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강대국의 흥망

억스리 2016. 11. 22. 18:42

[출처] http://polydalai.tistory.com/entry/%EA%B0%95%EB%8C%80%EA%B5%AD%EC%9D%98-%ED%9D%A5%EB%A7%9D





강대국의 흥망

저자
폴 케네디 지음
출판사
한국경제신문사(한경비피) | 1990-01-01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강대국의 국력은 다른 나라와의 비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폴 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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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산업화 이전 세계의 전략과 경제 
1. 서양세계의 부상
- 정화의 1433년 원정을 마지낙으로 중국의 해외원정은 막을 내렸으며, 3년뒤 원양선박을 건조해서는 안된다는 황제의 칙령이 내려지고 계속해서 둘 이상의 돛을 가진 배는 폐기하라는 명이 떨어짐. 여기엔 확실히 그럴듯한 이유가 있음. 제국의 북방이 또다시 몽고족의 압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력을 더 취약한 지역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했음. 중국이 물러선 주된 원인은 유교관리들의 단순한 보수주의 때문. 복고의 분위기에서 모든 관료들의 관심은 과거의 유지와 회복에 있었지 해외팽창과 상업에 바탕한 더욱 밝은 미래를 만드는데 있지 않았음. 유교의 경전에 따르면 전쟁 자체는 결코 환영할 수 없는 일이며, 군대가 필요한 것은 오직 이민족의 공격에 대한 두려움과 내부반란 때문이었음. 중국관리들은 육군(또는 해군)을 싫어했짐나 상인도 의심하였음. 사재의 축적,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남기는 폭리, 벼락부자 상인들의 허세, 이 모든 것들은 혹사당하는 민중의 원한을 사는 만큼이나 엘리트 학자관리들의 비위를 거슬렸음. 중국의 관리들은 전체 시장경제를 중단하거나 사업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았음. 중국인의 해외무역은 관리들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아주 못마땅한 것이었음.
- 유라시아 대륙의 서부에 흩어져 사는 비교적 투박한 인민 사이에서 줄기찬 경제발전과 기술혁신이 일어나 세계 문제의 상업적, 군사적 선진국이 꾸준히 나올 수 있었는가에 대한 주된 흐름은 첫째, 사회구조, 지리적 위치와 우발사태 등과 같은 여러 요인들과 상호작용하면서도 주로 경제, 기술적 발전으로 촉진되는 역학관계가 있었다는 것, 둘째 세계정치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는 한 개인의 변덕이나 변화무상한 외교, 정치보다는 물질적 기초와 장기적 요인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는것, 세째 힘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여러 국가와 거듭 비교하여 이해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임.
- 분산되어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상업과 상인, 항구와 시장의 발달이 가져온 정치, 사회적 결과는 대단히 중요했음. 첫째로 그같은 경제적 발달을 완전히 억누를 도리가 없었음. 그렇다고 해서 시장세력의 대두에 따른 권위의 동요가 없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님. 도시가 비판세력의 아성과 농노의 피난지로 되어버렸다고 생각한 봉건영주들은 도시의 특권을 빼앗으려고 기도하였음.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로 상인들은 빈번히 약탈당하고 물건을 도둑맞고 재산을 몰수당했음. 폭리에 관한 교황의 견해는 많은 점에서 영리를 추구하는 중개인과 고리대금업자들에 대한 유교의 혐오를 방불케 하였음. 그러나 근본적인 사실은 다양한 상업의 발달을 효과적으로 억제할만한 통일된 권력이 유럽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임.
- 점진적으로 유럽의 정부들은 제각기 시장경제와 공생관계를 맺고 그를 위한 내국조례와 호혜적인 법률체계를 마련했으며 세금의 형태로 무역에서 얻는 이익을 분배받았음. 훗날 애덤 스미스가 정확한 말로 표현하기 전에 이미 극도의 야만주의로부터 국가를 최고의 풍요로운 단계로 끌어올리는 데는 평화와 낮은 세금 그리고 관용적인 사법행정 이외에는 필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서유럽의 통치자 일부는 전술적으로 인정하고 있었음.
