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대공황의 세계적 충격

억스리 2008. 11. 20. 09:58

 

대공황 연구의 사각지대였던 식민지에 대한 역사적 조망

 

 

 

이달의 책  |『대공황의 세계적 충격』, 디트마르 로터문트 지음
양동휴, 박복영, 김영완 옮김 ,  예지

정지영  자유기고가

  주류경제학의 신고전학파 이론은 수요-공급의 힘에 의해 시장은 항상 청산되며 그렇기 때문에 공급이 그에 상응하는 수요를 항상 만들어 낸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외부충격으로 인해 시장이 심각한 불균형 상태에 빠지게 되면 일시적으로 균형에서 이탈하기는 하지만 곧 새로운 균형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고전학파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에서 발생하는 공황은 외부충격으로 인한 일시적인 균형의 이탈로 간주된다. 또한 이 균형으로부터의 이탈로 인한 공황은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공황, 경제교리에 도전하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공황은 신고전학파의 주장이 전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특히 1929년 미국 주식시장의 붕괴로 발생한 대공황(Great Depression)은 신고전학파 이론이 상정하는 ‘아름다운 세계’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대공황은 ‘최초의 진정한 세계사적 사건’으로 동시적으로 모든 대륙을 송두리째 파괴해버렸으며 경제교리의 반열에 있던 신고전학파 이론에 심각한 도전장을 제출했다. 

  가장 심각한 도전장은 아마도 케인스(J.M Keynes 1983~1946)가 제출한 것이다. 케인스는 대공황의 원인을 유효수요 부족에 따르면 생산설비의 과잉이라고 설명했다. 이 이론에 따라 미국에서 대공황이 발생한 이유는 세계적인 농산물 과잉생산과 가격하락에 기인한 농업제품 수출의 급속한 감소, ‘과소소비’ 현상, 토지투기시장 및 주식시장 거품 소멸에 따른 실질 자산의 감소와 이로 인한 소비지출의 하락으로 유효수요 증가가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다. 

  케인스의 이론에 대한 반격은, 화폐적 요인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통화주의자들로부터 제출되었다. 통화주의자들은, 은행위기로 인한 은행의 연쇄적 도산과 금융제도의 신용창조 기능의 저해와, 이를 해결하지 않고 오히려 긴축정책을 고수한 미 연방준비위원회(FRB)의 태도로 인해 대공황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이들에 따르면 경제성장 과정에서 통화공급을 줄임으로써 침체를 가속화시키고 팽창적 통화정책을 통해 경기를 불필요하게 과열하는 무조건 반사적인 중앙은행의 반응이 대공황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이들은 ‘실물경제’와 ‘화폐경제’를 분리해 ‘실물경제’에서는 여전히 시장의 힘만으로 균형이 달성된다고 가정하는 반면에 ‘화폐경제’에서 통화당국이 통화량을 세심하게 관리하면 공황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대공황으로 인해 위기에 몰린 경제교리를 부활시키려는 의도로 제시된 것이다. 

  결국 경제교리에 대한 도전과 이에 대한 반격으로 점철된, 대공황의 원인을 둘러싼 논쟁은 케인스주의자들과 신고전학파 경제이론이 경합하는 각축장으로 변해버렸다. 그런데 이러한 논쟁은 대공황의 역사적 전개를 해명하는 데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최초의 진정한 세계사적 사건’인 대공황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경제이론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대공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미 전간기의 역사적 상황(1차 세계대전의 유산 및 1920년대 구조적 위기), 국제금본위제로 상징되는 국제경제 시스템의 문제 등 전 세계적인 차원의 문제를 검토대상으로 하는 이론들이 다양하게 제시되었으며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제 소개하려고 하는 『대공황의 세계적 충격』은 이러한 측면에서 대공황을 좀더 총체적인 역사적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저작이 될 것이다. 특히 이 책은, 그동안 대공황과 관련한 연구들이, 대공황의 진원지이자 주요 희생자로 간주되기도 했던 선진 공업국에 집중되어 온 경향을 깨고, 대공황이 전 세계에 몰고 온 충격에 관심을 가진다는 점, 다시 말해 “대공황의 영향에 관한 연구에서 지금까지 무시된 나라들을 지도에 그려 넣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저작이다. 

  더욱이 이 책은 대공황 연구에서 그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주변부 나라들을 조망할 뿐만 아니라 국제금본위제의 비극으로부터 세계 농산물의 생산까지 대공황의 발생 원인을 간결하게 서술하고 대공황이 어떻게 정치적인 충격을 주고 새로운 전쟁을 가져왔는지 등 대공황의 정치, 사회, 경제적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공황을 이해하려는 독자들에게는 매우 균형 잡힌 저작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간결한 대공황의 역사


  우선 이 책이 가진 장점은 간결하게 대공황의 원인과 전 세계적인 충격, 대공황의 정치적 귀결과 결과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역사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독자의 입장에서 이 책은 자세하고 친절한 대공황 안내서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역사적인 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하지는 못했으며,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은 아직까지 초보적인 단계에 있는 대공황과 관련한 ‘글로벌사’(global history)의 한계를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그동안 제출된 대공황과 관련한 논의들을 간결하게 다루면서도 핵심적인 주장을 곳곳에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다. 

