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동양화란 어떤 그림인가 (동양 그림의 철저한 해부와 친절한 안내)

억스리 2011. 4. 12. 15:31

[출처] http://blog.daum.net/nyscan/9830510

 

선의 예술 여백의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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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즈음 한국화와 서양화의 구분이 어렵다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한국화인지 서양화인지 구분하기  

힘든 작품이 많이 보인다. 공모전에 전시된 그림을 보면  

서양화부인데도 한국화처럼 보이는 그림이 있고,  

한국화부에서도 서양화 같은 그림이 쉽게 눈에 띈다.  

도대체 한국화와 서양화는 어떻게 구분하나.  

 

소재나 표현 분위기로 보아 한국화(동양화)처럼 보이는 서양화가 있는가 하면 서양화처럼 보이는 한국화도 있다. 예를 들어 박수근(朴壽根)의 〈소와 유동(遊童)〉은 우리 주변에 있는 토속적 소재를 다룬, 한국적 정서가 잘 나타나 있는 그림이다.(도판 1) 우리 전통과 친근한 바지저고리 입은 농촌 아이들과 소를 소재로 했지만, 이 그림을 한국화라 하지 않고 작자 박수근을 한국화 화가라고도 부르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박래현(朴崍賢)의 〈작품 B〉는 형태의 추상성이나 작화(作畵) 방법의 비전통성으로 보아 서양화처럼 보인다.(도판 2) 그러나 이 그림은 한국화이다.  

그렇다면 한국화와 서양화의 구분은 어떤 기준에 의해 할까.  

대체로 먼저 재료와 용구에 의해 구분한다. 재료적인 측면에서 동양의 전통적 재료를 썼으면 한국화(동양화)이고, 그 외에 서양회화의 재료를 썼으면 모두 서양화로 보는 것이다.  

미술은 정신적 내용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재료와 용구의 물질적 제한을 받는다. 한국화와 서양화의 구분은 기본적으로 양식에 따른 것이나 이 양식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크게 관여한 요소가 바로 재료와 용구이다. 따라서 사용한 재료와 용구가 무엇이냐에 따라 한국화, 서양화가 구분된다.  

한국화는 전통적 재료로서 우선 화선지(또는 비단)와 먹을 사용하고, 붓은 끝이 뾰족한 전통적 모필을 쓰며, 물감은 아교를 고착제로 사용한 동양의 물감을 쓴다.  

한국화의 주원료인 먹은 입자가 가는 안료로 화선지 속에 잘 스며들어 투명감을 내는 독특한 효과가 있으며, 또 화선지는 먹물을 잘 흡수하고 아교로 인해 고르게 번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모필은 구조상 찍어 바르기보다는 선을 긋기에 알맞게 만들어진 선묘 용구이다.  

그러나 서양화의 재료인 오일 컬러(oil color)는 화려한 유채색이며 불투명하다. 그리고 긋기보다는 찍어 바르고 문질러 나타내기 알맞은 채색 재료이다. 붓도 납작하여 바르고 넓게 펴기에 알맞다. 동양적 재료를 쓴 한국화는 한국화 특유의 부드럽고 차분하고 담백한 표현이 나타나고, 서양화는 서양화 나름대로 명료한 느낌이 난다. 이러한 재료와 용구의 차이가 동ㆍ서양 그림의 양식을 다르게 만들기 때문에 흔히 재료, 용구에 의해 한국화(동양화)와 서양화를 구분하고 있다.  

대부분의 그림은 사용한 재료와 도구로 따져 보면 한국화와 서양화의 구분이 나온다. 만약 한지(또는 비단)와 먹을 사용하지 않고 캔버스에 유화(油畵) 물감으로 그렸다면, 아무리 한국화 양식을 흉내내서 그렸다 하더라도 한국화로 보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 작화 재료인 먹과 한지, 한국화 물감을 사용해 표현했으면 거의 대부분 한국화로 취급한다. 거기다 작품 주제와 소재가 동양적이거나, 필법, 묘법, 화법 등에서 동양에서만 써 오던 전통적인 방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더욱 명확히 한국화(동양화)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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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수근(朴壽根) 〈소와 유동(遊童)〉1962. 캔버스에 유채. 116.7×72.7cm. 박수근은 우리 주변에 있는 토속적 소재를 많이 다루어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를 한국화가(동양화가)로 부르지는 않는다. 그가 사용한 재료가 서양회화의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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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래현(朴崍賢) 〈작품 B〉1967. 화선지에 채색. 190×160cm. 서양의 추상화와 같은 느낌이지만 한국화(동양화)로 분류된다. 동양 전래의 재료와 용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재료와 용구는 그림의 양식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다른 견해도 있다. 그림은 궁극적으로 조형성이나 미적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릴 뿐이지 재료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므로, 재료가 화선지와 먹이든 그렇지 않든, 한국인이 그 고유의 정서와 감정에 따라 그렸다면 한국화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가 그것이다. 재료의 종류에 따른 분류에 너무 큰 의미를 두지 말자는 것이다. 유화 물감을 사용했더라도 그것이 한국적이고 동양적으로 표현되었으면 동양화요, 한국화라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으로 큰 흠은 없지만 오랜 세월 내려오면서 형성된 동양화의 양식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리가 있다.  



