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뒤돌아보면: 2000년에서 1887년까지

억스리 2014. 7. 29. 13:53

[출처] http://www.sciencetimes.co.kr/?p=126407&post_type=news



19세기 미국 언론인 에드워드 벨라미(Edward Bellamy)의 장편소설 ’뒤돌아보면: 2000년에서 1887년까지 (Looking Backward: 2000∼1887; 1888년)’은 1887년 보스턴 시의 상류층 청년 줄리언 웨스트가 심한 불면증으로 최면술사의 도움을 받아 깊은 잠에 빠졌다가 113년 후 깨어나 그 사이 완벽한 사회주의 이상향 국가에 도달한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이야기다.

[Looking Backward]

에드워드 벨라미의 미래 유토피아 소설 <뒤돌아보면>은 당대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층에 큰 영향을 미쳤다. (Source: Librivox)

그가 목격한 21세기의 미래는 19세기 말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이 제거되어 사람들의 삶의 질이 평등하게 보장되고 사람에 대한 사람의 착취가 없어진 사회다. 이러한 세상이 가능하다고 본 작가의 근거는 힘든 노동에는 종래의 인간노예가 아니라 기계와 로봇을 투입하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기술문명이 창출하는 부를 사람들은 그저 함께 나누고 남은 시간은 자아실현을 위해 쓰면 되는 것이다.

이로써 현대의 유토피아 작가들은 고대사회의 유토피아가 내포하고 있는 도덕적 문제(다수의 착취를 통한 소수의 복락 향유)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중세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고결한 휴머니즘으로 무장하지 않더라도 과학기술에 힘입어 경제적 토대 자체가 바뀌면 계급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혁명 직후의 러다이트 운동이 21세기의 사회에도 여전히 공감을 얻을 만큼 과학기술로 인한 고기능성 및 효율화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대거 감원으로 이어지면서 사회불안요소로 대두되어 왔다. 예컨대 브랫 킹의 ’뱅크 3.0; 2012년’은 IT 문화의 확산으로 2020년경이면 전 세계 주요은행의 반수가 문을 닫으리라 예상한다. 따라서 과학기술만능주의에 입각한 유토피아 또한 탁상공론이 되기 쉽지만 19세기 말 사람들이 기대한 장밋빛 미래에는 그러한 고민은 생각지도 못했다. ‘뱅크’의 번역판은 국내에는 윤철희의 번역으로 2013년 브이미디어에서 펴냈다. )

이 시대의 정부는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모든 자산을 사회전체의 이익을 위해 운용한다. 노동은 준군사적 편제를 갖춘 산업군(産業軍)으로 조직되어 그 효율성이 극대화된다. 화폐 대신 1년 치 임금이 입금되어 있는 선불카드 형식의 신용카드가 통용되며 이자를 받는 은행 따위는 존재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

 다시 말해 기술만능주의적인 벨라미의 유토피아에서는 신용카드가 사상 최초로 ‘화폐 없이 소비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지불수단’이라는 의미로 처음 쓰였다는 뜻이다. 은행의 역할을 부정한다는 것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 로스차일드 가문을 포함한 글로벌 금융자본이 이윤극대화를 위해 세계정세를 어지럽히고 불필요한 전쟁을 충동질하던 상황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풀이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쑹홍빙이 지은 <화폐전쟁>을 참고하기 바란다. 국내판은 2008년 랜덤하우스에서 펴냈다. )

미래도시 (자료 tumblr.com )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대중잡지에 자주 실리던 미래도시의 전형적인 모습. 기본적으로 빌딩들은 빽빽하게 밀집한 마천루의 군집을 이루고 있고 비좁은 도로에 교통량은 넘쳐난다. 실제로 20세기 후반 들어 대도시로의 인구밀집이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하자 이를 고민한 과학소설들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Source: tumblr.com)

과학기술 기반의 산업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덕에 사람들은 전화와 라디오 그리고 쇼핑몰 같은 문명의 이기(利器)를 누릴 뿐 아니라 각 가정에 연결된 파이프로 필요물품을 배달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중앙 통제식 생필품 공급시스템은 조지 오웰의 ’1984년 Nineteen Eighty-Four; 1949년’에서는 사상통제용 정보유통시스템으로 변질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은 기능이 아니라 용도임을 깨닫게 된다.) 

국가가 제공하는 주택에서 사는 사람들은 세탁장과 식당을 공동이용하며 공해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공원에서 휴식을 취한다.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이 같은 생활양식은 훗날 어슐러 르 귄의 ’빼앗긴 자들 The Dispossessed; 1974년’에서 보다 상세하게 탐구된다.) 방송을 통해서는 음악과 설교가 제공되는데, 이는 오웰의 ’1984년’에서는 오히려 대중을 세뇌하고 친정부적인 사고를 강제하는 강압적 메커니즘으로 전락한다.

이외에도 정치가와 민병대, 군대, 국무부, 전쟁, 경제적 착취, 빈곤, 기아, 세금, 관세, 부패, 자선, 매춘, 광고 등이 사라진 21세기를 대략 돌아보고 났을 무렵 돌연 줄리언은 19세기의 자신의 집에서 깨어난다. 그는 자기가 사는 시대의 보스턴 시와 21세기에 가서 목격한 미래사회를 비교하며 전자의 빈곤과 낭비, 무자비함 등을 안타까워한다. 줄리언은 약혼녀의 집에 모인 상류층 사람들에게 두 사회에 대해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솔직히 토로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정하고 불쾌한 시선으로 그를 미치광이 취급하는 사람들뿐이다. 심지어는 그의 약혼녀까지도.

