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조정래 "태백산맥"

억스리 2011. 4. 12. 15:34

[출처] http://blog.paran.com/jaju69/3661850

 

태백산맥

                                     조정래

 

  <太白山脈> 그 문학사적 경이의 의미  

 분단과 6.25를 다룬 소설은 많습니다. 그러나 『太白山脈』만큼 이를 깊고 넓고 핍진하게 형상한 소설은 없습니다. 한 권위 있는 비평가이자 냉정한 문학사가로부터 "우리 문학이 여기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해방 40년의 기간이 필요하였다"란 경이에 찬 표현을 얻은 『太白山脈』은 다시 말하려도 새삼스러울 지경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太白山脈』의 문학적 의의를 상기하는 의미에서 몇 가지 논점들을 간추려 덧붙입니다.  

 

 첫째, 우리 현대사에 얽힌 복잡한 이데올로기를 그 뿌리로부터 더듬어 나와 그것이 어떻게 분단과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로 감겨 들어갔는가를 벌교라는 소읍을 무대로 탁월하게 형상화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이데올로기의 발생학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를 역사학이나 여타 사회과학에서처럼 객관적인 연표나 통계 혹은 史實이나 서술로 안 다루고 토지를 둘러싼 지주와 소작인의 계급적 갈등과 얽힘을 통해 현실감  있게 풀어 이데올로기와 분단과 전쟁을 간접적으로나마 정당하게 체험케 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데올로기를 뿌리로부터 더듬어 나왔다는 말은 곧 이데올로기의 안쪽을 돌아 그 생김과 갈래와 성격을 인물들의 행동과 정념, 그리고 그들간의 갈등을 통해 눈에 보이듯 그렸다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 문학사에 소중한 일로서,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같은 소재를 다룬 다른 소설들에서는 못 거둔 성과임에 분명합니다. 곧 여타 소설들이  이념적 선입견을 지닌 채 이데올로기의 바깥에서 접근해 감으로써 이념적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이데올로기의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관념적 반향을 즐긴 반면, 『太白山脈』은  민중들의 곤핍한 살이에 착목해 거기서 생기고 자라고 뻗는 이데올로기의 뿌리와 줄기와 가지를 추적하고 이를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의 국제 정치적 역관계 속에 얽고 짜  분단과 전쟁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적 참화를 온전히 떠올려 낸 것입니다.  

 

 둘째, 『太白山脈』이 구축한 독창적인 역사적 담론입니다. 이른바 '선택적 결정'이 그것입니다.  '선택적 결정'이란 휴전 이후 곧바로 박헌영을 비롯한 이승엽, 이강국, 임화 등 12인을 숙청한 일을 이해할 수 없어 퍼부은 이해룡의 공세적 질문에 김범준이 내뱉은 답변입니다. 그런데 이 '선택적 결정'이란 이른바 '94호 결정서'의 '전쟁 책임규정' 항목, 곧 전쟁 책임을 '남조선 내 단체들의 잘못'으로 돌린 데 이미 예비돼 있던 것으로, 이전의 누구도 속 시원히 해명 못한 부분을 상상력으로 훌쩍 뛰어넘은 작가의 득의의 담론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선택적 결정'을 한 조선 노동당 당국보다 이들의 결정에 승복하는, 김범준을 위시한 빨치산 혁명가들의 모습입니다. 이는 이념의 옳고 그름을 떠나 역사와 신념에 자신의 온몸을 던진 혁명가의 숭고한 정념을 드러내주는 부분으로, 지주-소작인의 갈등과 민중들의 곤핍한 살이에 착목해 이데올로기의 안쪽을 파고든 작가의 의도와 수미상관하며 분단-역사소설로서의 이 작품을 참으로 살아 숨쉬게 합니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안쪽을 파고든 작가의 소설적 동력이 이데올로기의 벽을 어떤 식으로 돌파해 나오는가를 보여 줌과 아울러 분단 이후 우리를 옥죄어 오던 이데올로기의 단단한 껍질을 우리가 어떻게 벗어던질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시범해 보이는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셋째, 인물의 전형화가 뛰어나다는 점입니다. 우리 현대사의 이념적 프리즘은 참으로 다양하게 분광되는 바, 그 다양한 이념의 가닥들을 현대사 속의 누구를 꼭 짚지 않더라도 『太白山脈』의 전형적 인물들이 온전히 대체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더구나 꼭 역사적 거물이나 거창한 이념이 아닌, 이름없는 민초들의 살이와 소박한 생각들조차 그런 전형화와 핍진성을 구현하고 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염상진, 하대치, 김범우, 손승호, 심재모, 권서장, 염상구, 남인태, 임만수 등 수다한 실례를 우리는 작품 속에서 다 헤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넷째, 작품 속의 감칠맛 나는 전라도 사투리입니다. 이는 "소설 속의 모든 언어는 하나의 관점이며 실재하는 사회집단과 그 집단의 구체화된 전형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이념적 개념체계"이고 "소설의 본질을 이루는 어떠한 세계관도 사회적으로 구체화된 관점이어야지 추상적이고 순수한 의미론적 입장이어서는 안된다"라는 바흐찐의 견해를 상기시키는 특징으로서, 『太白山脈』의 득의의 면모라 할 것입니다. 이 사투리는 특히 '민중들의 곤핍한 살이에 착목해' 이데올로기를 그렸듯이, 전남 벌교라는 소읍을 무대로 한반도의 분단 문제를 그리는 데 필연적으로 동원된 민중언어라 할 것입니다. 이와 아울러 전라도 사투리는 분단 문제를 민중적 관점에서 다루겠다는 작가의 '구체화된 관점'을 구현해 줌과 동시에 조정래를, '추상적이고 순수한 의미론적 입장'에 서서 공식화된 이데올로기의 틀 안에서 분단 문제에 다가간 다른 작가들과 구별시키는 소중한 문학적 덕목이라 할 것입니다.  