 

2 재료만으로 한국화와 서양화를 구분할 수 없을 경우에는  

 

 

그러나 현대회화에서는 이렇게 재료와 용구만으로 한국화와 서양화를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요즘은 그리는 재료가 다양해지고 그리는 방법이 수없이 분화됨에 따라, 세부적으로 따져 보면 어떤 것이 한국화(동양화)이고 어떤 것이 서양화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워진다.  

만약 화선지가 아닌 수채화 용지나 유화용 캔버스에 먹으로 그림을 그렸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또 화선지에 수채 물감이나 유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베니어 합판에 한지를 찢어 붙여 표현한 경우, 도화지에 수채 물감으로 동양의 전통 산수를 그렸을 경우, 화선지에 먹물을 엎지르고 몸으로 뒹굴고 하는 퍼포먼스(performance)를 보여주었을 경우, 이런 것들은 한국화(동양화)인가 서양화인가. 단지 가정이 아니라 요즘에는 이러한 그림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때는 관습적으로 행해 오던 '재료, 용구에 의한 분류'가 무의미해진다.  

이런 경우 굳이 한국화니 서양화니 장르 구분을 해야 한다면, 이때는 작자 본인의 의도가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평소 어떤 양식을 주로 그리는 화가인가, 또 작자 자신이 어떤 양식을 염두에 두고 작품 제작을 했는가, 작자 자신이 어떤 양식으로 분류하고 싶은가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평소 한국화 화가가 도화지에 먹이나 물감으로 풍경을 그렸더라도, 화가 자신이 전통적 산수를 새로운 방법으로 표현하고자 의도했다면 그것은 한국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도 화가가 자기 그림을 한국화로 주장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근거를 내세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화가 우리의 전통적 회화양식이기 때문에 전통에서 그 근거를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화라는 회화양식은 전통적으로 어떤 것이라고 명시해 둔 것은 없지만 오랜 세월 내려오면서 은연중에 형성되어 있는 기본적인 약속이 있다. 그 약속은 재료, 용구, 소재, 기법, 그리고 예술관에 있어서의 약속이다. 이런 것에서 한국화의 유전인자를 찾아 그것과 연관지어 생각해야 한다. 이들 모두를 충족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한국화(동양화)이지만, 최소한 이 중에 무엇 한 가지만이라도 한국적이라야 한국화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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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왈종(李曰鍾) 〈생활 속에서-중도의 세계〉1992. 장지에 아크릴릭. 8호. 장지는 한지의 일종으로 한국화의 재료이고, 아크릴수지는 서양화의 중요한 재료이다. 이 그림을 재료에 따라 분류한다면 한국화(동양화)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서양화도 아니다. 이럴 경우 작자의 이전 화력(畵歷)이 한국화의 현대화를 모색하는 화가이므로 한국화로 분류할 수 있겠다. 물론 작자의 생각이 한국화로 봐 주기를 원할 때 그러하다.  

 

정리하여 말하건대, 한국화는 다음과 같은 요건을 갖추고 있을 때 한국화로 불러도 어색함이 없다.  

첫째, 재료와 용구는 동양 전래의 것을 사용해야 한다. 동양에서는 화선지, 비단, 회벽 등의 바탕에 먹과 동양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고착제는 아교를 쓴다.  

둘째, 한국화적인 소재와 기법을 적용해야 한다. 한국화는 먹과 원추형의 붓을 사용하기 때문에 준법( jun37.gif 法)이나 용묵법(用墨法), 필법(筆法) 등을 중시했으며, 선과 여백, 기운의 표현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투시원근법과 명암법 등의 적용을 하지 않았으며 배경의 묘사는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다.  