- 세력분산은 무엇보다도 도시국가들, 나중에는 보다 큰 왕국간의 초보적 군비경쟁을 유발하였음. 이렇게 된 데는 어느정도 사회경제적 배경이 있음. 이탈리아의 유능한 군대가 봉건기사와 그 수행자 대신 특정도시의 시장이 감독하고 상인이 봉급을 지급하는 창병, 석궁사수와 이를 호위하는 기병대로 교체되자 용병대장이 실속을 다하려고 무진 애를 씀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고용한 상인과 시장이 그들에게 돈값을 다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였음. 바꿔말하자면 도시는 일거에 승리할 수 있는 그러한 무기와 전술을 요구하였는데 그렇게 되면 전쟁비용을 줄일 수 있었음. 마찬가지로 15세기 후반 프랑스 왕들은 국민군을 자기휘하에 두고 월급을 주면서 이 군대가 획기적 성과를 보여주기를 고대했음. 마찬가지로 이러한 자유시장체제하에서 많은 용병대장들이 서로 고용계약을 차지하려고 다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공업자와 발명가들 역시 새로운 주문을 얻기 위해 제품개선에 몰두했음. 이같은 무기의 개선은 15세기 초 석궁과 장갑용 철판제조업에서 나타났으며 마침내 그후 50년이 못되어 화약무기의 실험으로 이어졌음.
- 유럽의 선장, 선원과 탐험가가 남달랐던 점은 자신들의 야망을 성취할 수 있는 선박과 화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경쟁과 모험과 기업가 정신이 드센 정치적 환경에서 생활했다는 점.
- 아시아 나라들이 다른 방해가 없었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상업, 산업혁명으로 도약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은 상당히 의심스러운 바이지만 분명한 것은 훨씬 앞선 유럽국가들이 사다리판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나라들이 세계강대국이 이르는 사다리를 오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음. 그 사다리를 오르는 데는 유럽의 장비나 기술을 습득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양을 특징짓는 일반적 특징까지도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에 더욱더 불가능했음. 유럽의 특징이란 애덤 스미스가 제시한 정도 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상인과 기업인들이 마냥 억눌리고 견제받고 수탈당하지 않는 정도의 시장경제가 존재하는 것을 뜻하였음. 그것은 또한 가능한 한 독자적 경제체제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혼란하고 때로 잔인할 때가 있더라도 경쟁에 대한 진보적 자극이 항상 있음을 뜻하였음. 이를 확대해서 보자면 이같이 확고한 경제적, 정치적 권력이 결여되었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의 부재(말하자면 탐구와 토론, 실험의 자유, 진보에 대한 신면, 추상적인 것보다는 실용성에 대한 치중, 유교경전과 종교적 독단/전통적 관습을 부정하는 합리주의)를 뜻하였음. 끊임없이 작용하여 유럽의 기적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경제적 자유방임주의, 정치/군사적 다원화와 지적자요(이 모든 것들이 비록 후시대에 비해서는 보잘 것 없었지만)의 결합이었음. 
2. 합스부르크의 지배권 시도 : 1519-1659 
- 3세기 후의 대영제국이 그랬듯이 합스부르크 진영은 널리 흩어져 있는 영토를 단지 집성한 통합체로서 이를 유지하는 데 방대한 자원과 재간이 필요한 아슬아슬한 정치적 왕조 결합이었음. 그런 점에서 합스부르크는 역사상 전략적인 과잉챙창의 두드러진 사례가 되었음. 즉, 많은 영토를 거느리는 대가로 수많은 적들과 대치해야 했는데 그러한 부담을 당시의 오토만 제국도 역시 안고 있었음.
- 스페인의 핵심적 몰락원인은 강력한 군사기구에 대한 경제적 뒷받침의 중요성을 망각한 데 있음. 계속해서 용렬한 조치들이 취해짐. 유태인을 추방하고 나중에는 무어인도 추방하였으며, 외국대학과의 교류도 중단. 비스케이 조선소에 대해 정부는 대형군함만 건조하도록 하고 더욱 유용한 소형의 상선건조를 금지. 전매품을 판매함으로써 무역을 저해하였음. 양모수출에 대하여 중과세함으로써 해외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약화시킴. 스페인내의 여러 왕국둘 사이에 내부 관세장벽을 설정하여 무역을 저해하고 물가의 앙등을 가져옴. 이것들은 장기적으로 보아 스페인이 유럽과 유럽 이외의 문제에 대해 널리 벌여놓은 주요 군사적 역할을 수행할 능력을 크게 깎아내린 잘못된 정책의 일부에 불과함. 스페인 세력의 몰락은 1640년대가 되어서야 구체적인 모습을 띠게 되지만 그 원인은 수십년 앞서 존재하고 있었음.
