 1714년 라슈타트 조약을 이어 체결한 후 전쟁을 끝냈다.

 

전쟁 후, 밀라노, 사르데냐 등 오늘날 이탈리아 땅에 있는 몇몇 나라와 네덜란드가 에스파냐령에서 신성로마 제국의 영방으로 바뀌었다. 신성로마 제국이 점령한 알자스는 프랑스로 돌아갔다. 영국은 허드슨을 포함해 북미 지역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일부를 빼앗았다. 이 전쟁 후 유럽의 최고 강대국은 영국이 되었다. 프랑스는 이 전쟁을 계기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2) 북방전쟁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이 터지기 한 해 전, 북유럽에서도 큰 전쟁이 터졌다. 러시아와 스웨덴이 발트해의 주도권을 놓고 벌인 전쟁이다. 이 전쟁에도 여러 나라가 뛰어들었다. 전투가 주로 유럽 북부에서 있었기 때문에 이 전쟁을 북방전쟁(1700~1721)이라고 부른다.


표트르 대제 당시 러시아 영토 러시아는 스웨덴을 누르고 발트해까지 진출했다.

30년전쟁 이후 유럽 북부의 발트해 일대에서는 스웨덴이 최고의 강대국이었다. 한 나라의 힘이 너무 크면 주변 국가들은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폴란드는 스웨덴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연합했다.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원을 믿고 스웨덴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스웨덴의 힘이 커지는 게 못마땅했던 덴마크와 프로이센도 러시아와 폴란드 편에 섰다. 먼저 움직인 나라는 폴란드 였지만 연합군의 중심은 러시아였다.

 

이때 러시아의 황제는 바로 표트르 대제였다. 그는 러시아를 진정한 유럽 국가로 만든 인물이었다. 17세기 말 그는 영국, 네덜란드, 스웨덴을 돌아다니며 선진기술을 배웠다.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공장에 취직해 일을 하기도 했다. 표트르 대제는 황제가 된 다음 강력한 개혁을 추진해 짧은 시간에 러시아를 발전시켰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가 발전하려면 바다로 나갈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통로가 바로 발트해였던 것이다. 북방전쟁에 참전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표트르 대제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발트해 근처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기까지 했다.

 

전쟁 초반부는 스웨덴이 강했다. 첫 전투에서 스웨덴 군대는 러시아 군대를 거의 전멸시켜 버렸다. 1709년부터 상황이 역전됐다. 스웨덴 군대는 러시아의 힘이 약해졌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폴란드로 돌렸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 사이 러시아 군대는 힘을 회복해 스웨덴을 공격했다. 폴타바에서 치러진 이 전투에서 러시아 군대는 스웨덴 군대를 대파했다. 이때부터 전세는 러시아로 기울기 시작했다.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이 끝난 1714, 러시아 함대는 총공격을 감행했다. 스웨덴 함대는 러시아 함대를 이길 수 없었다. 발트해가 마침내 러시아의 손에 들어왔다. 그 후 몇 번 더 전투가 있었지만 발트해는 러시아에 넘어간지 오래였다. 몇 년을 더 끌던 북방전쟁은 1721년 뉘스타드 조약이 맺어지면서 끝났다.

 

이 전쟁 결과, 러시아가 새로운 강대국의 지위에 올랐다.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과 북방전쟁만 보더라도 유럽에서 그토록 많은 전쟁이 왜 터졌는지 알 수 있다. 목적은 영토확장과 세력의 팽창이었다.

 

(3)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두 전쟁이 끝난 지 약 20년이 지나고, 이번에는 오스트리아의 왕 자리를 놓고 또 전쟁이 터졌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이다.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프로이센 등 신성로마 제국의 영방국가들 사이에서 시작됐다.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과로 인해, 더 이상 신성로마 제국은 강력한 제국이 아니었다. 합스부르크 왕조도 오스트리아 일대만 통치했지, 외형상으로 보면 오스트리아도 나머지 영방 국가들과 같은 급이 된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프로이센은 합스부르크 황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프로이센의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사사건건 오스트리아와 대립했다.