내가 말을 끝내자 침묵이 흘렀다. 나는 말하는 내내 연민의 감정에 흔들렸지만 함께 자리한 사람들을 둘러보았을 때 나는 그들의 표정이 나처럼 동요되기는커녕 냉정하고 불쾌한 경악스러움을 표현하는 것을 보았다. 이들의 표정에는 극도의 굴욕감으로 가득한 에디스(약혼녀)의 표정과 노기 띤 그녀의 아버지 얼굴이 뒤섞여 있었다. 거기에 있던 숙녀들은 분기충천한 표정을 서로 교환하고 있었고 참석한 신사들 중 한 사람은 안경을 집어들고 과학적인 호기심을 표하며 나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중략)… 

그들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노기를 띠었으며 경멸적으로 되었다. 숙녀들은 감격하기는커녕 혐오감과 공포심만을 나타냈고 한편 남자들은 비난과 모욕을 쏟아 부으며 내 말을 가로막았다. “미친놈!”, “해로운 녀석”, “광신자!”, “사회의 적!” 그들은 이렇게 외쳐댔고 아까 안녕을 쓰고 나를 살펴보던 남자는 크게 소리쳤다. “저 친구는 이제 더 이상 가난뱅이는 없어야 한다고 지껄이고 있군그래, 하하!”

“저 녀석을 끌어내!” 내 약혼녀의 아버지가 소리쳤다.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남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달려들었다.

— ’뒤돌아보면’, 국내번역판 201~202쪽

이 소설이 많은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한 데에는 단지 작가가 주장하는 사회주의 사상을 직설적으로 제시하는 대신 로맨틱한 연애소설(미래사회의 깨인 여성과 과거에서 온 남자 주인공 간의 사랑)과 휘황찬란한 기술적 유토피아를 한데 버무리는 솜씨가 매력적인 시너지를 발휘한 요인이 크다. ’뒤돌아보면’이 많은 동조자와 아류 작가들을 낳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모두 벨라미의 견해에 따랐던 것은 아니다.

윌리엄 모리스의 [News from Nowhere; 1892]. Kelmscott Press

벨라미의 기술적 유토피아에 반대하여 목가적인 농업 기반의 유토피아를 상상한 작품도 나왔으니, 윌리엄 모리스의 ‘이 세상에 없는 곳에서 온 소식 News from Nowhere; 1892년’이 바로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Source: wiki)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는 ’뒤돌아보면’이 단지 기계문명의 혜택이라는 관점에서만 미래를 전망한 단견에 지나지 않는다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고찰하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손수 또 다른 유토피아 소설 ’이 세상에 없는 곳에서 온 소식 News From Nowhere; 1890년’을 집필하였다. (국내번역판은 박홍규의 번역으로 2004년과 2008년 필맥에서 펴냈다. )

이 작품은 벨라미의 테크노피아에 대적하는 농업적 유토피아 이야기로, 여기서 모리스는 인류 공동체가 산업화라는 미명 하에 기계를 동원한 대량생산체제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보고 다시 인류가 중심이 되는 행복을 꾸리자면 기계를 이용하지 말고 직접 사람들의 손에 의해 물건 하나하나가 생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모리스 외에도 당대의 일부 인사들은 ’뒤돌아보면’의 유토피아가 주로 기술적이고 산업적인 효율에 너무 의지하고 있다보니 오히려 효율성의 강조에 내재되어 있는 비인간화의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반면 미국의 환경보호운동가 스캇 니어링(Scott Nearing; 1883~1983)은 벨라미의 비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그의 꿈만큼은 소중하다고 옹호하였다. 미국의 문학평론가 로벗 스콜즈(Robert Scholes)와 에릭 S. 랩킨(Eric S. Rabkin)은 ’과학소설, 역사/과학/비전 Science Fiction: history/ science/ vision; 1977년’에서 세상을 바꿔 놓는 데는 벨라미가 ’뒤돌아보면’에서 제시한 사상보다 마르크스주의가 훨씬 더 많은 일을 했지만, 서기 2000년을 무대로 한 ’뒤돌아보면’은 하나의 스타일과 사회비전을 위한 새로운 미학 형식을 창조했다고 평가한다. (이 평론서의 국내번역판은 김정수와 박오복의 번역으로 1993년 <SF의 이해>란 제목으로 바뀌어 평민사에서 출간되었다.

미래의 교통수단, 탄환캡슐 (자료 community.livejournal.com )

탄환캡슐 모양의 객차가 오가는 미래의 교통수단. 오늘날의 지하철이 일부 지상철 구간으로 나오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Source: community.livejournal.com)

훗날 존 듀이(John Dewey)와 윌리엄 앨런 화이트(William Allen White), 유진 V. 뎁스(Eugene V. Debs), 노먼 토마스(Norman Thomas) 그리고 쏘스타인 베블렌(Thorstein Veblen) 같은 사회평론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벨라미의 이 소설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벨라미와 모리스의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소설 또한 맨땅에서 나온 것은 아니며 이보다 수십 년 전에 발표된 끌로드 앙리 드 생시몽(Claude Henri de Saint-Simon)과 샤를르 푸리에(Charles Fourier) 그리고 에티엔느 카베(Étienne Cabet) 같은 이론가들의 이른바 ‘공상적 사회주의’ 이론들이 직간접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사회주의라는 명칭을 쓴다 해도 당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은 오늘날 사회주의 체제를 여전히 고수하는 일부 국가들의 이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생시몽의 예를 들면, 생애 전반에 걸친 활동을 고려할 때 그의 사상은 실증주의 사회관에 기초한 산업혁명사상이라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샤를르 푸리에 역시 프랑스 혁명 이후 대두된 원시 자본주의의 폐해에 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지만 체제 안에서의 온건한 개혁을 지향했다. 카베는 미국으로 건너가 공산주의 사회를 소규모로 세우는 실험을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