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마음가는 대로 해라

억스리 2009. 2. 9. 02:09
마음가는대로 해라 
 
 
저 자 : 앤드류 매튜스  
역 자 : 노혜숙 
출판사 : 생각의 나무 
 
 
 
멋대로 살면서 최고로 성공하기 10계명

 

                          

 

1. 시련을 두려워하지 말자.  
2. 만나는 사람 모두를 삶의 스승으로 여기자. 
3. 뿌리 깊은 고정관념을 버리자. 
4. 집착할수록 멀어진다. 얻으려면 집착하지 말자. 
5. 세상일은 생각대로 된다. 상황을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6. 삶은 투쟁이 아니다. 마음가는 대로 살며 삶을 즐기자. 
7. 사랑의 눈으로 이웃과 세상을 보자. 
8.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지 말자. 오직 현재를 소중히 여기자. 
9. 사랑한다면,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자. 

10.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먼저 나 자신을 변화시키자. 

 

 

제1장 시련이 사람을 만든다.

 
 
우리는 교훈을 배우기 위해 세상에 왔으며, 세상은 우리의 스승이다. 
시련을 통해 배운다. 
눈앞에 빤히 보이는데도 
내가 열 살 때 가장 애지중지하던 재산은 축구공이었다. 나는 축구공을 안고 밥을 먹고 잠도 잤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신발 대신 축구공을 반짝반짝하게 닦았다. 축구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물론 축구 외에 몇 가지 아리송한 일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아기가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는 문제도 끼여 있었다. 
어느 날 오후 나는 거리에서 놀고 있다가 내 소중한 공을 잃어버렸다. 여기저기 둘러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누군가 훔쳐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옷 속에 내 축구공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를 발견했다. 그래서 당당하게 그 여자에게 걸어가서 말했다. 
"내 축구공을 옷 속에 넣고 뭘 하시는 거예요?" 
알고 보니 그 여자는 내 축구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날 나는 아기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그리고 여자가 임신 9개월이 되면 어떻게 보이는지 알게 되었다. 축구공은 나중에 시간이 더 지나서야 찾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은 어떻게 내가 열 살이나 될 때까지 임신한 여자를 보지 못했는가 하는 사실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임신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마디 더 
우리에게는 살면서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는 시기가 있다. 그때까지는 눈앞에 빤히 보이는 것도 보지 못한다. 
시련이 필요한 이유 
대부분의 사람들은 뒤통수를 얻어맞아야만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 왜냐하면 그냥 그대로 눌러 사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벽에 부딪칠 때까지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대로 계속한다. 
건강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식이요법이나 운동을 시작한다. 언제? 우리 몸이 완전히 망가져서 의사가 '생활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오래 살지 못할 거요'라고 말할 때이다. 이때가 돼야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게 된다. 
인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언제일까? 결혼 생활이 파탄 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질 위기에 처할 때이다. 
학교에서는 언제쯤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하게 될까? 낙제할 지경에 이르러서이다. 사업을 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적용하고 단호한 결정을 내릴 때는 언제인가? 청구서를 지불할 수 없을 때이다. 고객 서비스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되었을 때는? 이미 고객이 떠나 버린 후이다. 
우리는 보통 언제 기도를 하는가?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었을 때이다. 
"하느님, 지난번에 날벼락을 맞았던 이후로 기도한 적이 없었던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이 어렵게 돌아갈 때 가장 큰 교훈을 배운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렸던 때는 언제였는가? 시련을 당하고 무릎을 꿇은 후, 머리를 걷어차이고 퇴짜를 맞은 후가 아니었던가? 그리고는 그제서야 자신에게 말한다. '돈 없는 것에도 지쳤고, 여기저기서 당하기만 하는 것에도 지쳤어. 평범하게 사는 것이 지쳤어. 무언가를 해야 되겠어'라고. 우리는 성공을 기뻐하지만 거기서 배우는 것은 많지 않다. 실패는 가슴 아프지만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게 되는 것은 바로 그때이다. 우리는 지난 날을 돌아보면서 대체로 '시련'이 전환점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현명한 사람들은 문제를 만들면서 돌아다니지도 않지만 어쩌다 한방 얻어맞는 일이 생기면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하고 있는 일을 어떤 식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까?' 반면, 패배자들은 모든 경계 경보를 무시해 버린다. 그들은 지붕이 내려앉으면 투덜거린다. '도대체 나한테는 모든 일이 왜 이 모양이지?' 
우리는 습관적인 동물이다. 변화를 강요당할 때까지는 하던 대로 계속한다. 
메리는 알이라는 연인에게서 버림을 받았다. 그녀는 시름에 싸여서 일주일 동안 방구석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러다가 점차 옛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곧 이사를 하고 직장도 바꾸었다. 6개월 후에 그녀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행복해지고 자신감이 넘쳤다. 그녀는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알과 헤어진 '시련'을 더 없는 행운으로 여기고 있다. 