3. 재정.지리적 위치와 전쟁의 승리 : 1660-1815 
- 1660년 이후에 나타난 강대국들의 중요한 특징은 유럽국가들의 진정한 다극체제의 성숙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 국가는 초국가적인 종교적 명분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국가이익을 바탕으로 전쟁이냐 평화냐를 결정하였음. 이것은 분명히 즉흥적이거나 절대적 변화는 아니었음. 1660년 이전의 유럽국가들도 분명히 세속적 이해를 염두에 두고 움직였으며 18세기의 많은 국제분쟁도 종교적 편견이 부채질한 것이 사실임. 그러나 1519~1659년 시대(즉 합스부르크 세력의 추축인 오스트리아, 스페인이 프랑스를 포함한 프로테스탄트 국가동맹과 싸운 시기)의 주된 특징은 사라지고 단기적, 가변적 동맹이라는 훨씬 유연한 체제로 대치됨. 지난 전쟁에서 적이었던 국가가 다음 전쟁에서는 우방이 되는 수가 허다했으므로 정책결정도 내면에 깊이 자리잡은 종교적 신앙보다는 계산된 실리정치에 중점을 두게 되었음.
- 정부가 전쟁을 적절히 지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차입(공채를 팔거나 아니면 국가에 돈을 납입한 모든 사람에게 이자부 양도성 장기증권을 매각하는 것) 이었음. 자금의 입수가 확실해지고서야 관리들은 군납업자, 식료품 상인, 조선업자, 그리고 군인들에게 지불을 보장할 수 있었음. 방대한 양의 자금을 조달함과 동시에 지출하는 양면체제는 많은 점에서 서양의 자본주의와 국민국가의 발전을 부채질하는 풀무와 같았음
- 네덜란드의 금융발전이 장기적으로는 손해가 된 점도 있음. 즉 공채로부터 들어오는 꾸준한 수입으로 네덜란드는 제조업 경제를 떠나 금리생활 경제에 빠져 18세기 후반이 되면 이곳 은행가들은 모험적 대규모 산업투자를 꺼리는 경향을 보임. 한편 공채를 쉽게 발행할 수 있는 탓에 결국 네덜란드 정부는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고 소비세로 그것을 변제하는 바람에 부르는 것이 임금이요, 부르는 것이 가격이었음.
- 1660년에서 1815년까지의 긴 기간을 다룰 때 미국과 러시아의 영향은 초기보다 말기에 더 뚜렷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함. 사실 1660년대와 1670년대 유럽령 아메리카는 일군의 고립된 해안정착지에 지나지 않았으며 표트르 대제(1689~1725) 이전의 모스크바 대공국 역시 벽지에 위치한 낙후된 나라였음. 상업적 차원에서 보면 두 나라는 다 미개발된 상태로서 목재, 대마 등의 원료를 생산하는 한편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제품을 구입해 오는 형편이었음. 이 무렵의 아메리카 대륙은 대체로 스스로의 세력기반을 가진 예비 강대국이라기 보다는 다른 강대국의 쟁탈 목표물에 지나지 않았음. 이같은 상황은 영국이 7년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함으로써 일변하였는데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캐나다와 노바스코샤에서, 스페인은 서부 플로리다에서 쫓겨났음. 지금까지 영국 정부에 충성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던 외세의 위협이 사라지자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은 영국과의 명목적 관계만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제국정부와 뜻이 맞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킴. 더욱이 1776년이 되자 북아메리카의 식민지가 엄청나게 불어났음. 200만이던 인구는 30년마다 2배로 늘어나면서 서부로 확대되어 갔으며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식량과 다른 많은 일용품을 자급자족하게 됨. 이러한 사실은 그후 7년 동안 영국이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깨닫게 된 사실, 즉 반란을 일으킨 미국은 단순히 해군작전만으로는 제압할 수 없으며, 3000마일이나 떨어진 본국에서 지상병력을 끌어다가 굴복시키기에는 너무 광대했음.
- 독립된 미국의 존재는 세계 세력변화추세에 대한 설명에서 두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님. 첫째는 1783년 이래 비유럽계의 생산, 부와 궁극적으로는 군사력의 중심권이 나타났다는 점인데 그 군사력은 중국이나 인도같은 비유럽계의 (경제적으로 쇠퇴해가는) 나라는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장기적 영향력을 세계 세력균형에 미치게 됨. 둘째, 대서양 건너에 잠재적인 적대국이 출한함으로써 유럽정치에 주변세력으로 행세해온 영국이 그 영향을 받게 되고 캐나다와 서인도 제도 속령을 위협받게 됨.
