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

억스리 2016. 9. 21. 13:40

[출처] http://blog.naver.com/atena02/220813181045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고 있는 일본군 포로들. 전장에서는 악귀처럼 싸웠지만 포로가 된 그들은 연합군에게는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하면서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자신들끼리 위계질서를 정하고 온갖 폭력을 행사하여 연합군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일본군의 이중성은 그들 특유의 뿌리깊은 봉건적 문화를 알지 못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를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지휘관과 조직의 말단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실무관이 상호 보완하면서 플러스 작용을 한다면 그 조직은 큰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조직의 알맹이 자체에 변화를 주어야 할 대처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최악이에요. 결국 괴멸할 때까지 똑같은 생활 패턴을 반복하면서 그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상태가 되는거여요" 그의 말은 일본군의 말로를 가리키는 듯 했다." - 한 조직 내에 엘리트 출신과 비엘리트 출신이 서로 분리된 채 각자의 세계만을 고수하던 것에 대해(p.60)

"조금 전까지 '절대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주장했던 일에 대해 어떻게 한순간에 입장을 바꿔서 '해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종종 객관적인 정세의 변화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는 둘러대는 말이 불과하다. 정세는 한순간에 갑자기 바뀌지 않는다." - 일본군 수뇌부의 말 바꾸기와 모순적인 문화(p.130)

"자신의 관점을 절대시하고 관점이 다른 자는 배제하면서 자신의 관점에 동조하는 사람하고만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관점으로만 모든 문제를 정리한다." - 패전 말기 일본군이 왜 비합리적인 작전을 반복했는가에 대해(p.149)

"그 자리에서만 뱅글뱅글 도는 관료 조직, 그 위에 군림하는 장관, 앞뒤 말만 짜 맞추는 데 혈안이 된 국회에서의 고무줄 숫자 답변, 앞 뒤 숫자만 맞춘 분식 결산이라는 고무줄 숫자 결산 보고..." - 일본군의 형식주의는 일본 사회의 형식주의에서 나온 것(p.173)

"일본군에서 책임감이란 자신의 판단에 따라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고르고 여기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상부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정도를 말한다. 제국 육군에서는 장관이건 이등병이건 법에 근거한 질서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여 포탄이 없는 대포를 인력으로 300km를 끌고 오다가 부하들이 몰살당해도 책임감 왕성한 장교이지만, 이것이 비합리적이라며 대포를 파괴한다면 마땅히 자결해야 할 무책임한 장교로 여겼다." - 일본군에게 책임감이란 무엇인가(p.323)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 발탁되어 장관이 되고 부하의 생사여탈 권한을 지녔다면 지금이라도 무언가 느껴야 한다. 마치 해방이라도 맞아 현재를 만끽하는 듯 보이는 이  사람들의 두뇌 깊숙한 곳에 정말 현실성 있는 존재가 대체 무얼까"   - 일본 항복 후 포로 수용소에서 '각하들'의 현실도피적인 모습을 바라보는 저자의 회의감(p.329)

"사단장이 포병대를 떠올리면서 유일하게 궁금해 한 일이 그 물 한잔에 관한 것이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항복하면서 대포를 어떻게 처지했는가, 부하들의 운명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물어보지 않았다. 물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였다."    -  사단장과의 대화에서 저자가 느낀 '그들'의 허상(p.392)