셋째, 한국적 정서를 표현해야 한다. 전통적인 한국인의 정신은 은유적이고 상념적이며 암시적이고 정적이었다. 전통적 동양 그림에는 이러한 한국인의 심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화는 느낌이 차분하고 시적(詩的, 운문적)이며 축약적 운치가 있다.  

한국화(동양화)는 그림 속에 이러한 특징이 가급적 두루 갖추어진 것이라야 한다. 그 중에서 재료는 반드시 전통적 재료 사용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미술의 재료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 미술의 양식적 특징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재와 기법은 현대의 것으로 해도 한국화의 성립은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3 동양화와 한국화는 서로 다른가  

 

 

동양화라고 알고 있는 그림과 한국화라고 알고 있는  

그림이 서로 같은지 다른지 알고 싶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그림과 비슷한 그림을 그렸으니 조선시대의 그림은  

동양화라 하고, 요즘에 그린 수묵화는 한국화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그런 구분이 옳은 것인가.  

 

'동양화'와 '한국화'는 결국 같은 말이다. 그 용어를 사용하게 된 시기가 각각 다름으로 해서 면밀하게 따져 볼 때 약간의 차이를 느낄 수 있으나 크게 보아 같은 양식의 그림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혼용하여 쓰고 있는 편이다. 동양화라는 말은 1922년부터 1982년까지의 우리 그림을 지칭할 때 쓰였던 말이다. 동양화라는 말이 있기 이전인 조선시대에는 수묵화든 채색화든 붓글씨든, 통칭하여 그냥 '서화(書畵)'라 불렀다. 요즘 말로 미술(美術)에 상당하는 말이다. 당시의 그림은 보통 글씨와 그림이 곁들여 있었으니, '글씨와 그림'이라는 뜻이 담긴 서화라는 어휘가 적용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서화계(書畵界)'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이와 같은 전통적 의미가 남아 있는 말이다.  

그런데 그림을 서화라고 하던 것을 일제시대부터는 동양화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 동양화라는 말은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때 전통미술 응모 분야를 '동양화부'라고 이름 붙이면서 비롯했다.  

당시 일본은 프랑스의 국전인 「르 살롱전」을 본떠서 자기들 나라에도 국전(國展)인 「문전(文展)」을 개최하고 있었는데, 이 전시회에서는 전통적 회화의 응모 분야를 '일본화부(日本畵部)'라고 했었다. 그런데 일본 식민지 시대에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선전(鮮展)」에서는 일본화라고 하지 않고 동양화라고 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의 그림이 일본화라고는 볼 수 없는 양식이고, 그렇다고 해서 '조선화(朝鮮畵)'라고 이름 붙이기는 꺼려졌었기 때문이다. 조선화라고 불러서 민족의식을 고취할 필요도 없으려니와, 일본화부를 두어 조선인의 자존심을 건드릴 필요도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도 저도 아닌 '동양화'라는 신조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당시 민족미술가들이 쓰던 말은, 그들의 단체명인 '서화협회(書畵協會)'에서도 드러나는 바와 같이 '서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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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선(鄭敾)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조선 1751년. 지본수묵. 79.2×138.2cm. 서화(書畵)라 불리던 조선시대의 작품이다. 한국적 정서가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지만, 아직 동양화나 한국화라는 말이 없던 때의 그림이므로 서화라 말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동양화나 한국화라 불러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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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용우(李用雨) 〈점우청소(霑雨淸疎)〉1935. 견본수묵. 137×111cm. 제14회「선전(鮮展)」출품작으로, 동양화라 부르던 일제시대의 작품이다. 서화라 부르던 조선시대의 그림이나 동양화로 부르기 시작한 일제시대의 그림, 그리고 한국화라고 부르는 현재의 그림이 전혀 다른 양식의 그림은 아니다. 단지 이름만 바꾸어 불렀을 뿐이다. 그래서 이 그림을 서화, 동양화, 한국화 중 어떤 명칭으로 불러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이 그림은 한국화라는 용어가 없었던 시대의 그림이므로 동양화라 부르는 것이 좀더 자연스럽다.  

 

「선전」의 응모 분야는 제1부 동양화부(東洋畵部), 제2부 양화부(洋畵部)ㆍ조각부(彫刻部), 제3부 서부(書部)로 나뉘었으며, 동양화부에 수묵화나 채색화를 응모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명칭을 육십 년간 사용하고 1982년부터는 '한국화'로 개칭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거의 모든 전시회나 책에서 한국화로 쓰고 있다.  

