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유한계급론

억스리 2009. 2. 15. 13:22

미국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1857~1929)은 경제학의 계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단적인 학자다. 그는 주류 고전경제학의 전통을 깡그리 무시했고, 대항 학문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도 거리를 두었다. 그의 연구 태도는 경제학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회학적이다. 20세기가 막 시작되기 진전 펴낸 <유한계급론>은 베블렌의 첫 저작이자 그의 대표작이다. 자신의 이름을 책 제목과 하나로 묶어버린 이 유명한 저작은 그의 학문적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책의 제목을 비롯해 이 책 안에서 그가 내놓은 ‘과시적 소비’, ‘과시적 여가’와 같은 말은 오늘날 일상용어가 됐다.

 

 

<유한계급론>에서 베블렌이 당대의 유한계급(leisure class)을 바라보는 태도는 신랄하고 냉소적이다. 그는 유한계급이 왜 노동을 천시하는지, 왜 비실용적인 옷을 입는지, 왜 터무니없는 낭비를 일삼는지를 독특한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인류학, 역사학, 심리학의 여러 방법론을 끌어들인다. 특히 유한계급의 역사적 탄생을 인류학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은 독창적이다.

 

베블런은 유한계급의 행동양식의 본질을 ‘명예의 획득과 과시’에 있다고 본다. 그 ‘명예’가 최초의 사회적 의미를 얻게 되는 과정을 그는 원시적인 약탈 문화에서 찾는다. 이 야만의 문화에서 다른 부족과 전쟁을 벌이거나 사나운 짐승을 사냥하는 데서 용맹과 완력을 과시하는 것은 명예를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사냥과 약탈로 얻은 노획물, 전리품은 개인의 탁월한 능력을 입증하는 증거물이 된다. 약탈과 사냥을 통해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것이 집단적 관습으로 정착되면, 비약탈적 활동에 투입되는 육체노동은 비천하고도 가치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계급이 분화한다. 비천한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열등한 인간으로, 약탈 경쟁에 승리한 사람은 고귀한 인간으로 이해된다. 고귀한 인간은 명예를 얻고 존경을 받고 시샘과 선망의 대상이 된다. 유한계급은 이 고귀한 인간의 무리에서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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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국 월가에는 다시 전당포가 등장하여 성업 중이라는 소식을 언론을 통하여 전해들은 적이 있습니다. 주로 전당포에 들어오는 물건은, 패션명품, 보석, 시계, 자동차 등이고, 전당포를 주로 이용하는 계층은 월가의 IB에 근무하거나 근무하였던 월급쟁이들, 이를 상대로 장사를 하였던 자영업자들, 이들을 서포트하였던 의사, 변호사, 회계사들 등 미국사회에서 대표적인 중산층을 이루던 사람들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 대학에 진학한 이후에야 영어를 배웠고, 철학·심리학으로 그 학문적 생애를 시작하였으며, 예일대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일런드계 미국민들과 접촉을 시작하였던, 미국인이긴 하나 가짜 미국인이었던 소스타인 베블렌은, 그 주위의 미국사회 자칭‘주류’를 접하면서 이들의 ‘행태’에 대하여 많은 호기심이 생겼었나 봅니다.

 

그는 학문 인생을 경제학으로 돌리면서 시작한 작업이, 이들(위 주류)의 행태를 경제·심리학적으로 분석한 것이었고, 그 성과가 우리 포럼 회원들도 한번쯤을 들어 보셨을(제가 너무 무시한 것인가요.^^ 이 책은 저도 절반밖에 만나지 못한 채 제 서가에 꽂혀 먼지를 먹고 살고 있답니다.^^),‘유한계급론’입니다.

 

경제‘심리’라는 것은 궁국적으로는 미시적 개인과 그 행동에 대한 탐구일 수밖에 없으므로 지극히 미시적인 연구였습니다. 그 사람은 결론은 약간 허무하고, 세상풍자적인‘니네들(주류 - 고전주의, 신고전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은 현실의 사람(미시적 주체)에 대한 전제가 잘못되어 있어. 내 주변 대다수의 사람들이 왜 물건을 사는 줄 알어, 그 건 그들의 허영과 질투심, 과시욕 때문이야. 니네들 이야기하고는 달리 가만 관찰해 보니, 사람들은 가격이 높을수록, 희귀성이 높을수록, 다른 사람이 살수록 더 그 물건을 살라고 아우성치지’라는 것이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이러한 중산층의 행태를 ‘과소비, 현시소비’라고 이름을 붙이고, 도덕적·이성적 잣대를 들이대며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물론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마저도 이 소비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하면서 말입니다. (우리 회원님들도 최소한 마누라의 행동을 제어하는 데에는 실패하신 분이 많을 것으로 봅니다 ^^)

 

한국사회를 되돌아 보겠습니다.