 

 

 이 작품을 말한다  

 사람들은 해방 이후 우리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太白山脈』을 읽는다. 그것은 『太白山脈』이 우리의 현대사연구를 한 걸음 앞질러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홍정선 (문학평론가, 한신대 교수)  

 

 우리 현대사를 다루는 데 이 소설을 넘어설 작품은 아직 없다.  이재선 (문학평론가)  

 

 항쟁 이후의 문학에 있어 어디에 조정래의 『太白山脈』을 따를 것이 있겠는가. 『太白山脈』의 감격은 실로 치열한 것이었다. 보아라, 우리 문학 여기까지 왔다. 장하구나, 장하구나! 어찌 큰북 울려 작가 조정래를 한없이 칭송하지 않을손가!  고은 (시인)  

 

 염상진과 김범우, 하대치 등의 이름은 이미 일반명사가 되어있다. 이제 90, 해방된 욕망들의 무도장에서 되돌아보는 태백산맥의 모습은 우람하기보다는 맑고 서늘하게 느껴진다.  서영채 (문학평론가)  

 

 이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처절한 민족사적 대실록이다.  임헌영 (문학평론가)  

 

 1945년 이후 분단시대사에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여순반란사건에서부터 시작되는 『太白山脈』은 이 땅의 현대사에 대한 한 작가의 문학적 해석일 뿐 아니라 미족분단의 원인을 규명하고 분단된 민족을 하나로 잇는 작업의 일환으로 보여진다.  송건호 (언론인, 한국현대사가)  

 

 우리의 분단사를 역사보다도 더욱 역사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조남현 (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조정래의 『太白山脈』은 질곡의 뿌리와 실상을 집요하게 파헤쳐 보여줌으로써 우리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정확한 이해의 길을 터놓고 있다.  박현채 (경제학자, 조선대 교수)  

 

 『太白山脈』은 분단민족의 허리를 다시 이어가는 작업이다. 그가 주력하고 있는 것은 숨겨진 진실의 재확인과 민족적 자기 모럴의 새로운 확립이다. 우리 민족 모두가 분단의 비극에 대해 새로운 비판적 반성을 시도해야만 한다는 윤리적 판단이 이 작품에 깊이 깔려 있다.  권영민 (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어느 한쪽의 사상이나 관점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 거리를 엄정하게 유지하여 사상이나 인물에 섣부른 판단을 유보한다. 이 점이 바로 『太白山脈』의 새로움이며 생명력이며 탁월성이다.  전영태 (문학평론가, 중앙대 교수)   

 