그렇다면 1922년부터 1982년까지 육십 년간에 그려진 그림을 동양화라 하고, 1982년부터 지금까지 그려진 그림은 한국화라 해야 하는가. 그것은 얼핏 생각하면 적당한 용어 같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커다란 문제점이 있다. 동양화나 한국화라는 말은 그림 스타일의 이름이다. 즉 동양화는 '동양스러운 그림양식', 한국화는 '한국스러운 그림양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1982년 이전의 그림이나 지금의 그림이나 양식상 달라진 점은 없다. 따라서 같은 양식의 그림을 두고 시대에 따라 다른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사실 미술양식 이름인 동양화, 한국화라는 명칭도 문제가 있다. 동양화라는 말의 뜻은 '동양에서 그려진 그림(picture in the Asia)' 또는 '동양의 그림(picture of the Asia)'이라는 말이 아니고 '동양적인 스타일의 그림(oriental style painting)'이라는 말인데, 동양적인 스타일의 그림이란 무엇인가. 매우 애매한 말이다. 동양에도 여러 스타일의 그림이 있었고 각 스타일의 그림이 저마다 서양의 그림과는 다른데, 이 중에 무엇을 동양적인 그림이라 부를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한국화라 부를 수 있는 한국적 스타일의 그림은 있는가. 그런 양식은 아직 없다. 그러니까 한국화라는 말 그 자체도 적당한 말은 아니다. 한국스러운 스타일의 그림양식이 나온다면 비로소 이름에 맞는 한국화, 즉 '코리안 스타일 페인팅(Korean style painting)'이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서양화라는 말도 적당한 말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서양적 그림이 무엇인지 전달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서양의 그림에도 고전주의, 사실주의, 낭만주의 등 여러 가지 양식이 있는데, 그 중에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사실은, 서양화라는 말은 인상주의 미술양식을 이르는 말이었다. 일제시대 당시의 사람들이 접한 서양 그림이 인상주의였기 때문에 이것을 말하기 쉽게 '서양풍의 그림'이라는 뜻으로 서양화라 부른 것이지, 그 그림이 서양적 스타일의 전형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마치 알루미늄은 실버(silver)인 은(銀)과는 전혀 다른 원소이지만, '서양에서 전래된 은'이라는 뜻으로 '양은(洋銀)'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볼 때, 「선전」 때 동양화와 서양화로 분류한 것부터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옳든 그르든 이제는 한국화라는 명칭이 자리잡혀 있으므로 한국화라는 명칭에 맞는 양식, 즉 한국적 그림양식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림을 역사적으로 논할 때는 시대에 따라 달리 불렸던 이름인 만큼, 그 시대의 작품은 그 시대의 명칭으로 불러 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4 한국화라는 말은 어떻게 해서 생겼나  

 

 

한국화라는 말은 어떻게 하여 생겨난 말인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 그린 동양화를 한국화라고 부르는가.  

동양화라는 용어는 현재 대만의 일부에서만 사용할 뿐 아시아의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사용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그들의 그림을 '중국화'라 하고 북한에서는 '조선화', 일본에서는 '일본화'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한국화라는 용어가 따로 없었다. 우리는 일제시대부터 이름지어진 그대로 동양화로 불러 왔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문공부에서 주관하던 「국전(國展)」이 1982년부터 민간단체 주도의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바뀌면서 한국화로 개칭하여 공모하게 되었고, 마침 개정된 제4차 교육과정 교과서에서도 한국화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이때부터 동양화라는 말 대신에 한국화라는 용어가 쓰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그림의 내용이 참으로 한국적 그림양식이 되었기 때문에 이름을 한국화로 고친 것이 아니고, 단지 이름을 바꾸어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면 한국화라는 말에 대한 비판적 의견은 없는가.  