- 유럽의 5각체제를 논함에 있어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5강대국 상호간의 관계가 1750년은 물론 1789년의 관계와도 판이했다는 사실. 비록 러시아가 성장하긴 했어도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대륙에서는 그런대로 균형이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었음. 반면 바다에서는 사정이 달라서 영국이 제해권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으며 라이벌보다 우세한 경제적 지위와 상호작용하여 더욱 강화되었음. 어떤 경우에 이는 인도에서와 같이 꾸준한 군사적 팽창주의와 약탈의 결과였음. 인도대륙은 전쟁과 이윤추구가 맞물려 18세기말에는 영국의 완전한 위성국화함. 마찬가지로 산토도밍고점력(혁명이전 프랑스 식민무역의 3/4이나 차지)으로 1790년대 말이 되면 영국제품의 시장과 재수출의 근원지를 갖게되었음. 더욱이 이같은 영국의 북아메리카, 서인도제도, 라틴아메리카, 인도, 동방시장이 유럽이 시장보다 빨리 성장했을 뿐 아니라 원거리 무역이 대체로 수익이 컸으며 해운, 상품거래, 해상보험, 어음교환과 은행업무를 촉진함으로써 영국을 새로운 세계 금융중심지로 격상시켰음. 최근의 저서들 가운데 영국의 18세기 경제성장률과 그같은 성장에 대한 해외무역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한 경우가 있는데 해외팽창 덕분에 다른 라이벌은 맛보지 못하 새로운 부에 방해없이 접근할 수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임. 1815년이 되자 유럽의 식민지 대부분을 통제하고 항로와 수익좋은 재수출 무역을 지배하는 한편 산업화 과정에서 다른 나라를 앞지른 영국은 이제 1인당 소득에서도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음. 그 다음 반세기 동안 더 부자가되어 세계무역구조에서 왕자로 성장해감. 
2부. 산업화 시대의 전략과 경제제 
4. 산업화와 세계균형의 변동 : 1815-1885 
- 나폴레옹의 실각으로부터 50년 남짓한 사이에 형성된 국제체제의 특성. 첫째, 통합된 세계경제의 꾸준한 성장. 1840년대 이후 괄목할 양상을 보인 이 추세로 말미암아 많은 지역들이 서유럽, 특히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대양횡단 대륙간 무역, 금융 네트워크에 참여하게 됨. 둘째, 장기적 강대국 전쟁이 없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국가간의 모든 갈등이 해소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 그보다도 미개발된 인민을 정복하기 위한 유럽, 북아메리카에서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으며 대개의 경우 그러한 싸움은 외부세계에 대한 경제적 침투와 제조업생산량의 급격한 축소에 따르는 군사적 부수현상이었음. 게다가 유럽 강대국 사이에는 특히 국적과 영토문제를 둘러싸고 지역적이고 개별적 충돌이 계속해서 벌어졌음. 세째,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기술이 육/해군 전쟁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
- 패전국들은 19세기 중엽의 군사혁신을 받아들여 새로운 무기를 채택하고,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며 무장시키며, 철도/기선/전신에 의한 개량된 커뮤니케이션을 활용하는 한편 군대를 지탱하기 위한 생산적 산업기반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 나라들이었음
- 워털루 전투이후의 반세기는 국제경제의 꾸준한 성장, 산업발전과 기술발전으로 인한 대폭적 생산증가, 강대국체제의 안정성과 국지적인 단기전의 발발로 특징지어짐. 게다가 육군과 해군의 무장이 어느정도 현대화 되기는 했지만 군대에서의 새로운 발전은 산업혁명과 정치체제의 변화에 민감한 민간부문의 발전에는 크게 못미치는 것이었음. 이 반세기 동안의 변천에서 1차적으로 혜택을 입은 것은 영국이었음. 생산력과 세계적 영향력을 갖고 따질 때 영국은 1860년대 후반에 절정에 달했음. 1차적으로 손해를 본것은 유럽밖의 산업화 되지 않은 농업사회로서 이들은 서양의 제품이나 군사적 침공을 당해낼 수 없엇음. 똑같은 근본적 이유때문에 산업화가 뒤진 유럽의 강대국들(러시아, 합스부르크제국)은 본래의 지위를 상실하기 시작했고 새로 통일된 국가인 이탈리아는 도저히 일등국가에 끼어들지 못함.
