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마오의 민낯을 까발리다 - 해방의 비극 : 중국혁명의 역사(1945~1957)

억스리 2016. 9. 23. 10:48

[출처] http://blog.naver.com/atena02/220818165235



문혁 당시 홍위병과 대중 집회. 중국 전체가 붉은 깃발과 꽹과리, 구호와 선동으로 난무하던 광기의 시대였다.

장위머우(張藝謀) 감독, 공리 주연의 1994년 영화 "살아간다는 것(活着)"은 국내에서도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방영한 바가 있다. 이 작품은 중국을 대표하는 베스트셀러 문학가인 위화(余華)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망나니 지주집 아들의 눈으로 바라본 중국 현대사에 대한 회고이다. 

하지만 위트 있으면서 사실적 묘사를 통해 당대를 비판하고 시대적 아픔을 공유하려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면서 "그런 시절이 있었지"하는 선에서 머무를 뿐이다. 따라서 영화가 던지는 메세지가 분명치 못하고 여운이나 감동이 없다. 아마 중국 현대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한국인이 본다면 아무런 재미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런 모습은 중국만이 아니라 우리나, 타이완, 일본 등 사회 의식 수준이 낮고 보수적인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다루면서 감독이 보수세력들의 격렬한 반발과 사회적 논쟁에 부딪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사건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지는 관객에게 맡긴 채 자신은 뒤로 물러나 버리는 것이다. 그만큼 서구에 비하여 자유로운 사상을 인정치 않는 닫힌 사회라는 점도 있지만, 어두운 과거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들이 여전히 사회 기득권 세력으로 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 "인생"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장위머우 감독의 초기 작품의 하나이다. 장위머우는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감독임에도 막상 이 영화는 중국 내에서는 아직까지도 상영이 엄중히 금지되어 있다. 영화 안에서 딱히 체제 비판적인 시각은 없음에도 보수적인 관료들 입장에서는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금기"이기 때문이다. 장위머우를 비롯해 1990년대만 해도 중국 사회의 현실을 조명했던 5세대 감독들은 대부분 전향하여 2000년대 이후에는 주로 판타지스러운 고대 중국사를 다루어 불필요한 정치 논란으로 정부의 눈밖에 나는 짓을 피하려고 한다.

이 영화에서는 한가지 중요한 전환점이 있다. 바로 "해방"이다. 이 용어는 오늘날 중국 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해방이란 뭔가의 압제로부터 스스로가 아닌 타인의 힘을 빌려 벗어났다는 수동적인 의미이다. 우리에게는 일본의 항복이 곧 해방이었지만, 중국은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1949년 10월 1일을 중국 인민이 해방된 날이라면서 "국경절"로 기념한다. 이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중국 인민을 낡은 봉건 잔재로부터 해방시킨 날이라는 의미이다. 중국 정부는 이 날을 중국 5천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 본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점은 무엇에 의한,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가는 있지만, 무엇을 위한 해방인가는 없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점이 중국 정부가 찬양하는 "해방"에 가리워진 어두움이다.

프랑크 디쾨터 홍콩대 교수가 쓴 "해방의 비극 - 1945~1957(The Tragedy of Liberation A History of the Chinese Revolution 1945-1957)"은 국공내전부터 마오 정권 초기 중국의 실상을 다룬 책이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에 거둔 그들의 승리를 [해방]이라고 말한다. 해방이라는 단어는 거리로 쏟아져 나와 새로 쟁취한 자유를 자축하며 환호하는 군중을 떠올리게 하기 마련이지만 중국의 해방과 그 뒤를 잇는 혁명의 이야기는 평화나 자유, 정의와 무관하다. 다른 무엇보다, 계산된 공포와 조직적인 폭력의 역사를 보여 준다."

"마오쩌둥은 일부러 모호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부하들로 하여금 공포 정치를 수행하는 데 따른 지침과 관련하여 자신의 수많은 발언과 연설, 지시 내용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확인하도록 유도했다. 아울러 부하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와 정책을 내놓도록 부추겼다. 부하들이 내놓은 제안 가운데 하나를 무심한 듯 골라서 채택하기도 했다."

"한 여성이 너무 맞아서 기절했고 그녀를 관에 넣어 마을 밖에 매장하려던 순간에 어떤 사람이 그녀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자 우두머리 격인 사람이 그녀를 관에서 꺼내 처형하도록 지시했다. [부유한 농민]이란 딱지가 붙은 사람들 가운데 몇몇이 몸을 숨기고자 산속으로 들어갔지만 얼어 죽었다. 대략 700명 정도가 살던 한 마을에서 73명이 죽임을 당했다."