한국화라는 말의 의미는 한국스러운 그림양식이라는 말이므로 예술적 양식에 붙여진 이름이다. 예술적 양식이 먼저 있기 때문에 이것을 언어로 서로 통하여 전달하기 위해 그 양식에 알맞은 이름을 만들어 붙이는 것이 순서이다. 그러므로 한국화라는 이름을 붙이자면 한국적 그림이라는 양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아직까지 국제적으로 공인된 한국적인 그림양식은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이름 먼저 붙인 격이 되었다. 따라서 한국화라는 용어에 대해 아직도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비판적 입장의 미술계 일부 인사들이 제기한 행정소송이 받아들여져 1988년 제5차 교육과정부터는 교육부에서도 한국화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고 대신 '전통회화' '수묵화' '채색화'라는 말로 지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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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임종두(林鍾斗) 〈생토(生土)〉1992. 화선지에 먹과 채색. 100호. 제11회「대한민국미술대전」한국화부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으로, 한국화라 부르던 1982년 이후의 그림이다. 동양화라 부르던 1982년 이전의 그림과 한국화라 부르기 시작한 이후의 그림이 양식상으로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동양화라는 명칭을 한국화라 개칭하여 부르고자 하는 미술계 전반의 노력이 있은 이후의 그림이므로 한국화로 분류하는 편이 옳다.  

 

그러나 한국적인 그림이라는 명칭을 먼저 만들어 두면 그것에 맞는 예술형식이 여러 작가들에 의해서 연구되고, 결국에는 한국적 스타일의 그림을 형성케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가질 수 있으므로, 벌써 이십 년이나 사용해 온 명칭이니 한국화 양식의 수립을 위한 열정을 품고 그대로 사용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5 먹으로만 그리면 수묵화이고 색깔을 사용하면 채색화인가  

 

 

동양의 그림 하면 으레 수묵화를 연상한다.  

먹이라는 독특한 재료를 사용한 수묵화를 많이  

보아 온 영향이다. 그러나 요즘은 컬러 시대를 맞아  

채색화도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다. 채색화는 수묵화와  

어떻게 다르며, 그 구분은 어떻게 하는가.  

 

수묵화(水墨畵)는 어떤 그림이고, 채색화(彩色畵)는 또 어떤 그림인가.  

많은 사람들은 이 두 양식의 구분을 정확히 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그 명칭으로 봐서 '수묵화는 먹물로 그린 그림이고, 채색화는 색깔을 써서 그린 그림' 정도로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먹에 색을 연하게 썼으면 수묵담채화인 줄 알고, 먹에 색을 진하게 썼으면 수묵채색화인 줄 안다. 그러나, 이렇게 먹의 유무, 색깔의 유무로 수묵화와 채색화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다.  

수묵화나 채색화라는 이름도 양식 이름이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그 작품에 사용한 재료가 무엇이냐에 따라 붙여진 이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떠한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나타난 '예술적 스타일'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즉 수용성 물감인 수채화 물감을 써서 그렸다고 해서 모두 수채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채화적 스타일을 가져야만 수채화라 할 수 있는 것처럼, 동양의 수묵화나 채색화도 각각의 독특한 스타일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수묵화나 채색화가 모두 수용성 물감이지만 스타일이 수채화와는 다르기 때문에 수채화라 하지 않고 다른 이름을 붙인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먹을 사용해서 그렸다고 해서 모두 수묵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먹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수묵화식으로 그린 것이면 수묵화로 분류해야 한다. 우리는 보통 화선지에 먹이나 색의 농담과 필선을 살려, '그리는 방법'으로 나타낸 그림양식을 수묵화라고 한다. 그렇게 그림으로 해서 수묵화적 스타일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채색화도 마찬가지이다. 색을 많이 썼다고 해서 모두 채색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색을 전혀 쓰지 않았더라도 채색화식으로 그린 것이면 채색화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보통 그림을 그릴 때 먹이나 색을 '칠하는 방법'으로 나타내는 그림양식을 채색화라고 부른다.  

따라서 색깔을 많이 사용했더라도 수묵화식으로 그렸으면 수묵화이고, 먹으로만 그렸더라도 채색화식으로 그렸으면 채색화가 된다.  

수묵화(水墨畵)라는 명칭도, 단순히 '먹물로 그린 그림'이라면 사실은 묵수화(墨水畵)라고 불러야 맞다. 그러나 수묵화는 먹을 쓰되 물의 성질을 이용하여 '그리는 방법'으로 그리는 그림이므로 '물 수(水)'자를 앞에 놓았다. 그러니 수묵화라는 말은 단순히 '먹물을 사용한 그림'이라는 사용된 재료에 의해 붙여진 명칭이 아니라, '먹을 사용함으로써 나타난 스타일을 소유한 그림양식'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수묵에 담채(淡彩)를 하든 농채(濃彩)를 하든 스며듦과 번짐, 농담 표현 등 먹물의 성질을 잘 활용해서 '그리는 방법'으로 나타냈으면 수묵화가 된다.  