5. 양극세계의 도래와 중위권 국가의 위기 I : 1885-1918 
- 19세기 말 영국의 생산성 저하와 경쟁력 약화는 경제사에서 많이 연구되어온 주제임. 거기에는 투자의 빈약, 생산시설의 낙후, 노사관계의 악화, 졸렬한 판매술 등의 보다 구체적인 경제적 이유와 함께 국민성, 사회적 기풍, 세대적 차이 그리고 교육제도와 같은 복잡한 문제들이 연관되어 있음. 상대적 양상에 관심을 갖는 전반적 전략의 연구자들에게는 이 설명이 영국이 전반적으로 서서히 기반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사실만큼 중요한 것이 못됨. 1880년까지만 해도 영국은 세계 제조업 생산량의 22.9%를 차지했지만, 1913년에 이르러서는 13.6%로 줄어듬. 그리고 세계무역에서 영국의 비중은 1880년 23.2%에서 1911~1913년에는 불과 14.1% 수준으로 떨어짐. 산업력에 있어서는 미국과 독일이 영국을 앞지름. 세계의 공장이 이제 제3의 공업국으로 전락했는데 그것은 이 나라가 성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남들이 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했기 때문.
-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세계세력균형에 일어난 온갖 변화 중에서 미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될 변화는 미국의 부상이었음. 남북전쟁을 끝낸 미국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여러가지 이점들을 활용할 수 있게 됨. 비옥한 농토, 막대한 원료, 그리고 이러한 자원들은 개발하기 위한 아주 편리한 근대적 기술(철도, 증기기관, 광산장비)의 발전, 사회적/지리적 제약이 없는 여건, 대외적 큰 위험의 부재, 외국 투자자본의 유입과 국내투자의 증가, 이러한 모든 것들을 이용해 미국은 놀라운 속도로 탈바꿈할 수 있었음.
- 미국의 경제성장에 미친 해외무역의 역할은 사실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으나(1913년 국민총생산에서 해외무역의 비중은 약 8%, 영국은 26%였음) 그것이 다른 나라들에게 미친 경제적 영향은 현저했음. 전통적으로 미국은 원료(특히 면화)를 수출하고 완제품을 수입했으며 유형무역의 적자를 금수출로 메웠음. 그러나 남북전쟁 이후의 산업화 붐은 이같은 양상을 뒤바꿔놓음. 세계 최대의 제조업생산국으로 급속히 부상하면서 미국은 농기계, 철강제품, 기계공구, 전기장비를 비롯한 제품들을 세계시장에 쏟아내기 시작. 이와 동시에 북부의 산업계가 막강한 로비활동을 전개하여 관세율을 높여나감으로써 외국제품이 국내시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음. 반면에 원ㄹ나 특수품목은 갈수록 많이 수입되어 국내산업에 공급됨.
6. 양극세계의 도래와 중위권 국가의 위기 II : 1919-1942 
- 미국이 적어도 상대적인 외교적 고립으로 돌연 후퇴한 것은 1920년 이후의 고립주의 경향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1890년 이후 지속되어 온 세계 강대국들의 추세와는 모순되는 것이었으.ㅁ 이 시기 초에 세계정치 관측자들은 국제무대가 3대 신흥 강대국, 즉 독/러/미에 의해 지배되지는 않는다 해도 가속적으로 영향을 받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였음. 그러나 독일은 결정적 패배를 당했고 러시아는 혁명을 거쳐 볼셰비키 주도하의 고립주의로 빠져들었으며 1919년 당시 가장 명백한 최강국이었던 미국은 외교무대의 중심부에서 물러난 입장이었음. 결과적으로 1920년대와 그 이후의 국제문제는 비록 1차대전의 상처를 크게 받았지만 여전히 영국과 프랑스가 주역이었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가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국제연맹의 판단에 좌우되는 형편이었음.
- 1939년과 1940년 서방연합군은 이탈리아가 중립을 지키지 않고 독일편에서 싸울때의 장단점을 검토했음. 대체로 영국군 참모부는 이탈리아가 전쟁에 끼어들지 않고 지중해와 근동의 평화를 유지해주기를 바라는 쪽이었음. 그러나 강력한 반론이 제기되어쓴데 돌이켜보면 그쪽이 옳았음. 인간의 싸움에서 적진에 새로운 적이 가세하여 이쪽보다는 적진을 크게 해친다는 주장은 좀체로 내세우기 힘든 것이나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적어도 그 점에서 독특했음.