일본에서 출간된 수많은 태평양전쟁 관련 서적과 참전 군인의 수기 치고 구 일본군의 모순과 부조리함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책은 없다. 더욱이 일본의 침략전쟁은 미화해도 '일본군'이라는 군대에 대해 "우수하다"고 자화자찬하는 경우는 여지껏 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공통되게도 일본군 수뇌부의 비합리성과 무지함, 낙후된 병영문화, 병참의 무시, 인명 경시, 권위적이고 봉건적인 모습 등 "이 때문에 일본은 패배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이런 자조적인 시각은 독일쪽과는 대조적이다. 할더, 롬멜, 구데리안 등 장군들의 수기는 물론이고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독일군의 강함에 대한 확고한 자부심이 있으며 그럼에도 패배한 이유에 대해서 "히틀러의 아집과 무능함, 그리고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먼치킨적인 미국의 막강함"에서 찾는다. 물론 일본군보다 독일군이 강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일본군의 모순과 부조리함은 새삼스러울 정도의 얘기이다. 하지만 일본군 역시 독일군만큼이나 미군을 고전시켰던 만만찮은 상대였으며, 독일군이라고 해서 모순과 부조리함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기억 파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기억이란 부정확하며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히틀러라는 절대 권력자에게 패전의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있었던 독일과 달리, 집단지도체제였던 일본은 특정한 한 사람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다. 대신 사회의 정점에는 '제국 육군'이라는 거대한 조직이 있었고 그 조직이 보여준 모순과 부조리했던 모습은 일본인들에게 철저하게 각인된 채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전쟁과 군대에 대한 기억이 어떻든, 전후 독일은 그 전의 모순과 부조리함을 벗어 던지고 세계에서 가장 선진화되고 성숙한 민주 사회로 거듭났으며 독일군 역시 미군 못지 않은 민주적인 군대가 된 반면, 그렇게 "자조"와 "반성"을 외치는 일본은 여전히 전전 사회가 안고 있었던 모순과 부조리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일본은 실상 과거 일본군이 지배했던 전전 사회의 연장선일 뿐이다. 더욱이 자위대는 미군에 의해 조직되었고 심지어 정식 군대도 아님에도 왜곡된 병영문화 등 구 일본군 시절의 수많은 병폐를 상당부분 물려받은 채 많은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다.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一下級將校の見た帝國陸軍)》은 조직의 최하부에 있었던 사람이 "제국 육군"이라는 거대한 조직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다룬 책이다. 저자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는 전후 일본에서 손꼽히는 문화 역사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이다. 대학을 재학하던 중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3년에 간부 후보생으로 징집된 그는 포병 소위로 임관 후 약 1년 동안 필리핀 전선에서 복무하다가 항복을 맞이하였고 포로 수용소 생활을 겪은 후 1947년에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그 와중에서 자신이 느꼈던 "일본군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회고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일본군의 모순과 부조리함을 상징하는 세명의 대표적인 장교를 꼽는다. 제55사단장 하나야 타다시(花谷正) 중장, 파멸적인 과달카날 작전을 지휘했던 쓰지 마사노부(辻政信) 중좌, 중일전쟁의 확대를 주도했던 무토 아키라(武藤章) 중장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허세의 달인"이라는 점이다. 

하나야 타다시는 부하들에게 엄격하다기보다 혹독하기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계급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의 기분에 따라 사적 구타를 일삼았고 무모하고 맹목적인 작전으로 수많은 부하들을 사지로 내몰거나 작전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할복을 강요하여 "할복 사단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늘 안전한 후방에 숨어 있었으며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하지만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온갖 아첨을 떨었다. 그런 식으로 출세를 하였고 패전 후에도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안락한 연금 생활을 보내며 일생을 마쳤다.

쓰지 마사노부의 별명인 "작전의 신"은 남이 아니라 자신이 붙인 별명이라는 점이 코메디이다. 정작 주변 사람들은 "쇼와의 요괴"라고 불렀다. 일각에서는 그가 노몬한 전투 당시 직접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을 정찰한 것이나, 중국 전선에서는 기강을 바로잡겠다면서 상관의 비리조차 용서없이 처벌했다는 이유로 용기와 강직함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종종 보게 되는데 이는 쓰지 마사노부에 대한 이해부족일 뿐이다. 그는 군인으로서의 진정한 책임과 용기를 착각했던 당시 흔히 볼 수 있었던 전형적인 일본 중급 장교이다. 허영과 자기 과시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상관의 이름을 사칭하여 명령서를 함부로 위조하고 지위와 권한을 남용하는 등 온갖 월권을 일삼아 조직에 큰 폐해를 남겼으며 상관의 입장까지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들은 흔히 "일본 제국 시절 가장 위험했던 참모"로 손꼽는다.