 좌익 빨치산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빨치산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드러내는 소설로는 거의 유일한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조정래는 큰일을 했다. 그것은 <토지>나 <장길산>을 많이 뛰어넘고 있다.  김현 (문학평론가)   

 

 『太白山脈』을 휘감고 있는 것은 격랑의 역사를 온몸으로 산 이들의 땀과 꿈이다. 이 소설은 옹혼한 품격을 보유하고 있는 독보적인 한국문학이자 서사문학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작품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문학의 위엄을 당당하게 보여준다.  김태현 (문학평론가, 순천향대 교수)   

 

 우리 현대사 물줄기의 궤적을 제대로 그려내 오늘의 역사를 이어주고 있는 소설이다.  강만길 (역사학자, 고려대 교수)   

 

 나는 『太白山脈』의 거대함을 사랑하기 보다는, 그 구체성을 사랑한다. 우리는 『太白山脈』에서 역사를 가동시키는 이데올로기의 힘을 읽는다.  김훈 (문학평론가)   

 

 

  '태백산맥'

 “벌교는 한마디로 일인(日人)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벌교 포구의 끝 선수머리에서 배를 띄우면 순천만을 가로질러 여수까지는 반나절이면 족했고, 목포에서 부산에 이르는 긴 뱃길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조정래(53)씨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일본의 조선 지배가 남겨 놓은 흔적으로부터 시작한다. 소설의 시점(始點)이 되는 1948년 10월의 여수·순천 반란사건은 제주 4·3항쟁 진압 명령을 거부한 병사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었으며, 4·3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총선거 저지를 목표로 내걸었었다. 이승만에 의한 단정수립 기도가 일본의 패망 이후 38선 이남과 이북에 각기 진주한 미군과 소련군의 현상고착 방침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결국 동족상잔과 분단 고착화로 이어지는 여순사건은 일제의 식민통치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이다.

 

 2백자 원고지로 1만6천5백장에 이르는 장강과도 같은 길이의 <태백산맥>이 문을 여는 첫 장면은 제석산 아래 자락에 자리잡은 현 부자네 제각 부근이다. 당으로부터 지역의 거점 확보를 명령받은 정하섭이 그 대상으로 새끼무당 소화를 설정하고 제각 옆에 있는 소화네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다. 일제 지배 당시 일본인 나카지마(中島)가 조선인 소작농들을 동원해 20리 벌교 포구를 따라 제방을 쌓아 조성한 중도들판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세워진 제각은 한옥을 기본틀로 삼되 구석구석에 일본식을 가미한 독특한 양식의 건축물이다. 가령 마루는 조선식에 천장은 일본식이고 툇마루를 타고 돌아가면 본채와 붙어 있는 변소에 이를 수 있으며, 기와지붕 아래 처마에는 벚꽃 무늬를 단청으로 새겨 넣는 식이다. 이 집을 지은 지주는 또한 큰길에서 제각에 이르는 소로 양옆으로는 벚꽃나무를 심었으며 집 앞마당에는 일본식 연못이 있는 정원을 꾸며놓았으니, 일제 식민당국에 대한 그의 감사의 염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음이다.

 

 비밀임무의 수행이 주는 긴박감과 청춘남녀의 만남에서 오는 풋풋함이 버무려져 피워내는 착잡한 분위기로부터 시작된 <태백산맥>은 여순사건의 끝자락에서부터 전쟁 직후까지 한국사의 가장 긴박한 한 시기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여기서 총체적이라는 것은 단행본 10권의 방대한 분량이나 전쟁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사건 전개를 두루 담았다는 소재의 차원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마침내 전쟁이라는 형태로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민족사의 모순을, 그 핵심을 파악할 수 있는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는 뜻에 더 가깝다.

 

 <태백산맥>의 총체성을 우선적으로 담보해 주는 것은 이 소설이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민족적 비극의 연원을 민족 내부의 사정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분단내인론'이라고도 불리는 이 견해는 그간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그리고 민족 자존심의 훼손을 막고자 흔히 동원되었던 논리―한민족은 소련과 미국이라는 두 외세의 대리전을 치렀을 뿐이라는―를 정면에서 반박하고 민족 구성원 내부의 분열과 대립이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좀더 구체적으로 그것은 땅의 문제를 둘러싼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갈등으로 표출된다.