수묵담채화는 미술대학 한국화과, 또는 한국화 전공생이 치르는 실기 입시과목 이름이고, 수묵채색화라는 말은 전혀 불필요한 말이다. 단지, 그 작품에 사용된 재료를 설명하기 위해,'비단에 먹과 채색' '화선지에 수묵과 담채'라는 식으로 쓴다면 무방하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는 그림에 쓰인 재료를 부기하는 것이지 양식 이름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일본화과 입학생이 치르는 실기 입시과목 중 하나가 '연필담채화'였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동양화과의 전공실기 입시과목이 '모필담채화'였는데, 홍익대학교에서도 1970년대초까지 동양화과의 입시과목 이름을 '연필담채화'로 하다가 '수묵담채화'로 바꾸면서 항간에 이 말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이 수묵담채화라는 말을 색깔을 곁들인 수묵화로 오해한 나머지 수묵화, 채색화와 동등한 자격의 한 예술형식인 것처럼 인식하게 된 것이다.  

수묵담채화는 예술형식의 이름이 아니다. 동양의 그림 중 예술형식에 의한 분류는 수묵화채색화 두 가지뿐이다.  



 

6 수묵화와 채색화는 각각 어떤 스타일의 그림인가  

 

 

양식(style)이 재료나 그 제작방법에 영향받아 좌우되는 것은 사실이다.  

즉 화선지는 흡수성이 좋은데 여기에 먹이 스며들고 번지면서 독특한 먹색이 연출된다. 그래서 동양회화는 먹 또는 색이 화선지에 스며들고 번지게 하는 효과를 살리는 쪽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효과를 살려 표현하는 그림이라면 수묵화(水墨畵)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먹물로만 그리는 그림뿐 아니라 수묵에 담채, 수묵에 농채한 그림, 심지어는 먹물을 전혀 쓰지 않았어도 화선지에 먹이나 색이 스며들고 번지는 효과를 이용해서 나타내는 그림이면 수묵화에 속한다.  

수묵화는 먹이 가진 번지는 성질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두 번 이상 덧칠함이 없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그린다. 그래서 필력(筆力)을 중요시한다. 이러한 기법에 따라 담백호방(淡白豪放)하고 함축미를 지닌 표현이 되며, 먹의 농담, 먹색, 번짐, 스며듦, 먹선의 속도 등에서 수묵화 나름의 독특한 표현양식, 즉 수묵적 스타일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수묵적 특징을 표현하지 않고 먹을 단순히 검은색으로만 사용했다면, 그것은 수묵화가 아닌 '검정색으로 그린 그림'이다.  

채색화(彩色畵)도 나름대로의 독특한 스타일이 있다.  

채색화는 화선지 바탕에 안료를 주재료로 해서 그린다. 그래서 색의 표현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독특한 제작방법이 형성되어 있다. 채색화는 수묵화와는 반대로 먹이나 물감이 스며들거나 번지지 않도록 아교와 백반 그리고 호분으로 흰색 밑색칠층(塗膜)을 만든 후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 또한 보다 곱고 부드러운 색을 나타내기 위해 덧칠하는 것을 기본 기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필력으로 그린다기보다는 색을 칠해 만든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칠하고 또 칠한다. 채색화에도 먹은 사용하지만, 이때는 다양한 용묵법, 필법에 의한 표현이 아닌 철선묘(鐵線描) 등의 윤곽선을 세련되게 긋기 위한 검정색으로 여기며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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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기창(金基昶) 〈태양을 먹은 새〉1968. 화선지에 먹과 담채. 31.5×39cm. 이 그림은 수묵화에 속한다. 이러한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채색화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 그림은 채색이 강하지만, 수묵화의 재료와 기법을 이용하여 나타냈으므로 수묵화로 분류해야 한다. 즉 수묵화의 특징인 화선지에 먹이나 색이 스며들고 번지는 효과를 잘 나타낸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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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조용진(趙鏞珍) 〈은희(恩嬉)〉1991. 비단 바탕에 채색. 65×53cm. 이 그림은 채색화이다. 그림 제작방법 및 표현 특징이 채색화적이기 때문이다. 즉 수묵화와는 달리 물감이 번지지 않도록 아교와 백반, 호분으로 밑색칠층을 만들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또한 보다 곱고 부드러운 색을 나타내기 위해 덧칠하는 방법을 썼으며, 그림 표현이 자세하고 꼼꼼하고 묘사적이다.  