"어느 때보다 많은 농민들이 농사에 매달렸음에도 토지 재분배 이후로 1인당 실질 생산량은 감소했다. 토지 개혁 위원회에서 파견된 공작대들은 후베이 성의 모든 현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고 보고했다. 굶주림이 만연한 데는 수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인재의 측면이 강했다. 북쪽에서 내려온 당 간부들은 자신이 담당한 지역의 경제 상황을 무시한 채 명령을 내렸다."

저자는 본문에서 건국 초기의 살벌했던 상황에 대하여 수많은 증언과 당시의 보고서 등을 통해 재구성한다. 당시 수백만명이 탄압을 받았고 재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강제 수용소에 끌려갔으며 그 과정에서 적어도 수십만명이 살해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게다가 마오쩌둥은 히틀러나 스탈린과 달리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기 위해 비밀경찰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비밀경찰은 국민의 모든 불만을 정부로 집중시킬 수 있었다. 그는 누구도 하지 못했던 훨씬 고도의 정치적인 수단을 사용했다. 바로 대중을 직접 움직여서 그들의 손을 더럽히는 것이었다.

우선 누구를 처벌할 것인가를 정하고 나면, 대중집회를 열어서 사람을 모은다. 수천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누군가가 앞장서서 선동하고 사람들은 군중 심리에 사로잡혀 같은 구호를 외친다. 그게 무슨 내용이며 누구를 왜 처벌하는지는 그 자리에 모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단지 남이 외치니까 나도 외치고 남이 돌을 던지니까 나도 던지는 것이다. 그것에 이유는 없다. 마오쩌둥은 뒤로 물러난 채 자신과는 상관없는 양 침묵을 지키다가 중요한 순간에야 특유의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온정을 베푸는 척 한다. 수많은 독재자들 중에서 마오쩌둥만큼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저우언라이, 류사이치, 덩샤오핑 등 당내 최고 지도자들조차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들은 늘 마오쩌둥의 변덕스러운 심기를 살펴야 했고 조금이라도 뭔가 잘못된다면 그게 마오쩌둥의 승락을 받았건, 그의 명령이건 상관없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고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스로의 과오를 비판해야 했다. 누구도 마오쩌둥에게 감히 대항할 수 없었고 "틀렸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는 혁명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마오쩌둥의 탁월한 지도력과 리더쉽, 카리스마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만, 문제는 마오쩌둥이 국가 지도자로서의 역량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이것이 마오 치하의 중국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불행의 원인이었다. 

후난성의 부농 아들로 태어났던 마오쩌둥, 그는 중국 사회의 뿌리 깊은 봉건 잔재의 타파를 외쳤지만 정작 자신부터 봉건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모순이자, "마오식 개혁"의 근본적인 한계이기도 했다. 또한 지적 수준은 매우 뛰어났지만 감성과의 불균형, 기초 수준의 정규교육을 받았을 뿐 대부분의 지식을 독학과 독서에만 의존했기에 스스로 똑똑하다 자부했지만 실제로는 지식이 매우 불균형하였다. 이는 히틀러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중국 역사에서 대량 살육은 왕조 교체기마다 빈번하게 행해졌던 일이기도 하다. 창시자들은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왕조를 안정시키고 반대 세력을 제압할 목적으로 유교보다는 법가적인 방법을 선호하였고 관용 대신 탄압과 살육을 즐겼다. 몽골, 만주족 등 이민족은 물론이고, 기존 체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주원장과 이자성, 홍수전의 태평천국군은 가는 곳마다 풀 한포기 남기지 않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살육은 대부분 체제에 반대하는 구 세력에 국한되었고 전쟁에 직접 휘말리지 않는 한 대다수 민중의 삶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 국가가 이들의 자유를 구속하지도, 삶의 방식을 바꾸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더 나은 삶을 보장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삶을 더 나쁘게 만든 것도 아니다.