  우선, 이 책은 첫 부분에서 국제금본위제도의 비극에서 세계의 농산물 가격까지 대공황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국제 금본위제도에서는 한 나라에서 귀금속이 유출되면 물가가 하락하고 귀금속이 유입되는 다른 나라에서는 물가가 상승하게 되어 귀금속이 다시 물가가 더 낮은 나라로 환류하는 ‘자동정화 메커니즘’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이 성립되려면 세계시장에 강력한 최종 대부자가 존재해서 유동성과 안정성을 보증해야 하지만 대공황 직전에 미국의 연준(FRB)는 이 역할을 하지 않으려 했고 영국의 영란은행은 이를 할 능력이 없었다는 킨들버그(Kindleberger)의 주장을 이용해 국제금본위제도의 비극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세계의 농산물 생산에서는 밀의 과잉생산으로 해외경쟁의 위협이 느껴지자 보호무역에 대한 요구가 등장했고 보호무역 조치는 국내의 과잉생산으로 이어져 국제문제를 악화했다고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대공황의 정치적 귀결에서도 이 책은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인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 책은 정치적으로 대공황의 충격은 파시즘을 창출하지는 않았지만 파시즘이라는 암세포가 활발하게 운동할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해 주었다고 설명한다. 유럽의 파시즘은 1차 세계대전 이후 구세계가 무너진 폐허 속에서 사람들이 새로운 질서를 갈망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파시즘은 단기적으로 대공황이 야기한 문제를 푸는데 탁월한 방식으로 보였다. 사회적 마찰이 제거되고 임금이 하락했으며 생산이 촉진되고 완전고용이 신속히 이루어졌다. 특히 히틀러(Hitler)는 독일의 대공황을 빠르게 극복함으로써 유럽을 정복하고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재무장을 통해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또한 이 책에 따르면 대공황의 충격은 식민지 해방운동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남미에서는 대공황으로 야기된 인민과 토착 과두세력 및 해외 채권자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식민지 지배의 가혹함이 드러났으며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는 대공황으로 야기된 소요사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식민지지배에 대한 대중의 의식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는 민족해방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났으며 이는 각 나라 역사의 전제조건에 따라 직접적인 정치적 결과를 초래하거나 길게 보아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가 제국주의 나라들로부터 해방을 쟁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물론 식민지의 행정비용이 증가한 반면 식민지에서 끌어 낼 수 있는 이윤이 감소함에 따라 식민지의 가치가 줄어들자 제국주의 나라들은 식민지들을 독립시키려 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대공황은 유럽이 쇠퇴하고 미국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1914년 유럽은 전 세계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유럽은 1차 세계 대전-대공황-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다. 이와는 달리 미국은 대공황이 강타하자 경제적 고립주의를 추진하며 유럽의 금융혼란에서 유럽을 구출하려 하지도 않았고 정치적으로도 고립주의를 채택하며 전쟁이 개입하려 하지도 않았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경제적 지위를 공고히 했고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게 되자 미국은 전 세계의 최고 강자임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이 책이 가진 간결함과 명료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공황의 충격이 식민지 나라와 그곳에 살고 있는 농민에게 미친 영향을 설명하는 논리이다. 이 책은 “세계 전체적으로 보면, 세계 공업 중심지들은 공황의 부담을 주변부 나라로 전가시켰다. 국가 내부에서는 도시지역이 농촌지역의 희생을 대가로 번영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두 가지 측면에서 흥미롭다. 첫 번째는 대공황은 충격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은 공황의 부담을 주변부 나라들로 전가시킴으로써 ‘근린 궁핍화’의 원리를 통해 자국의 이해를 관철시키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주변부 지역 농촌의 대부업자 및 농민을 세계 금융 중심지에 연계시킨 신용망의 확장과 위축을 통해 대공황의 충격에 정면으로 맞섰던 여전히 어둠 속에 갇혀 주변부 농민들을 희생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의 선진 제국주의 나라들과 그들의 식민지와의 관계를 통해 가능했던 것이지만 세계 중심부의 경제상황이 식민지로 어떻게 파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논리이다. 일반적으로 제국주의 나라들과 식민지들은 ‘경제외적 강제’를 활용한 수탈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러한 수탈관계 뿐만 아니라 경제적 관계로 제국주의 나라들의 경제에 편입된 식민지 나라들의 ‘고통의 황금’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주변부 나라들의 농민들


  식민지 나라들의 농민들은 대부분 많은 빚을 지고 있었고 금본위제를 유지하기 위한 디플레이션 정책으로 모든 곳에서 이자율이 상승했기 때문에 이자부담도 컸다. 대공황으로 인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세계 중심부로부터 발생한 신용위축으로 농산물 가격이 크게 하락하고 채무농민의 소득이 크게 감소했으며 이자율이 하락하지 않자 이자부담은 더욱 커졌다. 