- 독일의 힘과 정책에 대한 세가지 결론. 첫째, 1938~39년 독일은 히틀러가 자랑하고 서방이 두려워한만큼 군사적으로 강하지는 못했음. 둘째, 독일군은 너무 급속히 재무장하는 바람에 경제를 긴장시켰고 히틀러측으로서는 난관돌파를 위한 전쟁돌입의 유혹이 강했을 것임. 독재와 재무장에 의해 야기된 구조적 긴장과 위기에 처한 정부에게 열려져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가속적 독재와 재무장 그것이었으며, 나치하의 독일경제발전의 가공스러운 논리에서는 인력과 물자의 약탈을 위한 전쟁이 정당화되었음. 세째, 독일이 과잉팽창하지 않고서는 이같은 점령과 약탈정책을 얼마만큼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 
3부. 현대 세계의 전략과 경제
7. 양극세계의 안정과 변화 : 1943-1980 
- 전쟁이 절정일때부터 이미 미국의 군사계획 입안자들은 새로운 질서의 개요를 그리고 있음. 미국의 한 정책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음. "현재의 적국에 대한 전쟁을 성공적으로 종식시키면 이 세계는 국가의 상대적 군사력면에서 심대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이 변화는 로마멸망 이후 1500년 동안에 일어난 그 어떤 변화보다도 바로 로마의 멸망에 의해 일어났던 변화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일본의 패망 후에는 미국과 소렴이 유일한 일급의 군사대국이 될 것이다. 이것은 두 나라가 갖고 있는 지리적 위치와 크기 그리고 방대한 군수조달능력에 기인하는 것이다."
- 나토는 마셜플랜이 경제분야에서 한 것과 같은 역할을 군사분야에서 했음. 즉 그것은 45년 유럽의 양극분할을 심화시켜 이제 아무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나라는 전통적인 중립국(스위스, 스웨덴), 프랑코의 스페인과 몇몇 특수한 국가(핀란드, 오스트리아, 유고슬라비아) 들만 남게 되었음. 당연히 소련 주도하의 바르샤바 동맹이 이에 맞섰음. 이같은 분할의 심화는 독일의 재통일을 요원하게 만들었음. 프랑스의 우려를 무릅쓰고 50년대 말에는 서독군대가 나토 구조내에서 증강되기 시작. 그것은 서방이 전체 군사력상의 격차해소를 진정으로 원하는 한 당연한 일이었음. 그러나 그로 인해 소련은 비록 특별한 통제하에서이기는 하지만 동독의 군대를 육성하게 되었음. 두 독일이 각각 군사동맹에 통합된 후 양진영은 독일의 어떠한 중립화 노력도 경계심과 의혹을 가지고 바라보면서 이를 자기진영의 안보에 대한 타격으로 간주하게 되었음.
- 50 이후 수년간 미국 군사비의 급격한 증가는 한국전쟁 비용과 함께 험난해지는 세계에서 재무장이 필요하다는 미국 정부의 신념을 반영하는 것이었음. 53년 이후의 감소추세는 군산복합체가 미국 사회와 경제를 망치기 전에 이를 통제하고자 한 아이젠하워의 노력을 반영한 것이며 61~62년의 증가는 베를린 장벽과 쿠바위기를 그리고 65년 이후의 급증추세는 미국의 동남아 개입을 반영한 것이었음.
- 71년 이후 미국, 중국의 꾸준한 국교회복이 가져온 외교적 혁명은 범세계적 힘의 상관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음. 일본은 미국의 조치에 놀라면서도 마침내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호황을 맞은 아시아 무역을 더욱 확대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음. 아시아에서는 냉전이 끝난 것처럼 보였음. 그러나 냉전이 오히려 더욱 복잡해졌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임.