도쿄 전범재판에서 대미 개전과 포로 학대 등의 이유로 A급 전범으로 처형된 무토 아키라 중장은 평소 부하들에게 매우 까다롭고 거만하게 굴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도쿄 전범재판에서 그는 앙숙이었던 다나카 류키치의 거짓 증언으로 교수형을 선고받자 격분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귀신이 되어 저놈 몸에 들어가 미쳐서 죽게 해주겠다"라고 말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그렇게 강조하던 "황군"으로서의 당당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들의 상반되고 모순된 행동에 대해, 저자는 "군인을 연기했을 뿐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전혀 없었으며 내실은 텅비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들은 위기의 순간에는 온갖 호언 장담을 일삼으며 주변을 선동하였고 신중론을 펼치는 사람들을 공격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였다. 이들이 보여준 카리스마는 겉으로는 대단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공허한 허세일 뿐 알맹이는 없었으며 정작 책임져야할 순간에는 비겁하게도 뒤로 쏙 빠져버리는 식이었다. 게다가 이런 자들이 멋대로 날뜀으로서 누가 상급자인지, 하급자인지 알 수 없게 되고 군대로서의 위계질서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물론 당시의 일본군이 모두 이런 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군인들은 어느 나라 군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고도의 지적 수준을 갖추었으며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고 성실하였다. 문제는 소수의 가짜 군인들이 활개치도록 놔두고 진짜 군인들은 방관하거나 수동적으로 그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야 하는 "제국 육군"이라는 시스템 그 자체에 있었다. 이것이 일본 제국이 브레이크 없는 열차마냥 눈을 뻔히 뜬 채 파멸의 길로 질주했던 이유이다.

더욱이 이 가짜 군인들은 패전 후 대부분 제도의 허점을 이용하여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은 채 교묘하게 빠져나갔고 이들이 짊어져야 할 죄값은 요령이 없는 다른 사람들이 대신 짊어져야 했다. 필리핀에서 포로 학살과 학대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홍사익 중장이나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이 대표적인 예이다. 정작 진짜 주동자인 쓰지 마사노부는 한동안 숨어 있다가 전범 재판이 흐지부지된 뒤에야 슬그머니 귀국하였다. 또한 태평양전쟁 중 "제국 육군"이 저지른 수많은 죄과에 대해 많은 양심 있는 군인들은 평생 은거하면서 나름대로 반성한 반면, 쓰지 마사노부를 비롯해 침략 전쟁과 전쟁 범죄의 선봉에 섰던 자들은 오히려 교묘한 정치적 수완을 이용하여 전후 일본 사회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였다. 오늘날 일본이 전전 시대와 관계를 끊지 못하는 것이나 끝없는 과거사 망언으로 주변국의 감정을 자극하는데는 바로 이런 자들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소위였던 저자는 1943년 어느날 "이제부터 우리의 적은 미국이다!"라는 교관의 말을 듣고 그 황당하고 당혹스러웠던 기억을 말한다.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지 벌써 2년이 지났고 일본의 적이 미국이라는 사실을 일본인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도 마치 새로운 사실인양 "이제부터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제국 육군이었다. 그럼 여지껏 배웠던 것은 뭐란 말인가. 저자가 배웠던 모든 교육은 일본이 당면한 전쟁이 아니라 소련과의 전쟁을 가상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시베리아의 춥고 광활한 대지가 아니라 동남아의 더운 정글에서 전쟁을 하고 있었고 저자 또한 훈련이 끝나면 필리핀으로 향할 것인데 정작 어렵사리 배운 것들이 죄다 시베리아의 환경에 맞추어 있다면 도대체 실전에서 무슨 도움이 될 것이며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이것이 저자가 처음으로 느낀 일본군의 모순이었다. 