 

프로이센은 오늘날 독일을 건설한 주역이다. 프로이센이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한 때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뒤를 이어 프리드리히 2세가 왕이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지방 귀족들을 눌렀다. 그들은 프리드리히 2세를 대왕이라고 불렀다. 그는 영토를 넓히기 위해 곧바로 전쟁을 벌였고 그 첫 번째 전쟁이 바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의 발단이 된 인물

1740년 오스트리아 황제 카를 6세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들 후계자가 없었다.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바이에른 왕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로이센이 이때 개입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왕의 계승을 인정해주는 대신 슐레지엔 땅을 달라고 제안했다. 프로이센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답변을 듣기도 전에 군대부터 슐레지엔으로 보냈다. 프로이센이 개입하자 다른 나라들도 참전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바이에른의 편을 들며 군대를 출동시켰다. 두 나라가 도와줌으로 인해 바이에른 왕은 카를 7세라는 이름으로 오스트리아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카를 7세가 죽고,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남편 프란츠 1세가 오스트리아의 왕에 오르며 전쟁이 소강상태가 됐다. 거의 4년간 큰 전투는 한 번도 치러지지 않았다. 1748년 마침내 참전국들이 아헨 조약을 체결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4) 7년전쟁

 


7년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다름아닌 프랑스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은 끝난 게 아니었다. 8년 후 2탄이라고 할 수 있는7년전쟁(1756~1763)이 일어났다. 모든 전쟁이 끝나자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슐레지엔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돌려줄 생각이 없었고 두 나라는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전쟁은 7년간 계속됐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을 공격하기 위해 프랑스, 러시아, 스웨덴과 동맹을 맺었다. 이에 맞서 프로이센은 영국과 제휴를 맺었다. 1756년 프로이센은 신성로마 제국의 영방국가인 작센을 기습 공격했다. 작센과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합스부르크 왕조가 다스리는 국가였다. 초반에는 프로이센이 우세했다. 그러나 1759년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연합해 반격에 나서자 프로이센은 주춤했다. 오히려 계속 밀려 수도인 베를린까지 점령당했다. 그랬던 프로이센에 뜻밖의 구세주가 나타났다. 때마침 러시아의 황제가 바뀌었는데, 새로 황제가 된 표트르 3세가 프리드리히 대왕을 아주 좋아했다.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프로이센은 다시 살아났다.

 

7년전쟁은 1763년 끝이 났다. 결과는 프로이센의 승리였다. 프로이센은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러시아가 북방전쟁으로 유럽 열강의 대열에 들어섰다면 프로이센은 7년전쟁의 승리로 유럽 열강의 일원이 된 것이다.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서열을 묘하게 바꿔놓았다. 이 두 나라는 모두 게르만족이었다. 그 전까지 게르만족의 대표선수는 오스트리아였다.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7년전쟁으로 이 서열이 달라졌다.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거의 대등한 수준까지 올라온 것이다.

 

이 전쟁은 전쟁 당사자국이 아닌 영국과 프랑스의 서열도 확실하게 정해놓았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를, 영국은 프로이센을 지지했다. 결과로 보면 프랑스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또 패한 셈이었다. 모든 전쟁에서 밀린 프랑스는 지는 해가 됐고 영국은 절대 강국이 돼 버렸다. 7년전쟁이 끝나면서 체결된 파리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북미 식민지의 거의 전부를 영국에 빼앗겼다.

 

북방전쟁과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초반인 1707,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의회가 만장일치로 양국의 통합을 결정했다. 대영 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영국이 최고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일찌감치 내부 정치가 안정됐기 때문이었다.