반면, 마오쩌둥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전의 삶을 포기하고 자신이 정한대로 살라고 요구하였다. 그는 옷차림부터 인민의 일거수 일투족까지 관여하려 들었다. 사람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데다 간섭받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더욱이 마오가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방식이란 대부분 단편적이고 편협한 자신의 현실관에서 충분한 고민 없이 즉흥적으로 나온 것이므로 5억명에 달하는 모든 중국인들에게 맞을 리도 없었다. 저항은 당연했지만 마오쩌둥은 스스로를 "무결의 존재"라고 여겼기에 틀린 것은 자기 한 사람이 아니라 5억명이라고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모든 갈등과 모순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 1권》에 보면 가장 먼저 나오는 단락이 "참새 소탕전"이다. 마오쩌둥이 참새를 가리켜 "저 새는 해로운 새다" 한마디에 수억명이 농사를 팽개치고 참새를 쫓아야 했다. 실로 어이없는 일이다. 마오는 왜 그런 말을 했는가. 그는 들판을 시찰하면서 참새가 곡식을 먹는 것을 보고 해충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농민의 아들"을 자처했음에도 참새가 곡식만 먹는게 아니라 곡식을 병들게 하는 벌레도 먹는다는 초등학생도 알만한 상식조차 몰랐던 것이다. 

이는 그의 심각한 지적 불균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주변의 누구도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충성 경쟁을 벌이며 다른 지방에서 몇마리를 잡았으면 우리 마을에는 더 많이 잡아야 한다며 선동하고 사람들에게 할당량을 매겼다. 사람들은 심지어 참새를 구하기 위해 암시장에서 돈을 주고 구매하기도 했다. 간부들이라고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침묵을 지킨 것은 농민들을 위해 "No!"라고 말하여 지도자의 비위를 건드리기보다는 "Yes!"라고 말하면서 앞장서는 것이 자신들에게 더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지도자의 비위를 건드리면 그 자체로 내 책임이 되지만 지도자가 시키는대로 해서 성공하면 내 공이고 실패한다고 내 책임은 아니다. 그들로서는 잃을 것이 없다. 손해는 국민이 보는 것이지 내가 아니다.

이른바 "푸른 개미떼" 마오는 중국 민중에게 똑같은 옷을 입히고 똑같은 일을 똑같이 시켰다. 무엇을 왜 하는가에 대한 합리성은 없었다. 그냥 지도자가 시키니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훨씬 많은 사람들이 노동을 했지만 마오 치하의 중국 경제는 인민의 삶과 상관없는 군수산업과 일부 중화학 공업만 성장했을 뿐 전반적으로 장제스 시절이나 군벌 내전기보다도 퇴보하였다.

이런 형식주의, 관료주의는 사회주의 중국만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실상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 단순히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다름아닌 지배-피지배라는 권위적이고 봉건적인 문화에 있기 때문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아래와의 진솔한 소통 대신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창의적이기보다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하여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하다. 관료들의 복지부동, 형식주의, 경직성은 항상 국민의 지탄을 받지만 실상 이는 관료 조직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낙후된 가치관에 있다. 누가 그 자리에 있어도 달라질 수 없는 것이다. 마오 치하의 중국은 그것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사례이다.

이 책에서는 마오 치하 초기에 있었던 수많은 잔혹성과 광기를 거론하면서 그 책임은 전적으로 마오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엄밀히 말하면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저자의 시각은 어디까지나 서구인의 관점에서 서구식 가치관으로 1949년의 중국을 바라보고 있다. 광기에 대해 마오는 일부는 직접 부추겼고 때로는 침묵했으며 일부는 몰랐고 일부는 오히려 통제하려 했다. 마오 치하에서 벌어진 모든 참상을 단순히 "마오 한 사람의 광기"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자 도식화이다. 

애초에 마오는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했는가, 또한 대다수 민중은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대신 오히려 그 광기에 앞장서서 스스로의 손으로 죄없는 가족과 이웃에게 돌을 던졌는가, 그 광기 어린 세계 속에서 왜 다른 사람이 마오를 대처하거나 다른 세력(특히 상당한 무력을 보유한 채 타이완에서 호시탐탐 대륙 회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장제스)이 중공 정권을 대체하지 못했는가.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당시 중국이 처한 상황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장제스 정권의 낙후성에 있었다. 중국이 처한 대내외적인 위기에 대해 장제스 정권은 강력한 개혁을 통해 극복하려고 노력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더욱 보수 반동적으로 행동하였으며 반대파를 탄압하기 급급하였다. 반면, 마오쩌둥은 봉건적 신분제 철폐, 토지 개혁, 빈부격차 해소, 여성 해방 등 장제스가 말로만 얘기했을 뿐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했던 중국의 오랜 병폐를 해결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민중에게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였다. 국내 지식인들과 미국은 장제스에게 등을 돌렸고 마오쩌둥을 장제스의 대안으로 생각하였다. 장제스 정권의 몰락은 군사적 열세 때문이 아니라 정권이 안고 있던 모순과 부조리함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였다.