 

 지식인 출신 야산대장 염상진과 그를 따르는 농민 전사 하대치, 회의하는 지식인이지만 역사로부터 끊임없이 선택과 실천을 강요당하는 김범우, 양심적인 국군 장교 심재모, 부패한 우익의 대표자 최익승·최익달, 염상진의 동생인 우익 행동대장 염상구, 손승호, 서민영, 안창민, 소화와 이지숙, 외서댁, 들몰댁…. 수백명의 등장인물이 엮는 크고 작은 사건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거대한 역사의 양탄자를 짠다. 그 양탄자 위에서 민중의 나날의 삶과 역사라는 이름의 추상은 완벽하게 호응하여 일치를 이룬다.

 

 <태백산맥>의 문학적 성취를 보장한 요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전라도 방언의 탁월한 구사이다. 거기다가 걸쭉한 육담과 예술의 경지에 오른 욕설 등은 민중적 삶의 활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소설의 사실성을 더하는 효과를 지닌다.

 

 “그 양귀신덜이 들이닥침스로 시상 판세가 위찌 돌아가등가? 코가 석 자나 늘어졌든 지주덜이 새 기운 얻어 되살아나고, 순사질 해묵은 죄 지가 먼첨 알고 뽕빠지게 도망질혔든 눔덜이 도로 그 자리 차고앉고, 그 공평허게 일 잘허든 인민위원회럴 공산당 못자리판이라고 몰아때레 사람덜 잡아딜이고, 자네덜도 다 아는 이약 새 날아가는 소리로 일일이 되짚을 것도 없이, 지대로 잘 돼가는 밥솥얼 엎어뿐 것이 누구냐 그것이여. 보나마나 그 양코배기덜 아니었드라고?”

 

 최인훈씨의 <광장>이 1960년 4·19의 자식인 것과 같은 맥락에서 <태백산맥>은 정녕 1980년대의 아들이다. 5·16 이후, 아니 4·19의 꿈같던 한 순간을 제하고는 해방 이후 줄곧 우리 사회를 옥죄어온 우익독재의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80년대를 통틀어 격렬히 용솟음쳤고 그 결과 최소한의 이념적 자유와 균형의 틈이 마련되었거니와, <태백산맥>은 바로 그 틈바구니에서 피어난 한 떨기 민들레와도 같았던 것이다. 이념적 균형을 위한 작가의 고민이 거꾸로 이념의 역편향이라는 비판에 노출되는 결과를 낳기는 했지만 말이다.

 

 <태백산맥>이 비록 논픽션이 아닌 소설이긴 하지만 현실의 벌교에는 소설 속 사건이 펼쳐졌던 이런저런 무대들이 소설과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모양으로 남아 있다. 하대치의 아버지가 한 뙈기 소작논을 바라 등뼈가 휘도록 돌덩이를 져날라 쌓은 중도방죽, 방죽에서 읍내로 이어지는 소화다리, 염상구가 읍내 주먹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담력 싸움을 벌였던 철교, 염상진이 하대치를 시켜 압류한 지주의 쌀을 쌓아 놓았던 횡갯다리, 김범우의 집, 그리고 염상진의 야산대가 한동안 해방구로 삼았던 율어 등...... 특히 좌우로 첩첩 산줄기들이 벋어내려오다가 문득 자진해버린 바탕에 적당한 크기의 분지성 들판이 조성된 율어의 지세는 독립성과 안전성이라는 해방구의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충족시키고 있다. 소설과 현실의 이런 일치는 작가 자신이 한국전쟁 이후 3년 동안 벌교읍에 살았던 경험의 소산이다.

 

 “해방에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를 다루는 대하소설의 무대로 벌교를 삼은 것은 제가 벌교읍의 골목골목까지도 훤히 안다는 이점말고도 벌교가 겪은 역사가 우리나라 전체의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전형성을 지닌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갈등, 인근 벌교읍에서 조계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빨치산의 투쟁 루트 등이 소설의 배경으로서 적당했기 때문이죠.”