○ 이미 돈을 많이 벌었고, 돈을 잘 버는 사람들은 특정 도시에 자기들끼리 모여서 벨트를 만들고, 거기서 많은 돈을 들여 자녀들에게 사회의 평균이상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이제 막 평균 이상의 돈을 벌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 사람들의 행태를 보고 자신의 자녀에게 평균이상의 교육을 시키기 위해 빚을 내 비싼 주택지역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 사람들만큼 돈을 벌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도 욕심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므로, 또 영원히 이 벨트에 들어가지 못할까 염려되어, 이번에는 무리하게 빚을 내어 비싼 주택지역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 이미 돈이 많은 사람들은 외제 옷을 입고, 외제차를 타면서, 지네들끼리 모여 살고 있습니다. 이제 돈을 벌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괜찮은 직업을 얻고, 괜찮은 계약을 따 내는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도 무리해서 이미 돈을 번 사람들의 행태를 따라합니다. 현재 자신의 처지에서 위와 같이 돈을 벌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내가 명품 핸드백 하나 들고 있지 못하면, 이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겠지’역시 이 사람들도 명품 핸드백을 사는 대열에 합류합니다.

 

이러한 소비는, 좋게 평가하고 그게 경제의 상황과 적절하게 조화될 경우에는, 경제를 순환하게 하는 동력일 뿐만 아니라, 미시적으로도 그 자체는 인간의 숙명으로 인한 것이므로, 더 나아가서는 내 자신도 이 굴레를 벗어나 있지는 못하므로 최소한 ‘부자연스럽다’라는 평가는 내릴 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거시적 측면에서 이러한 소비는, 소득불평등이 확대되는 상황과 경기가 위축되는 상황에서는 많은 문제점을 발생시킵니다.

○ 애시당초 황새는 황새이고, 뱁새는 뱁새였을 뿐인데, 뱁새가 황새의 흉내를 내다보니, 이자 갚는데 등골이 휘어지고, 더운 나라 해변가에 가서 모든 것을 잊고 푹 쉴 수도 없으며, 책한권·영화한편 제대로 볼 시간도 없고,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돌볼 틈마저도 없습니다.

○ 경기가 전반적으로 나빠져 실직을 하거나, 매출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상황이 찾아오면 그나마‘거지생활’을 하면서 내던 이자마저도 내지 못하는 상황으로 내 몰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태가 그 미시적 주체의 몰락으로 끝난다면야, 이를 베블렌처럼 조소하고, 비난하면 끝이겠지요. 그런데 작금의 상황에서 눈치챌 수 있는 것처럼 그 것이 국민경제적 단위에서 광범위한 현상이고 전사회적인 경쟁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이는 미시적 분석에서 끝날 일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국민경제적 단위에서 이 사람들은 소비와 담세의 허리를 지탱하였던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이 하층민으로 추락하게 될 경우에, 그 사회적 부담도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제어하여야 합니다. 어떤 저명한 미국의 경제학자는 다음과 같은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 누진율을 높이되, 소득이 아닌 '소비'에 세금을 매기는 것이다. 누진'소득세'의 경우 높은 한계세율이 저축과 투자의 동기를 약화시키지만, 많이 지출할 수록 세액이 늘어나는 누진'소비세'의 경우 저축의 동기를 강화한다. 추가 저축은 투자를 자극하고, 성장을 촉진하며, 바람직하지 아니한 영역(현시적이고, 사회적 지위 확인적인 자산축적 등)으로의 지출연쇄를 축소함으로서 ‘밑바닥을 향한 질주’를 멈출 수 있다. [한겨레신문기사, ‘부자아빠의 몰락’(로버트 프랭크) 각 참조]

 

위에서 간단하게 결론적으로 정리한 것처럼 이 이야기는 제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 다음과 같은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현시소비 및 과도한 자산소비도 소비인데 소비가‘과도하게’위축되지 않겠느냐?? 물론 소비의 위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도한 위축은 아닙니다. 선각자 베블렌이 지적하는 것처럼 소비는 인간의 숙명이고, 한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은행에 소득의 대부분을 이자로 가져다 바치는 대신, 책을 읽고, 여가를 즐기며, 건강을 돌보고, 조그만 문제가 생겨도 변호사를 찾아 갑니다. 또한 소득의 전반적인 향상이 발생하고, 경제의 善순환 가능성도 매우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