8. 21세기를 향하여 
- 오늘날의 미국국방부도 마찬가지겠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영주들도 군사력은 부의 적정한 공급여하에 따라 좌우되며 부는 번영하는 생산기지, 건전한 재정 및 남보다 우수한 기술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 이상의 사실이 보여주듯이 경제적 번영이 반드시 그리고 즉각적으로 군사적 효율성으로 바뀌는 것은 아님. 군사적 효율성이란 지리적 조건, 국민의 사기, 전술적 능력 등 다른 많은 요소에 좌우되기 때문. 그러나 지금까지 세계 군사력균형상의 큰 변화는 모두 생산균형의 변화에 뒤이은 것임이 사실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 국제체제 속에서의 여러 국가와 제국의 흥망성쇠는 항상 물질적 자원이 많은 쪽이 이긴 강대국간의 전쟁결과에 의해 확인되어 왔다는 것도 사실임.
- 현재 또는 미래의 국제체제에서 진정한 중립적 행동주체로서 중국이 갖는 중요성은 중국이 다른 강대국들을 대하는 태도로 해서 더욱 커지고 있음. 폴랙은 중국의 이러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지적. 무기, 경제력, 잠재력만 가지고는 세계적인 힘의 균형을 이루는 데 있어 중국이 지니는 중요성을 설명할 수 없음. 중국이 어느정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중국의 경제실적이 상당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만 가지고는 워싱턴과 모스크바가 중국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고 다른 주요국가들이 중국에 신경을 쓰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음. 그 해답은 중국이 스스로를 위협과 괴롭힘을 받고 있는 국가라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용 가능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자원을 매우 재치있게 그리고 천연덕 스럽게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음. 강대국들에 대한 중국의 전반적 전략은 때에 따라서 대결, 군사적 충돌, 부분적 화해, 비공식적 제휴, 결별이나 다름없는 초연한 자세(사이사이에 귀에 거슬리거나 분노에 찬 언사를 던지기도 하지만)의 형태를 띠어왔음. 그 결과 중국은 모든 나라에게 있어서 불투명한 것이 많고 장기적이 의도와 방향조차 종잡을 수 없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국가가 되어버렸음. 이러한 어정쩡한 전략 때문에 중국이 정치적, 군사적 위협에 처한 때도 종종 있었음. 그러나 이러한 전략이 새로 등장하는 대국으로서의 중국의 위치에 상당한 신빙성을 부여한 것도 사실임. 중국은 미, 소 두 강대국이 원하는 것이나 요구를 무시하는 행동을 곧잘 했고 또 어떤 대는 전혀 예상밖의 행동을 하기도 했음. 중국은 얻어맞을 가능성이 있는데도 미국이나 소련 어느쪽에도 고분고분하지 않았음. 중국이 전후 중요한 정치적, 군사적 분쟁에 많이 개입하면서도 스스로의 정치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성격규정을 거부하는 특이한 국제적 지위를 지니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 어떻게 보면 중국은 독자적 성격을 지닌 미래의 강대국이라고 할 수 있음. 이는 미국이나 소련 중 어느 나라도 모방하지 않고 세계정치에서 독특한 입장을 취하는 그런 국가라는 뜻임. 장기적으로 중국은 미국과 소련 중 어느 쪽에도 예속되지 않고 그렇다고 중립국도 아닌 특이한 정치적, 전략적 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임.
- 영국 제조업의 경쟁력 약화가 1세기전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하지만 북해석유의 발견에 의해 더욱 가속화된 것이 사실. 북해석유는 무역의 적자를 해소해준 반면 파운드화를 석유통화(petrocurrency)로 전환시켜 그 가치를 비현실적으로 높임으로써 한동안 여러 수출경쟁력을 약화시켜 놓았음. 설사 석유가 고갈되어 파운드화가 더욱 약세화하더라도 이제는 그 자체만으로 제조업이 부활되리라고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음. 이미 공장이 해체되고 해외시장을 상실하였으며 또한 단위노동비용의 상승으로 국제경쟁력을 상실하였기 때문. 영국의 서비스 산업은 어느정도 장래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미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서비스업은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생산성이 높은 것도 아님. 심지어 외화가득률이 높은 국제금융, 투자, 상품거래 등의 성장부문조차도 경쟁력이 의문시되고 있음. 실제로 지난 30년 동안 세계 서비스 무역에서 차지하는 영국의 비중은 18%에서 7%로 감소했음. 금융산업이 더욱 국제화하여 뉴욕, 런던, 도쿄 등에서 대규모 자본을 운영하는 상사들에 의해 지배될 경우 영국의 비중은 더욱 줄어들 것임. 끝으로 전기통신과 사무기기 분야의 동향은 벌써부터 서방의 화이트컬로 직종이 블루컬러 직종의 과거를 답습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음.