벌교/글 최재봉, 사진 강창광 기자

 

 

  검찰, 태백산맥 저자 조정래씨 이번주 소환

 한겨레신문 [ 정치 ] 1999. 9. 5. 日

 서울지검 공안1부(정병욱 부장검사)는 5일 소설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56)씨를 금주중 소환, 조사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태백산맥의 내용을 둘러싸고 지난 86년 출간 이후 13년간 이어져온 '이적성 시비'에 대한 검찰의 판단이 곧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검찰 관계자는 “조씨가 지난달 19일 독일에서 귀국한 뒤 검찰에 출두해 고소사건에 대한 조사를 받겠다는 입장을 밝혀와 소환일정을 협의했다”며 “그러나 본인의 요청에 따라 소환은 비공개로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또 고소인 측이 제시한 여순반란.한국전쟁 당시의 목격자 2∼3명을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할 방침이다.

 

 태백산맥은 지난 86∼89년 10권이 완간된 이래 '분단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아 왔으나 지난 94년 4월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명지대 교수)씨와 한국전쟁참전총연맹 등 8개 단체가 조씨를 국가보안법 및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소. 고발하면서 이적성 시비에 휘말렸다.

 

 검찰은 94년 6월 △이승만 정권을 친미 괴뢰정부로 △빨치산을 인민해방전사로 △6.25를 조국해방전쟁으로 표현한 부분 등이 이적성이 짙다는 경찰 의견과 함께 사건을 송치받았으나 지금까지 사건처리를 유보해왔다.

(서울/연합뉴스)

 

 

  벌교

 벌교는 이제 소설 태백산맥으로 많이 유명해진 듯 하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포장이 되지 않아 차라도 지나가면 먼지가 풀풀나던 길을 따라 학교에 다녔던 생각이 난다. 그래도 여름엔 길가에 아카시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마련해 주었고, 가을이면 만발하게 핀 코스모스 꽃잎을 따다가 옷에 물을 들이며 즐겁게 놀았는데... 지금은 4차선 도로가 곧게 뻗어 맘놓고 길옆을 걷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 되어 버렸다.

 

 벌교는 전라남도 동남쪽에 위치한 조그만 도시다. 동쪽으로 순천, 서쪽으로 목포, 남쪽으로 고흥, 북쪽으로 광주를 이어주는 교통의 집결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지에도 불구, 읍 외곽으로 4차선 준고속화도로가 2-3년 전에 완공된 걸 빼면 도시의 크기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함이 없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의 인심도 한결같다. 처음 벌교를 방문한 사람들은 투박한 말투에 이 지방의 인심을 오해하기도 한다지만 이내 그들의 순박함에 동화되어 버린다.

 

 두 개의 하천이 벌교 읍내를 감싸고 바다로 흐르는데 하나는 내가 태어난 옥전리에서부터 시작하는 칠동천이고 다른 하나는 낙성천이다. 낙성천은 읍내 바로 옆에 잇닿아 있고 전형적인 감조하천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밀물 때와 홍수철이 만나면 읍내로 물이 넘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제방이 높아 그런 일은 없다. 이 낙성천에 걸쳐 있는 다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태백산맥에 나오는 소화다리다. 중학교 때만 해도 그 다리를 사람도 건너고 차도 건넜지만 지금은 사람만 다니고 차는 바로 옆에 놓인 다리를 지난다. 소화다리를 지나 조금만 위쪽으로 올라가면 홍교가 나온다. 홍교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지금의 모습은 많이 보수된 것이라 예전에 홍교에서 느꼈던 아담함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벌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건강함은 비할 데가 없다. 지금은 매일 시장에 서지만 원래 벌교장은 4일과 9일에 열리는 5일장이다. 장터에 가면 아직도 예전을 기억할 거리들이 남아있다.

 

 그 유명한 벌교 고막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이 곳에서는 잔치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음식이다.

소설 태백산맥으로 인한 유명세로 홍교초등학교에 태백산맥문화관을 세운다던데 아직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다만 광주쪽으로 가는 길에 율어로 빠지는 작은 도로가 있는데 그 부분에 태백산맥기념관 표지판이 있다. 우리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도 의미있으리라 생각한다.

 

 

  감상문

 조정래의 '태백산맥'. 벌써 그 책을 읽은 지도 3년이나 지나서 내게 흐릿한 기억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날들의 감동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때에는 그 책을 읽기가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누군가 나보다 먼저 빌려 가면 그 책이 반납될 때까지 무작정 계속 기다려야만 했다.

