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니체와 악순환..

억스리 2009. 7. 19. 19:16

                                 

 

  

‘니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신은 죽었다’라는 말이다. 하지만 거기서 한발짝 더 나가기가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청춘의 열병을 치료하기 위해 ‘니체’에 탐닉하지만, 대신 그만큼 쉽게 식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이유는 난해하다는 것이다.

 

특히 니체가 병적 상태에 돌입한 이후의 저작들은 현란하고 지극한 ‘메타포’와 ‘아포리’로 점철되어 있고, 사유는 극한까지 몰고가는 경우 (혹은 환상이나 몽환적인 상태)가 대부분이어서 니체가 어렵다는 평은 정당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니체의 저작들은 일관성이 부족하다. 아니 ‘일관성이 없다’기 보다는 독해하는 자의 입장을 전혀 고려치 않은 ‘사고의 비약(flight of idea)’들이 니체 저작의 전반을 관통하는 특징이다.

 

때문에 니체는 그 특유의 ‘아포리’를 소비하는 젊은 청춘들의 ‘아이콘’으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그를 연구하는 철학자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는 이중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니체를 이야기하는 이는 많지만, 니체에 이르는 길을 안내해줄 사람은 만나기 쉽지 않다. 또 설령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가 니체의 그것보다 더 어렵고 난해하기가 일쑤여서 니체를 제대로 읽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큰 걸림돌이 된다. 보통 니체, 혹은 니체의 저작들에 대해 가장 훌륭한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3대 레퍼런스로 ‘하이데거의 니체’,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그리고 이 책 ‘니체와 악순환’을 꼽는다.

 

그중에서 ‘하이데거’나 ‘들뢰즈’의 니체에 비해 이 책이 가지는 위상은 대단히 독특하다.

 

먼저 이 책의 저자 피에르 ‘클로소프스키’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피아니스트 ‘미켈란젤리’처럼 다채로운 이력의 소유자다. 이를테면 그의 공식직업은 소설가, 평론가, 번역가, 화가, 영화감독이며 그중에서 철학자라는 직업은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철학을 전공한 바가 없고 가르친바가 없으니 철학자로 분류하기도 어렵지만 그 스스로도 ‘철학자’라는 호칭을 거부했다.

 

프랑스인인 ‘클로소프스키’는 청소년기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앙드레 지드’를 만나 지적성숙의 계기를 마련했고, 이후 ‘베를길리우스,휠덜린,하이데거,니체,벤야민,비트켄슈타인’등의 저작들을 번역하면서 중세에서 근대철학까지 거대한 사유의 탑을 쌓아 올린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이 29에 ‘조르주 바타이유’를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누고 34살에는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가 스콜라주의와 신학을 공부한다. 이후 전쟁중에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고, 42에 결혼한다음 ‘내 이웃 사드’라는 사드후작에 대한 작품을 발표한다. 이어 45살에 첫 소설을 발표하고, 60살이 되던 해에는 갈망하던 ‘비평가상’을 수상했으며. 이후에도 엄청난 분량의 라틴어 독일어 저작들을 불어로 번역하더니, 나이 65살에 그림 그리기에 주력한다. 이후 그의 화가로서의 명성은 세계적 반향을 일으켰고, 76살에는 ‘문학 국가대상’을 받는다, 그리고 2001년 96세에 사망했다.

 

스스로 ‘나는 기인이다’라고 말했던 ‘클로소프스키’는 실로 수수께끼같은 업적을 남긴 위대한 천재이자, 르네상스 맨이었던 셈이다.

 

그런 그가 일생동안 천착한 것이 바로 ‘니체’였고 ‘원환’, ‘음모’,‘영원회귀’등의 개념들이었다. 그는 이 개념들을 가리켜 ‘악순환은 한 번의 행위들의 의미작용을 동일성들과 함께 없애 버리므로...중략.. 악순환은 음모안에서 실험의 선별적 기준이 된다’고 표현했다. 그는 또 ‘환영’에 대해서도 ‘환영은 재현의 영역이 아니다. 이는 또한 정신분석학적 환영도 아니다, 그것은 강도의 충동들의 기호론적 축약으로서의 현실의 구성 또는 리비도의 그림이다’라고 풀어낸다.

 

또 우리가 흔히 니체에게 열광하는 ‘사유의 높은 음조’에 대해서는 니체가 ‘파도’에게 말한 ‘그대들과 나 우리는 같은 기원에서 생겨난 것이다, 같은 혈족에서 생겨난 것이다’라는 구절을 빌려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우리의 의식을 파도라고 가정하자. 밀물에 주의, 의지, 기억이라는 이름을 붙이건 썰물에 무관심, 이완, 망각 이라는 이름을 붙이건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동일한 강도(힘,에너지), 하나의 흐름을 구성하는 파도의 운동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강도인 것이다. 이 밀물과 썰물은 하나로 합쳐질 것이다. 그리고 강도가 자신을 의미하는 곳에 있는 지시작용들은 파도들의 정점에 서서 물거품만 남기고 사라지는 형상과 같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우리가 부르는 ’사유‘라는 것이 있다. 강도의 파동이 정점에 도달하는 장소인 기호에도 불구하고 의미작용은(그것은 오직 밀물에 의해서만 성립하므로) 자신의 그림자에 가려진 움직이는 심연들로부터 결코 완전히 몸을 빼지 않는다. 이 모든 의미작용은 의미를 발생시키는 카오스의 기능으로 남는다’.

 

즉 이 말에 따르면 각자안에서 표면적으로는 각자에 귀속한 강도(힘의 차이)가 움직이므로 그 강도의 밀물과 썰물은 사유의 무의미한 혹은 유의미한 파동들을 형성하는데, 이 사유는 실제로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 되는 셈이다. 즉 물결치는 요소와는 반대로 우리가 표면적으로는 한정된 닫힌 전체(우리들의 자아)를 형성하는 것은 유의미한 파동들의 여러흔적들에 의해서이고 그것이 바로 ‘일상의 코드’라고 부를 ‘기호의 체계’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그는 또 ‘다만 우리의 고유한 파동들이 어디에서 시작하고 멈추는지 우리 자신도 알지못한다. 유일하게 아는 것은 이 코드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기호가 어떤때는 가장 높은 강도의 정도에. 어떤 때는 가장 낮은 강도의 정도에 항상 대응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의 모든 명제들의 주어진 ‘자아’이고 ‘나’이다, 이 기호는 항상 변하는 파동의 한 흔적일 뿐이지만, 이 기호덕에 우리는 우리자신을 ‘사유하는 자’로 구성하고 사유로서 사유가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클로소프스키’는 이렇듯 카오스처럼 흩어진 니체의 문장과 사유의 조각들을 붙들어 그것을 다시 극한까지 밀어올린 다음 니체의 사유에 접근하는 방식을 택했다.

 

때문의 그의 니체가 실제의 니체와 얼마나 접근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등반가가 에베레스트에 남긴 깃발은 에베레스트에 오른 자만이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저작이 ‘니체’라는 철학자에게 부당하게 덧씌워진 오해를 제거하고, 니체 이후의 철학을 계승하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고집 쎄고 도도하기로 유명한 철학자 ‘미셀푸코’마져 이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은 내가 니체 자신과 함께 읽은 가장 위대한 철학책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을정도니 이 책이 니체 연구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만만치 않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과연 이 책을 제대로 읽어 내는 것이 그리 쉬운일인가?.’의 여부는 차치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