  대공황이 닥치자 지방의 대부자들은 추가 대부를 거절함은 물론이고 대출금을 회수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빚에 쪼들려 상환 능력이 없는 농민들은 저축(주로 금장신구의 형태)을 처분하거나 토지를 팔았다. 이런 식으로 시장에 유입된 많은 금은 세계경제의 중심부로 흘러 들어가 중심부의 통화와 그들이 생산한 공산품 가격수준을 지지하는 역할을 했다. 그 결과 교역조건이 세계 주변부의 농산물에 불리하게 변했고 주변부 나라들의 구매력이 감소했다. 

  더욱이 대공황으로 식민지 나라들의 주요 조세수입이었던 관세가 줄어들자 식민지 정부는 인두세와 같은 다른 과세에 의존했다. 납세자의 소득과 전혀 관계없이 인구 수에 따라 책정되는 인두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부담이었다. 인두세가 청구되면 농민들은 소규모 대금업자로부터 신용을 공급받아 그것을 납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미 많은 빚을 지고 있던 농민들은 대공황으로 인해 고통을 가장 크게 겪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농민들의 희생은 식민지 나라마다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터키에서는 대공황으로 인한 부담으로 사육하는 가축 수에 따라 세금을 납부했기 때문에 자신이 기르던 가축을 도살하고 도로세를 납부하는 대신에 직접 도로건설에 노동력을 제공했다. 이집트에서는 세금을 납부하고 빚을 갚기 위해 금을 팔게 됨으로써 많은 고통을 받았다. 이집트에서는 농민들이 자식을 학교에 보낼 수 없게 되자 학교 출석률이 낮아졌으며 옥수수와 밀의 소비량이 대공황 이전보다 약 31% 감소했다. 또한 대공황의 여파로 스털링 블록을 유지하기 위해 인도의 금이 필요했던 영국은 디플레이션과 농민의 부채 부담을 이용해 금을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 이로 인한 농민들의 불만은 영국에 대항하는 식민지 해방운동에 불을 지를 정도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 책은 “대공황이 거의 모든 곳에서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욱 큰 타격을 주었다는 졈을 간결한 논리와 구체적인 식민지 나라들의 사례를 통해 매우 설득력 있게 해명하고 있다. 특히 대공황기 식민지 나라들에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의 희생을 부채-디플레이션 덫을 통해 설명함으로써 선진 제국주의 나라들과 식민지의 경제적 관계를 재조명하는데 일조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대공황과 한국의 식민지 경험


  만일 이 책의 주장대로 대공황기 부채-디플레이션 덫이 작동해서 식민지와 그곳에 살고 있던 농민들이 큰 희생을 당했다면, 일본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에도 이 책은 중요한 시사점을 줄 것이다. 특히 이 책의 주장을 통해 최근 경제사학계에서 강하게 주장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 식민지 시대를 수탈의 역사로만 보지 말고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한국의 공업화를 일으키고 농업의 근대적 발전을 가져와 오늘날 중진 자본주의로 한국이 진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책의 주장대로라면 일제 식민지 수탈이라는 경제외적 강제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처해 있던 높은 채무부담과 대공황으로 인한 디플레이션 정책으로 인해 한국의 식민지 농민은 큰 희생을 당했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일본 식민지에 속해 있던 한국의 농민들은 세금과 지대, 그리고 부채상환의 부담에 짓눌리고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대공황을 비교적 빠르게 극복하기는 했지만 대공황의 충격이 식민지 한국의 농민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에 한국의 식민지 경험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으며 다른 식민지 사례와는 달리 부채-디플레이션 덫에 대한 메커니즘을 명시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경제사에 문외한인 필자의 입장에서 이 책이 주장하는 바가 식민지 한국에도 작동했는지를 엄밀하게 따져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식민지 근대화론’이 가진 실증주의적인 방법론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이 책이 주장하는 “세계 전체적으로 보면, 세계 공업 중심지들은 공황의 부담을 주변부 나라로 전가시켰다. 국가 내부에서는 도시지역이 농촌지역의 희생을 대가로 번영했다”는 것을 한국의 식민지 경험에 적용시키는 연구가 수행되었으면 하는 작은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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