미국을 상대로 싸운다면 미군에 맞추어 싸울 준비를 갖추는 것은 상식이다. 그럼에도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처음부터 미국을 상정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전쟁을 철저하게 준비한 것이 아니라 정세의 변화를 이유로 기회주의적, 즉흥적으로 전쟁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군의 교리나 전투 방식, 동남아 현지의 사정, 미군을 상대로 뭘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에 대해 병사들에게 가르칠 방법이 있을 리 없다. 전쟁이 터진 뒤에도 미국을 연구하는 대신 오히려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한다는 명목으로 대학 내 영문과를 폐지하고 미국과 관련된 문물을 접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이런 우둔함과 경직성은 병자호란 이후 "북벌"을 외치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정말로 청을 상대로 싸워 이기기 위해 "지피지기"하는 대신, 청을 오랑캐라고 여기고 그들과의 어떤 접촉도 배척했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뒤늦게 상층부에서 모순을 깨달은 연후에야 부랴부랴 당장 바꾸라고 아래에 지시했지만 그게 윗선의 지시 한마디로 하루 아침에 바뀔 일인가. 이는 진정으로 문제를 의식하고 바꿀 의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책임을 아래로 떠넘기기 위함이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구색만 갖추고 하는  시늉만 할 수 밖에 없다. 문제가 터지기 전에는 아무리 경고를 해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다가 문제가 심각해지면 비로소 허둥되는 모습, 이것이 당시 일본이 안고 있던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저자가 말단 장교로서 패전 순간까지 받았던 모순된 명령, 현실과 동떨어진 작전, 병사들의 고뇌에는 아랑곳없는 상층부, 평소에는 부하들에게 온갖 거만을 부리다가 패배 후 수용소에 들어가자 아무런 위엄도, 리더쉽도 없이 자기들끼리 "각하"라 부르며 현실을 도피하는 장군들. 강력한 리더쉽과 카리스마로 아군은 물론 적군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던 롬멜같은 장군은 일본군에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소위 "제국 육군"을 이끌고 있던 자들이 쓰고 있던 위선의 가면이 얼마나 추한지 저자는 비로소 깨닫은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일본군의 모순과 부조리함이란 우리 정부의 관료 조직에서도 그대로 찾아볼 수 있다.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이슈가 나올 때마다 정치권에서는 부랴부랴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대책 마련에 나서지만 막상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유사한 사건은 1년 뒤, 심지어 10년이나 20년 뒤에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10년, 20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군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구타 문제, 부정 비리, 감시 감독의 부재 등 군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이번이 결코 처음이 아니라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된다는 점이다. 

왜 바뀌지 않는가. 바꾸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뀔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첫번째로 부처간, 개인간의 칸막이가 매우 높다는 점이다. 심지어 같은 부서 안에서도 소통과 협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두번째는 정부 조직의 계급화, 계층화이다. 정책 입안은 고시 출신 엘리트들이, 실제로 현장에서 적용하는 실무자들은 비고시 출신들이다. 이들은 서로 분리된 채 아무런 소통 수단이 없다. 위로 올라갈수록 일선의 상황을 모르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복지부동과 기존 관행을 고수하기에 급급하다.설령 소통을 하더라도 형식적이며 서로의 의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거나 정책과 일선의 모순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각자의 권한과 책임이 불분명한 점, 권위주의, 엘리트 의식, 형식주의, 폐쇄주의와 배타주의 등 총체적인 문제점이 있다. 1960년대, 70년대처럼 정부가 일방적으로 주도하고 국민들의 행정 수요가 적고 단순할  때에는 자기 맡은 일만 충실히 하면 충분하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사회가 훨씬 고도화되고 복잡하면서 빠른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에는 이런 구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각자 자기 맡은 바는 열심히 수행하지만 개별 플레이일 뿐, 변화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거나 문제점에 대처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위에서 저자가 언급한 "뒷북치는 행정"도 우리 정부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왜 문제가 터지기 전에는 어느 한 사람 나서지 않는가. 문제가 터진 뒤에야 윗선에서 지시가 떨어지고 아래에서는 마지못하여 하는 시늉을 하는가. 명색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과연 70년 전의 일본군과 무엇이 다른가.

더욱이 이것은 관료 조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대다수 기업이나 조직에서도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즉, 특정 조직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이다. 이것을 개혁하려면 결국 우리 사회의 권위적이고 봉건적인 가치관과 문화 등 총체적, 전반적으로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된다. 병영 구타를 비롯해 군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점 역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근본적인 해결은 외면한 채 단기 처방만 일삼는 실정이다. 그렇기에 10년, 20년이 지나도 그대로일 수 밖에 없다.

일본이 전쟁을 결정하는 순간부터 패망할 때까지 보여주었던 비합리성과 부조리함, 무책임함. 그들은 왜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는가.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았다기보다 바로잡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있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공감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누가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는 일본군의 병폐가 일본 사회의 병폐에서 나온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나 자신도 그 일본군의 병폐를 고스란히 따라했다"고 "고백"하지만 이는 저자가 일본 군인이라서가 아니라 일본인이기 때문에 그것을 당연한 양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전후 일본이 아무리 "제국 육군"의 병폐를 지적하고 개혁을 외쳐도 일본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과 부조리함을 바꾸지 않는 한 독일과 같은 선진 사회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즉, 저자는 "제국 육군"만을 거론하지만 실상 그 모습은 일본 전체의 모습이다. 이 사실은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은가. 필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