- 미국의 첫번째 시련은 군사, 전략 분야에서 미국 스스로가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군사력 규모와 그의 유지를 위한 수단간에 합리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임. 또 하나의 시련은 세계생산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추세속에서 그 힘의 기술, 경제적 기반을 상대적 침식으로부터 보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임. 미국의 능력이 겪게될 시련은 아주 가혹할 것임. 왜냐하면 1600년의 스페인제국이나 1900년 무렵의 대영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세계문제에 대한 정치, 경제, 군사적 영향력이 훨씬 강대했던 지난 수십년간에 이루어진 방대한 전랴적 공약을 물려받은 나라이기 때문. 그 결과 현재의 미국은 강대국의 흥망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이른바 제국의 과잉팽창에 따른 위험부담을 안고 있음. 다시말해 워싱턴의 정책결정자들은 전세계에 널려 있는 미국의 이권과 의무를 한꺼번에 지켜나가기에는 현재 미국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곤란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음.
-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다소 의아해하겠지만 20세기의 미국은 표면상의 계급정치를 회피해온 나라임. 그 원인이라고 생각할수 있는 것은 수많은 이주민들이 자기나라의 가혹한 사회적 환경을 피해 도주해 왔다는 점, 미국은 매우 큰 나라이기 때문에 자신의 경제적 처지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서부로 탈출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노조를 만들기가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훨씬 힘들었다는 점 그리고 이같은 지리적 여건과 그 내부의 진취적 기업환경 덕분에 거의 원형 그대로의 자유방임적 자본주의가 발달하여 이 나라의 정치문화를 지배했다는 점(비록 좌익의 반격이 때때로 있기는 했지만) 등을 들 수 있음. 그 결과 미국의 빈부간 소득격차는 다른 어느 선진국보다 크며 사회보장비용의 국민총생산 구성비는 다른 어느나라보다도 낮은 수준임. 이같은 사회경제적 불균등에도 불구하고 계급적치의 부재가 지속된 것은 30년대 이후 미국의 전반적 성장으로 대다수 국민에게 개인생활 향상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미국사회의 1/3을 차지하는 극빈층은 정식유권자로 동원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원인이 있음. 그러나 백인종과 흑인, 스페인계 미국인간의 출생률 차이 그리고 경제적 변모로 인해 상대적 고소득 직종인 제조업 부문에서 수백만의 실업자가 발생하고 임금수준이 낮은 서비스 부문에서 수백만의 고용기회가 창출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달러화폭락과 저성장으로 지속적인 경제적 난관이 조성되는 상황에서도 현재와 같은 미국의 정치경제적 규범(낮은 수준의 정부지출, 부유층에 대한 낮은 세율)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으리라고 보기는 어려움. 이같은 점은 또한 미국 정부가 지금처럼 외부의 도전에 군사비 증액으로 대응하고 사회보장 비용의 삭감으로 예산위기에 대처해 나간다면 언젠가 정치적 반동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함. 다른 모든 강대국과 마찬가지로 국가 우선순위 결정에 있어서 방위, 소비 및 투자의 삼각관계의 긴장을 해소할 방안을 찾아내기는 쉬운일이 아님.
- 영국은 지리적 규모, 인구 및 자연자원에 비추어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세계의 부와 힘의 약 3~4%를 소유하는 정도에 그칠 수 밖에 없었지만 다른 조건들이 결코 같지 않았고 일련의 특수한 역사적, 기술적 환경 덕분에 그 전성기에 세계의 부와 힘의 25%가량을 소유할 정도로 팽창했으며 그후 이 유리한 환경들이 소멸되자 다시 원래의 자연스러운 규모로 환원되었던 것임. 마찬가지로 미국은 그 지리적 규모, 인구 및 자연 자원에 비추어 세계의 부와 힘의 16~18%를 소유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유리한 역사적, 기술적 환경 덕분에 45년에는 그 40%정도까지를 소유했다가 그 후에는 우리가 목격하는 바와 같이 더욱 자연스러운 몫으로 쇠퇴과정을 걷고 잇음. 미국은 설사 세계의 부와 힘의 자연스러운 몫을 차지하는 나라로 쇠퇴하는 경우라도 그 규모때문에 머나먼 장래에도 여전히 다극세계의 매우 중요한 강대국으로 존속하게 될 것임.
12.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