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역사를 바꾼 씨앗 5가지

억스리 2019. 4. 8. 17:58

[출처] http://blog.naver.com/heeya6673/10157185922


역사를 바꾼 씨앗5가지

작가
헨리 홉하우스
출판
세종서적
발매
1997.02.10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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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니, QUININE…. 본문내용 발췌....
1638년, 안데스 산맥 북부에서 나는 치료약인 “기나피(간수의 속껍질을 말린 것으로서 키니네의 원료로 쓰임)”는 말라리아에 걸린 페루 리마의 총독부인의 병을 치료해주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키니네가 추출되는 그 나무는 킹코나(CHINCHONA, 껍질중의 껍질)로 불리게 되었다. 백작 부인의 완쾌를 축하하는 의미였다. 백작 부인은 1640년대에 유럽으로 다시 돌아갈 때 기나수 껍질을 가져갔고, 1753년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는 <<식물 종 프란타룸>>이라는 독창적인 책을 펴냈다. 책에서 키니네가 추출되는 나무를 “킹콘(CHINCHON)” 이라고 잘못 표기했는데, 이는 1778년에 스페인의 두 식물학자인 루이즈와 파본에 의해 정정되었다. 카니네는 말라리의의 치료약으로 사용되었는데, 말라리아의 전파과정은 매우 흥미롭다.
1) 니그로족과 말라리아 – 우선 이런 이유로 해서 아프리카 흑인들이 아메리카 노동에 대체되기도 하였는데, 이유는 서아프리카 니그로들(특히 겸상 혈구성 빈혈을 가진 서아프리카 흑인,,)은 말라리아에 대한 면역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생균이 적혈구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혈액형 지체가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혈구에 있는 헤모글로빈이 말라리아에 의해 헤모조인이나 헤마틴으로 전환, 모든 기관이 열의 영향을 받아 경련을 일으키게된다. 병이 심각해지면, 발작에 의해 죽는 사람도 있다. “마라리아”라는 말은 아탈리아어인 “마라(나쁘다)”와 아리아(공기)”에서 유래되었으며 특히 19세기에 그 기원을 주고 있다. 말라리아는 그 이전에 여러 가지 다른 명칭으로 불렸는데, 특히 스윔프 피버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었다. 그 후 “말라리아”라는 복합어가 마쿨로치에 의해 만들어져 1827년 영국의학 보고서에 최초로 사용되었다.
2) 말라리아와 식민지 – 버지니아에 식민지에 백인들이 정착해 살던 10년 동안, 연안 지역에 살던 인디언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었다. 이때부터 백인들이 말라리아에 약한 인디언들보다 흑인들을 노예화하는데 열을 올렸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출현한 20년간 많은 수의 인디언들이 카리브해에서 죽었다. 당시의 모든 작가들이 묘사해 놓은 인디언들의 “수척함”은 기질상의 결함이라기보다는 심신의 무력하게 만드는 희귀열로 인한 증상이었을 것이다. 백인들은 말라리아를 오스트레일리아로 전파시켰다. 모기는 해안 근처의 습지대에서만 번식할 수 있고, 건조한 내륙에서는 알을 낳지 못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말라리아가 성행할 수 없는 지역에서 호주 원주민들이 해를 입었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백인들에 의해 말라리아가 전파되었음에도 전파의 책임은 종종 원주민들에게 돌아갔다. 유럽인들은 원주민 마을 1마일 이내에는 절대로 집을 짓지 말 것이며, 원주민 아이들을 절대로 집안에 들여놓지 말라는 충고를 받았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 남부에 거주했던 흑인들에게는 이러한 규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이미 관찰을 통해 니그로들이 말라리아 열에 면역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 스페인과 남아메리카 – 1530년대에 스페인 사람들이 페루에 처음 출현했을 때 잉카 제국은 고작 3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당시의 중심지는 페루 안데스 산맥 고원에 위치한 쿠즈코(CUZCO)였다. 잉카 대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인 와이나 카파크는 피자로의 인솔하에 스페인 사람들이 최초로 출현하기 1년 전에 사망했다. 잉카 제국은 칠레의 산타이고까지 이르는 남아메리카 서부의 광대한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덕분에 스페인 사람들은 이 지역을 아주 쉽게 손에 넣었다. 잉카 제국 사람들은 비록 문맹이었지만 수리적 사고에 강했으며 석공 기술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저지대에서 생산되는 옥수수와 곡물한계선 위쪽에서 생산되는 감자를 주식으로 삼았다. 또한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여 음식을 미리 저장해 두었고, 결승 문자(옛 페루인의 문자, 컴퓨터에 사용되는 이원계와 비슷함)로 이루어진 정교한 시스템을 사용하여 계산을 했다. 그들은 또한 근대 유럽인의 사람들처럼, 국가의 요구에 대해 복종적이었으며 국가를 지극히 숭상했다. 남아메리카에서 스페인 사람들이 주로 노력을 쏟은 것은 은광 개발이었다. 1550년 ~ 1650년 사이에 지금의 볼리비아에 있던 포토 시의 광산에서는 전세계에 공급되는 은의 절반가량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4) 말라리아와 남아메리카 – 말라리아가 선사 시대에 어느 직역에 처음으로 발생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말라리아는 유럽, 아시아, 서아프리카에서 발생한 고유의 것으로 그 밖의 지역에서는 발생하지 않았다. 당시에도 인류를 괴롭히는 수많은 열병이 있었지만 그 열병들 대부분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쯤 되면 말라리아는 열대 지방 어느 곳에서나 존재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서아프리카에서만 위력을 떨쳤을까? 만약 아메리카에 열대 지역 고유의 말라리아가 있었다면 잉카 문명이나 아즈텍 문명, 마야 문명은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또한 말라리아가 성행하는 지역처럼 그렇게 사망자가 많았다면, 스페인 사람들이 아메리카에 처음 출현했을 때 아메리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전쟁에 소모할 만한 충분한 인원이란 존재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덧붙여 스페인 사람들이 탐험하지 않은 카리브해 섬에는 말라리아가 없다는 얘기가 역시 영국인들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바르바도스만 해도 2만 명이 넘는 백인 지주들과 백인 계약직 고용인들이 살았던 1660년 당시 말라리아란 없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말라리아를 전파하지만 않았다면 서인도 제도의 아라와크족과 카리브족 원주민들이 그렇게 맥없이 죽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상황 증거이며 이 밖에도 훨씬 더 많은 증거들이 있다.
5) 백인이 전염시킨 말라리아 – 백인이 출현하기 전에 남아메리카에 말라리아가 존재했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말라리아는 이미 유럽 남부 전역에 만연해 있었고 스페인 지역에서 특히 피해가 심했다. 말라리아가 창궐한 시기에 스페인의 항구와 습지대는 말 그대로 텅텅 비어 있었다. 피신하는 것만이 유일한 예방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6세기 뉴 스페인(남미의 스페인 식민지)에 말라리아가 창궐했다면 기존의 “말라리아 창궐 기간”에 스페인에서 취해진 예방책이 그 곳에서도 똑같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635년까지 리마에 있는 킹콘 백작 부인의 저택과 모든 총독 관저는 해면에 위치해 있었다. 그것도 관개 시설을 한 논밭이 있고 스페인 사람들도 둘러싸인 도시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 환경은 관리를 소홀히 하면 말라리아 모기가 번식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 부인은 말라리아에 걸리기는커녕 멀쩡히 건재했다. 이 모든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스페인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말라리아가 전파되었으며, 스페인이 페루를 점령한 후 한참이 지나서야 말라리아가 남아메리카에 만연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