 

 무려 6개월 간에 걸쳐 그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기쁨은 참으로 무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주위 선배의 권유로 읽기 시작했는데 장을 넘길수록 내 호흡은 가빠지고 수없이 주먹이 쥐어지고 얼마나 눈물 흘렸는지 모른다. 내게 파고든 아픔만큼이나 충격도 컸다. 그때까지 학교에서 배웠던 시각이 아닌, 지금껏 닫고만 살았던, 눈을 감고만 살았던, 귀를 막고만 살았던,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눈뜸이었다. 경이로움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알았던 옳음과 그름에 대한 모든 기준의 무너짐이었다. 그때까지 절대 선이었던 민주주의와 절대 악이었던 공산주의가 완전히 흔들려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사라지고, 오직 다만 이데올로기로 인해 상처와 피로 얼룩진 조국과 민중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또한 어쩔 수 없이 빨갱이가 되어야 했던, 그들의 삶에 대해 뒤에 남아 살아야 하는 자의 죄스러움이었고, 억울하게 빨갱이로 맞아 죽고, 인민의 반역자로 죽게 된 이들에 대한 아픔이었고, 서로가 한 민족이었음에도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들었던 이들에 한 분노였다.

 

 이 책은 역사 소설이다. 불과 몇 십 년전 바로 우리의 역사로 쓴 소설이다. 해방 이후 미군정부터 이승만 정권의 토지개혁, 여순 반란 사건, 제주도 4 3항쟁에 이어 6 25 그리고 빨치산 이야기. 그 새대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 낮엔 경찰이 죽이고 밤엔 빨치산이 죽이는 사람들 이야기. 수많은 민중과 농민들이 왜 빨치산이 되어야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죽어라 일해도 결국 농토 하나 얻을 수 없었던 수많은 소작농들. 그들은 민주적이고 합법적(?)으로 그들의 땅을 갈취해 간 지주들에게서 땅을 되찾아 사람처럼 살아가기 위해 공산당이 되었다. 순박하던 농민이 우리가 알기에는 괴물 같았던 공산당으로 변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나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저 그들에게 살 수 있는 땅과 희망을 주는 그런 나라를 원했다. 하지만,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은 그토록 농민들이 바라던 '무상 분배'는커녕 결국 지주들의 뜻에 따라 '유상 분배'를 하였고, 일제시대의 수많은 관리들이 다시 대한민국의 관리가 되었다. 결국 농민들은 이승만 정권 아니 민주주의에 희망을 버렸다. 한편 북한에서는 공산당이 '무상 분배' 토지개혁을 단행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들은 자신의 땅을 갖고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되어 죽어 갔다.

 

 이 이야기 속에는 그 혼란한 정국 속에서 죽어 갔던 사람 수만큼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하지만, 크게 세 가지 성향의 인물들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빨치산 대장이었던 염상진, 둘째는 우익의 앞잡이로 그의 형 염상진 의 뒤를 쫓아 빨치산을 소탕하려 하는 염상구, 셋째는 좌우익 어느 쪽에도 서지 못하고, 그 어려운 시대에, 어느 쪽을 택하라고 강요받던 시대에, 어쩌면 기회주의자요, 회색 주의자일지도 모르나 그 고통을 묵묵히 참으며 오직 '민족주의'를 꿈꾸며 그의 길을 걸었던 김범우.

 

 이중에 누가 잘했느니 못했느니 말할 수 있는 자격이 내겐 없다. 왜냐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가장 어려웠던 시대에서 충실히 살았고, 아직 이들을 판단 할만큼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염상진이란 인물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고 싶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사범학교까지 졸업한 수재였던 그는 점점 사회주의에 몰입한다. 하지만, 그는 정치제도로서의 사회주의자가 아닌 순수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자였다. 정말로 그는 사회주의의 이상인 '인민의 사회', '평등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그의 신념 하나로 빨치산으로 죽어 간 진정한 빨치산이었다. 그가 갔던 길이 옳은 길이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요즘처럼 신념 없고, 물질 만능 주의 사회 속에서 자신의 신념대로 살다 간 그의 삶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은 그렇게 끝난다. 빨치산의 죽음으로 .

 

 하지만 그것이 민주주의의 승리이고 사회주의의 패배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 민주주의의 성장이 지금의 물질 만능 주의이고, 가치관 부재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로 죽이는 미치광이의 사회라면 이는 또 다른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인간의 결말이야 뻔하지만.