 

안료라는 재료가 가지고 있는 그 특징을 살려 그리다 보니 이와 같은 독특한 제작방법이 개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먹을 주로 사용하여 그렸더라도 표현방법이 채색화적인 양식이라면 바로 채색화이다.  

이같은 제작방법상의 차이 때문에 수묵화는 필력이나 필선의 형태, 먹색, 일필휘지의 동세, 간결성, 우연의 효과, 추상적 표현 등에 관심이 많지만, 채색화는 색깔의 조합과 아름다움, 장인적 기교, 정밀성과 정확성, 면의 처리, 묘사적 표현, 인위적 표현 등에 중점을 둔다. 따라서 각각 독특한 예술적 스타일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7 수묵화와 채색화의 표현원리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한지(韓紙)는 인쇄나 필기용으로 쓰고 있는 양지(洋紙)와는 성질이 다르다. 롤러로 압착시키지 않고 발〔簾〕로 떠서 그대로 말리기 때문에 종이를 이루고 있는 셀룰로오스 섬유 사이의 틈이 많다. 그리고 양지에서 잉크 번짐 방지용으로 쓰는 충전제(充塡劑, 송진과 활석 가루)를 한지에서는 넣지 않고 순수 섬유질만으로 만들기 때문에 물이나 염료가 잘 스며든다.  

한지에다 그림을 그릴 때는 먹물이나 안료가 모세관 현상에 의해 섬유질 사이로 잘 스며들고 선염(渲染) 현상이 일어난다. 물론 여기에서는 먹이나 안료에 넣은 아교가 계면활성제로서 작용하여 번지게 한다. 이런 원리를 유효 적절히 이용한 결과 나온 것이 수묵화이다.  

수묵화에서는 고운 섬유 속에 갇힌 먹이 부드럽고 은은한 색조로 특수한 효과를 나타내 준다. 즉 빛의 표면반사, 종이 섬유에서의 굴절반사, 먹 입자에서의 흡수 등에 의해서 특유의 빛이 나타난다.  

그러나 물감을 수묵화용의 화선지에 그대로 사용하게 되면, 화선지 섬유질 사이에 스며든 안료는 은은한 느낌을 주는 대신 발색(發色)이 떨어진다. 그리고 굵은 입자는 스며들지 못하고 화선지 표면에 걸러지므로 안료의 난반사에 의해 뿌옇게 되어 버린다. 이런 문제는 한지의 흡수력을 저하시키면 간단히 해결된다. 그래서 채색화에서는 화선지에다 아교와 백반, 호분을 섞어서 포수(泡水) 처리를 한 다음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  

바탕지를 아교와 백반으로 포수 처리하면, 흡수력이 저하되어 다양한 크기의 안료 알갱이들이 화선지 섬유질 사이로 흡수되지 않고 화면 위에 잘 고착된다. 따라서 발색 저하를 막고 색상을 정확히 하며, 안료를 보다 안정감있게 고착시킬 수 있다. 이러한 원리를 이용하여 그리는 결과 나온 스타일이 바로 채색화이다. 채색화의 원리를 이용해서 그리면 채색을 두텁게 할수록 그 안료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색조를 충분히 나타낼 수 있으며, 여러 번 나누어 칠할수록 깊고 우아한 색이 된다. 그래서 채색화에서는 몇 번이고 덧칠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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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수묵화의 발색 원리(위)와 채색화의 발색 원리(아래). 수묵화는 먹이나 안료 등이 화선지 섬유질 사이에 스며들어 있어 부드럽고 은은한 색을 나타낸다. 그러나 채색화는 화선지를 반수(礬水, 백반을 녹인 물에 아교를 섞는 것) 처리하여 그리기 때문에 안료가 화선지 표면에 얹혀 안료가 가지고 있는 색조를 그대로 나타낼 수 있다.  

 

수묵화에서 덧칠하지 않는 이유는 한 번 안료가 스며들었던 곳에는 덧칠해도 다시 스며들거나 번지지 않고 화선지 표면에 얹혀서 오히려 기존의 선염 현상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채색화는 묘사와 덧칠하는 쪽으로 발전하게 되고, 수묵화는 반대로 감필(減筆)과 일회성을 극대화시키는 쪽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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