정권을 획득한 마오는 실제로 나름대로 자신이 했던 말을 실천하려 하였다. 또한 그는 장제스의 전철을 밟기를 원치 않았다. 장제스가 실패한 것은 개혁에 무관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개혁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였고 다른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혁을 자기 뜻대로 밀고 나갈만한 권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정권은 겉으로는 일인 독재였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정파가 참여하는 연합정권이었고 장제스의 명령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관료들의 나태함과 복지부동, 파벌 싸움, 부정부패, 경직성... 장제스 정권의 모순과 부조리함은 장제스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중국 사회의 낙후성에 있었으며 수천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 20세기가 되었다고 하루 아침에 바뀔 수는 없는 것이다. 

마오는 아직은 취약한 중공 정권이 확실하게 뿌리를 박고 인민들에게 더 나은 삶을 부여하려면 우선 구 체제를 부셔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것도 계도나 교육과 같은 온건한 방법은 의미가 없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철저하게 때려부수고 인민의 사고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와중의 "다소"의 진통과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문제는 마오 자신이 봉건주의를 타파하자면서도 봉건적인 면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그 와중에 나타난 수많은 오류를 극복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광기로 나타난 것이지만 마오 자신은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민의 적으로 몰린 자들. 일부는 총살당했지만 대부분은 수치심과 사회적 매장이 두려워 자살했다. 이들이 정말로 죄가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경각심이었다.

또한 광기는 마오 한 사람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마오 치하의 중국 사회에 나타난 광기 어린 모습은 18세기 이전 유럽의 마녀 사냥을 연상케 한다. 저자는 마오 치하의 광기와 잔혹성에 치를 떨지만 실상 200년 전만 해도 유럽 사회에서 종교의 이름 아래 흔하게 벌어졌던 일이다. 광기는 어느 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중국인에게 있었다. 사람들은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돌을 던지고 불쌍한 희생자를 향해 죽이라고 소리쳤다. 막연한 공포, 현실에 대한 불만. 이는 중국 사회의 낙후성 때문이었다. 마오는 그것을 부추기고 이용했을 뿐이다. 

마오는 종교와 전통 문화에 대해서도 우상이라며 철저하게 탄압하여 홍위병을 앞세어 불상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수용소로 보내어 사상을 개조하였다. 수천년간 이어져 왔던 중국의 전통문화는 "봉건"이라는 딱지가 붙은 채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마오의 모든 잘못이 사라지거나 정당성이 부여될 수는 없다. 또한 마오가 남긴 상처는 그게 어떤 의도이건간에 너무나 크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마오 스스로도 자신이 무지했으며 결코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고 간접적으로 시인하였고, 마오가 죽은 뒤 정권을 잡은 덩샤오핑은 "공이 7, 과가 3이다"라고 완곡하게나마 표현했을 정도이다. 여기서 공은 신중국을 세운 것, 과는 그 이후의 실책을 말한다. 이는 정치적 수사일 뿐이지만, 그 고통을 직접 감내해야 했던 민중 전체가 저항에 나서지 않은 것이나, 이를 이용하여 장제스가 대륙 회복에 성공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인가. 

바로 민중의 가장 큰 바램이 "안정"이기 때문이었다. 고통은 그 순간만 고통스러울 뿐 조금 지나고나면 익숙해진다. 남이 보기에는 견딜 수 없는 고통처럼 보여도 당사자들은 담담하며 오히려 변화에 대한 불확실성을 더 두려워한다. 마오는 "안정"을 제시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에서도 마오는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선전함으로서 지난 100여년 동안 중국이 보여주었던 "쪽팔리는" 전쟁을 재현하지 않았다. 중국인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다. 

마오를 무너뜨린다고 해서 과연 더 나은 세계가 온다는 보장이 있는가. 만약 더 뛰어난 사람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마오가 아니라 그 사람이 정권을 잡았을 것이다. 신해혁명이 청조를 무너뜨렸을 때 중국 인민은 더 나은 세계가 아니라 혼란과 내전에 직면했다. 마오가 장제스를 타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가 마오를 무너뜨린다면 더 나은 세상이 올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얘기도 된다. 바로 이것이 딜레마였다. 따라서 마오가 만들어낸 안정이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한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었던 것이다.