 

 아무튼 이 책은 그런걸 따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 이데올로기에 희생되어 간 우리의 조상들과 민족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떤 하나가 절대적으로 옳고 그 외는 모조리 틀리다는 그런 이념들의 끝을 보여주고 우리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념보다는 민족이, 한 핏줄, 우리 겨레가 소중하다는 것을. (성우의 사이버홈, http://home.hanmir.com/~jcsw/)

 

 

  조정래

 전남 승주군 선암사에서 출생하였으며 광주 서중학교, 서울 보성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70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하였으며 단편집 <어떤 전설>, <20년을 비가 내리는 땅>, <황토>, <恨, 그 그늘의 자리>, 중편집 <유형의 땅>, 장편소설 <불놀이>, <대장경>,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을 출간하였다.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소설문학작품상, 단재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우리나라 분단 문학의 최고봉. 80년대에 써낸 『태백산맥』과 연달아 90년대에 써낸 『아리랑』이 모두 밀리언셀러에 오른 기록을 세웠다. '순수문학`에서 이만한 기록이 세워진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조정래에 의하면, 그의 문학을 일군 지렛대는 '가난`과 '분단`이다. 초등학교 시절, 눈비 오면 머슴이 업고 오던 도련님들과 한 반에서 공부를 할 때 저절로 '저래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문학 청년 시절 거주지인 서울 성북동 달동네의 남루한 이웃들을 보면서는, 문학이 이들을 외면하고서 과연 어떤 얘기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다.

 

 6·25 때 미군이 군홧발로 안방까지 치고 들어오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기억도 두고 두고 살아남아, 분단 문제가 조정래 문학의 화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에 진학한 조정래는 문학이 갖고 있는 숭고한 정신에 무릎꿇다시피 경배하면서, 매일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시공을 초월하는 위대한 작품을 쓰리라 기원했다. 6·3세대에 속하는 그는 동국대 총학생회 학예부장을 지내며 거의 모든 격문을 도맡아 쓰다시피 했으며, 두 차례의 신춘문예 낙방에도 불구하고 자신만만한 문학 청년이었다.

 

 제대와 등단 그리고 유신시절 3년 동안 중경고에서 교사생활을 했으나 그의 문학성향을 알아본 군장성 출신의 교장은 그를 보고 당장 나가라고 했다. 그 뒤로 출판사를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직접 출판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1983년 9월 「현대문학」에 『태백산맥』 연재를 시작하면서 그의 문학인생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등장인물이 486명에 이르고, 쌓아 놓으면 자기 키보다 10cm가 높은 원고지 1만6천5백매 분량의 『태백산맥』을 집필하는 동안, 조정래가 양복 입고 외출한 것은 1년에 한두 번에 불과했다. 전화도 안 받는다.

 

 조정래는 집필기간 동안의 자기 처지를 '글감옥`에 갇힌 것에 비유하곤 한다.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고, '먹고 자고 쓰고, 먹고 자고 쓰고의 연속'이 그의 생활의 전부다. 그래서 '앉은자리에 풀 한 포기 안 날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아침 7시 기상, 체력단련을 위한 운동, 아침밥, 오전 작업, 1시간쯤 낮잠, 점심 식사, 체조, 오후 작업, 저녁 식사, 뒤로 달리기, 잠깐 눈 붙이기, 야간 작업. 이런 강행군으로 하루 원고지 30장을 어김없이 채워 넣고야 자리에 든다. 그 시각은 늘 다음날 새벽 1∼2시.

 

 이 고된 작업을 그는 컴퓨터의 도움도 받지 않고 직접 손으로 해낸다. 당연히 그의 어깨는 정상이 아니다. 이 '직업병`의 치료를 위해 그는 틈만 나면 손바닥에 가래를 쥐고 주물럭거린다.

 

 민족사의 모순을 파헤치면서 동시에 민족의 저력과 민초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담아내는 주제의식, 전라도 토속어의 질박한 구사, 탄탄한 서사구조 등 조정래 문학의 장점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1994년에는 『태백산맥』이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여 경찰에 입건되고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 받는 수난도 겪었다. 그의 아내는 시인 김초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