 

(5) 오스만제국의 패배

발칸반도에 둥지를 틀고 스스로 유럽에 속한 오스만 제국은 18세기부터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기독교의 유럽 국가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다 마지막에는 오스만 제국을 타깃으로 삼았다. 17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오스만 제국이 유럽 국가들보다 군사력과 문화수준이 뒤떨어지지는 않았다. 문제는 오스만 제국이 세계정세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것에 있었다. 어떤 나라도 오스만 제국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자만했다.

 

오스만 제국을 가장 힘들게 만든 나라는 신생 강대국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을 장악하면 흑해를 통해 지중해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 통로를 확보하고자 했다. 오스만 제국은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여섯 번이나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6회의 전쟁에서 모두 러시아가 이겼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은 암흑의 19세기를 맞게 된다.

 

(6) 유럽 열강의 세계 공략

 

 

영국이 건설한 13개 식민지. 1733.

유럽 열강이란 말은 18세기부터 생긴 말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를 착취하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가리킨다. 이 나라들은 유럽 대륙에서 영토전쟁을 벌였고, 해외에서는 더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려고 다시 전쟁을 치렀다. 식민지에서 헐값에 상품의 원료를 빼앗듯 사들였고, 자국에서 생산한 제품은 대량으로 내다팔았다. 유럽 열강은 아메리카의 원주민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했다. 영국과 프랑스, 에스파냐는 북미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영국이 프랑스를 내몰았다. 16세기 이후 중미와 남미를 지배해 온 에스파냐의 착취도 더욱 심해졌다. 유럽 열강은 아시아에까지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인도는 18세기 후반에 역구의 속국이 돼 버렸고, 중국은 영국 상인이 퍼뜨린 아편의 소굴로 전락했다.

 

 

(7) 골드러시

 

1705, 포르투갈 군대가 남미 브라질의 한 계곡을 지나가다 반짝이는 개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사금이었고, 포르투갈은 사상 최대의 금광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남미의 다른 지역에서는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705년부터 1730년까지 25년간 이 골드러시가 계속됐다. 너무 많은 인구가 몰려들었다. 상파울루 같은 도시는 세계적인 도시가 됐다. 그러나 금으로 돈을 번 사람들은 모두 유럽 사람들이었다. 원주민들은 오히려 더 고통스런 삶을 살았다.

 

(8) 프렌치 인디언 전쟁


북미에서도, 영국과 프랑스의 일인자를 가리는 전쟁은 계속됐다. 1754년 영국 군대가 북미 피츠버그에 있는 프랑스 요새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이 전쟁을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4~1763)이라고 부른다. 전쟁의 계기는 북미에서 일어난 무역 분쟁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이민자들은 북미 대륙에 온 목적이 서로 달랐다. 프랑스 이민자들은 인디언과의 모피 무역이 주 목적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정복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개척을 하며 영토를 넓혀갔다. 두 나라의 이주민들은 오하이오 강 유역에서 충돌하고 말았다. 프랑스가 먼저 군대를 파견해 영국 이민자를 쫓아냈다. 영국은 프랑스 군대에게 땅을 돌려주고 철수할 것을 요청했지만 프랑스 군대는 거절했다. 그리하여 영국 군대가 피츠버그의 프랑스를 공격했다.

 

 

한편 이 전쟁에 에스파냐가 뛰어들었다. 에스파냐는 영국 편에서 싸웠다. 프랑스는 인디언들을 끌어들여 맞섰다. 그러나 영국 군대는 강했다. 1759년에는 퀘벡을, 이듬해에는 몬트리올을 점령했다. 프랑스 군대는 영국 군대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은 공식적으로 1763년에 끝났다. 이 해 유럽에서 7년전쟁이 끝나고 파리 조약이 체결됐다. 지 조약에서는 북미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논의를 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북미의 모든 식민지를 영국과 에스파냐에 빼앗겼다. 이제 북미에서도 영국이 유일한 강자가 됐다. 영국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까지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