마오 치하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1960년의 대기근 하나만도  3,500만명에서 4,500만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또한 마오 치하 25년 동안 수천만명이 박해를 받았으며 수백만명이 수용소에서 재교육을 받았고 수십만명이 죽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광기가 아무리 중국 사회가 내포하고 있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라도 어쨌든 일차적 책임은 여기에 불을 붙인 마오에게 있다. 비록 마오는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처럼 직접 칼을 들고 그 자리에서 정적의 성기를 자르거나 국무 회의 중에 흥분하여 장관을 권총으로 쏘아 죽일 만큼 무식하지는 않았더라도, 중국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며 모든 독재자를 통틀어 그의 치하에서 죽은 사람이 가장 많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더욱 답답한 것은 그런 희생을 통해서 과연 무엇을 얻었는가일 것이다. 중국은 과연 봉건적인 모습을 완전히 벗어던졌는가. 오늘날 중국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과 부조리함은 무엇 때문인가. 개혁개방 이후 새롭게 나타난 신분제 질서, 여전히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소수의 엘리트들, 푸얼다이, 꽌얼다이 등 부유층과 권력층 자제들의 특권 의식,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빈부 격차, 인민이 아닌 부자들을 위한 당이 된 공산당, 인구의 다수가 여전히 가난한 현실, 값비싼 무기는 아낌없이 사들이면서 가난한 국민들을 위한 복지 인프라 구축에는 인색한 이중성. 중국 공산당은 "부국강병"에는 성공했을 지 몰라도 "인민이 잘 사는 세상"을 연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과연 무엇을 위한 투쟁이며 희생이었던가.

도시의 할럼가를 형성하고 있는 농민공, 정부의 눈에서 벗어나 최소한의 교육, 외료 기회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천만명이다. 또한 2014년 기준으로 하루 수입이 3천원이 되지 않는 "극빈층"이 전체 인구의 약 5%인 7천만명이라고 한다. 중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부자가 많은 나라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난한 사람이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이것이 G2가 된 중국의 현주소이다.

만약 중국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장제스 치하가 그대로 존속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인도처럼 봉건적 신분제 사회에 머물러 있었을까, 필리핀처럼 소수의 부유층에 의한 유사 민주주의 정치 아래 대다수 국민들이 가난한 사회였을까, 아니면 우리나 타이완, 싱가포르처럼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서구화의 문턱에 도달했을까.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수천만명이 아사하고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살해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해방의 비극》은 프랑크 디쾨터 교수의 3부작 중 첫번째라고 한다. 곧 두번째와 세번째도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중국 현대사에 관심이 있다면 필히 읽어볼 책이다.

ps. 마오의 잔혹성과 결부하여 "우리 사회 좌파" 운운하며 싸잡아 비난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이들이 말하는 "좌파"가 과연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지, 어떤 연계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한중 수교 이래 우리 정상으로서는 처음으로 2003년 7월 중국을 국빈 방문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마오를 존경한다"라고 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당사자의 의도가 정확하게 무엇인지야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그전부터 마오 운운했던 것은 아니므로 어디까지나 중국에 대한 예우차원에서 했던 말로 봐야 할 것이다. 마오는 어쨌든 중국에서는 쑨원과 함께 실질적인 국부이기 때문이다. 그가 중국 내에서 무얼했건 그건 우리 알 바가 아니며 당시에만 해도 마오의 실정이 우리 사회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때이기도 하다.

물론 마오가 한국전쟁에 개입을 결정하였고 그로 인해 우리가 지금까지 분단된 점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노통 역시 당시에도 신중치 못한 발언이라고 뭇매를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이것과 "전체 좌파" 운운하며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별개의 얘기이다. 이런 사고에는 우리 사회 특유의 편가르기, 진영 논리가 있다. 특히 다른 건 몰라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는 관용이란 없다. 다른 생각은 다 일치해도 이 부분이 다르면 "좌빨", "우좀"이라며 상대에 대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원색적인 비난까지 일삼으면서 극도의 증오심을 표출한다. 이는 스스로 자신이 초등학생 수준이라는 것을 자인하는 꼴임을 알아야 한다. 언제부터 남을 함부로 비난하게 되었는가. 그래서 뭘 얻겠다는 것인가.

해방의 비극

저자 프랑크 디쾨터

출판 열린책들

발매 2016.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