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부의 역사

억스리 2009. 8. 10. 12:40
 
[역사/문화] 부의 역사
권홍우 | 인물과사상사 | 2008.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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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데 단 이틀 걸렸다. 책 읽을 시간이 거의 없는 나에게는 대단히 빠른 속도다. 펼친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눈을 땔 수 없었다. 한 마디로 재미있다. 그리고 깊고 풍부하다. 경제사 강의를 들은 적도 있고 관련 책도 몇 권 읽었지만 이렇게 쉽게 경제를 설명한 책은 접한 적이 없다.


우선 아내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서점에 들르게 된 동기가 아내였으니까 말이다. '당신 너무 책을 안 읽는 것 아냐, 아이들에게도 아빠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야지'라는 아내의 말에 퇴근 길에 서점에서 골라잡은 책이 바로 '부의 역사'다.


이 책은 초장부터 나를 마음을 달궜다. 무엇보다 유대인들의 방랑과 세계 경제 주도권을 연결시킨 점이 흥미로웠다. 한때 무적함대를 건설할만큼 강성했던 스페인이 왜 몰락했는지도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스페인에 왜 유대인이 많이 살았는지를 성서 귀절까지 제시한 대목이며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영국, 미국으로 이주하며 세계 경제를 주도했다는 대목에서는 저절로 고개가 끄떡거려졌다.


수많은 에피소드 역시 독서의 맛을 나게 한다. 가령 '달러 공주'라고 들어본 사람이 있을까. 달러 공주는 19세기에 유럽의 귀족 가문으로 시집간 미국 벼락부자의 딸들을 일컫는 말인데 달러 공주 에피소드를 통해 미국 주식시장의 성장과 유럽 토지귀족의 몰락 등을 엿볼 수 있었다. 영국을 2차 대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수상' 윈스턴 처칠도 달러 공주의 아들이었다는 점도 재미있게 읽었다.


저자는 윈스턴 처칠은 깊게 연구한 것 같다. 227쪽에는 이런 귀절이 나온다. '18세기 영국 투기꾼과 19세기 미국 투기꾼의 20세기 후손(윈스턴 처칠)의 유전인자 속에 주식투자 능력은 남아 있지 않았던 모양인지 윈스턴 처칠은 주식투자에서 거금을 날렸다. 영국 재무장관직에서 퇴임하고 미국 주식시장에 투자했는데 타이밍이 나빴다. 투자 시기가 하필이면 1929년 주가 대폭락 전야였으니 상투도 이만저만한 상투가 아니었다. 미국인 친구 버나드 바루크가 금전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처칠은 파산하고 2차 대전에서 영국 수상으로 나서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중략)---처칠이 깡통을 차게 생겼을 때 자신이 관리하던 처칠 이름의 계좌를 건내 준 바루크의 의리를 요즘 기준으로 보면 뇌물 공여죄에 해당된다'


설명에서 보듯이 처칠의 8대조 할머니는 18세기 초반 영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남해버블 사건'에서 주식 투기로 한 몫 잡은 여성 투기꾼이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 조차도 남해회사 투자에 실패해 '천체의 움직임은 알아도 인간의 광기는 측정할 길이 없다'고 한탄했던 그 남해버블에서 돈을 벌었다면 대단한 투기꾼이었던 모양이다.(참 과학자 뉴턴이 왕립조폐국장을 맡았다는 점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처칠의 외할아버지인 제롬도 미국 주식시장의 유명한 투기꾼이었다. 돈을 번 제롬은 개인 경마장을 건설하는 등 갖은 호사를 부렸지만 한 가지 허전한 것이 있었는데 그 것은 바로 '명예'였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유럽 귀족과 결혼을 통해 혈통도 사들이자는 발상이었고 미인으로 소문났던 딸 제시를 영국 처칠 가문의 며느리로 들어앉혔다. 산업자본에 투자하지 못해 돈이 궁색했던 토지귀족 가문인 랜돌프 처칠경과 미국인 부호의 딸 제시가 결혼해 '속도위반'으로 낳은 아이가 바로 윈스턴 처칠이었다.


처칠은 이외에도 몇번 더 나온다. 영국 해군이 전함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처칠이다. 2차 대전 중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을 둘러싸고 미국과 영국이 경쟁할 때와 2차대전 후에 영국이 이란의 자주적 정권을 무너뜨리는 공작을 미국과 합동으로 펼칠 때의 주역도 처칠이었다.


이 책은 숨은 역사의 발굴서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영국 해군의 작은 파업이 전세계의 금본위제도를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든지, 일본의 진주만 기습의 진짜 숨은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아! 그랬구나'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책이 재미 있어 두 번 읽었다. 그러고도 안하던 짓을 해봤다. 욕심에 중학교 1학년짜리 아이에게 읽어보라고 권했더니 처음에는 부담스러워 하던 아이도 책에 빠져들고 있다. 감동을 더 느끼고 싶었서 서평까지 검색해봤는 데 몇군데에서 나온 서평이 있었지만 길든 짧든 이 책의 재미와 깊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느낌을 공유하고 싶다. 쉽게 읽었지만 감흥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