프레드는 직장에서 해고당했다. 일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생전 처음 그는 사장이 되고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 아직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삶은 시련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미와 기대감으로 충만해 있다. 
인생은 고통스러운 시련의 연속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넌지시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 신호를 무시하면 쇠망치로 얻어맞게 되는 것이다. 
시련을 단지 저항해야만 하는 그 무엇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성숙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삶은 끊임없는 교훈을 제공한다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아기가 에이즈에 걸려서 태어나고, 젊은 엄마가 강도의 총에 쓰러지고, 마을 전체가 홍수로 떠내려가면 우리는 '왜'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들에는 해답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일상 생활'이라는 영역에서는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어떤 일들은 어떤 사람에게만 일어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루이스는 6개월마다 직장에서 해고되고, 프랭크는 거의 해마다 고소를 당하며, 짐은 휴가를 가기만 하면 식중독에 걸린다. 
또 어떤 일들은 어떤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짐은 직장에서 쫓겨난 적이 없고, 루이스는 법원에 가 보지 않았으며, 프랭크는 병원에서 엽서를 보내지는 않는다. 
사람에 따라 저마다 특정한 교훈을 배운다. 우리가 세상일에 대처하는 방식은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자. 
* '나는 항상 내 인생에 필요한 교훈들을 완벽하게 적시적소에서 얻게 된다.' (최대한의 마음의 평화를 보장하는 가장 건전한 사고방식) 
* '인생은 일종의 제비뽑기나 다름없지만, 나에게 돌아오는 것을 최선으로 여긴다.' (평균 정도의 삶을 사는 차선책) 
* '어째서 나쁜 일들은 항상 나에게 일어나는가?' (극단적인 비탄과 좌절을 초래하는 사고방식) 
우리는 끊임없이 삶의 교훈과 맞닥뜨리고 있다. 
우리가 그 교훈을 배우지 않는 한 계속해서 거기에 부딪히고 또 부딪힌다. 
신의 섭리라고 말할 수도 있고 자연적인 세상사라고 할 수도 있는 교훈들이 우리에게 일어난다. 좋건 싫건 간에 일어나고 있다. 책임을 지건 회피를 하건, 거기에 맞서 싸우건 무시해 버리건 어쩔 수 없이 일어난다. 
평생을 두고 일어난다. 이웃이 우리를 욕할 때마다, 세일즈맨에게 사기를 당할 때마다, 연인에게 버림을 받을 때마다 거기에는 눈앞에 빤히 보이는 교훈이 있다. 만일 우리가 일주일 내내 절망감을 느낀다면 어떤 교훈을 놓쳐 버렸기 때문일 수가 있다. 만일 계속해서 직장과 연인과 돈을 잃고 있다면 거기에는 분명 주의해서 보아야 하는 어떤 신호가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느 부인이 말했듯이 '언제나 똑같은 문제점을 계속해서 다른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고 지낸다." 
기껏해야 억울하다고 투덜댈 뿐이다. 
한 마디 더 
우리는 벌을 받으며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배우면서 살고 있다. 모든 일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시련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일에 어떤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도 목적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해야 했던 이유를 깨닫고 그것을 정복한다면, 다시는 그런 경험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 말고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우리는 대체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을 나중으로 미루고 싶어한다. 어머니와의 불편한 관계를 생각하면서 '엄마의 지긋지긋한 잔소리를 생각하면 엄마를 사랑하는 일만 아니라면 다른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아마도 거의 모든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그 일을 하는 것만 빼고, 그것이 바로 교훈이다. 성숙이란 그러한 새로운 땅을 개간하는 일이다. 
이혼한 전남편이 끝내 속을 썩인다 
이혼을 한다고 해서 상대방과 함께 하는 수업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결혼 생활을 끝장낸다고 해도 두 사람은 여전히 자신의 불행과 재산 문제로 서로를 비난하면서 계속해서 걸고넘어진다. 서로가 연결되고 있는 이유는 두 사람이 배워야 하는 것이 더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은 쓸모 없는 인간이에요. 그를 용서하는 것 말고는 무슨 일이라도 하겠어요.'라고 말한다면, 나에게는 아마도 그를 용서하는 일이 가장 어렵고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것을 연습하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 중이다. 그 수업을 연기할 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삶(그리고 건강)을 향상시키고 싶다면 언젠가는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고 믿는 한 그 믿음은 진실이 된다. 내가 행복으로 가는 길을 그가 막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가로막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상관은 위선자다.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그는 비굴한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경우 내가 깨달아야 하는 교훈은 무엇인가? 
내가 그를 누구나 다 아는 위선자라고 확신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는 위선자다. 그를 위선자라고 생각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변화시킨다면, 즉 그의 장점에 관심을 돌리고 그를 비판하는 걸 멈추고 어느 정도 이해하려 한다면 그러한 문제는 증발해 버릴 것이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까?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 그가 나의 태도 변화에 대응해서 마음을 열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 그가 다른 부서로 옮겨갈 수도 있다. 
* 내가 다른 직장으로 갈 수도 있다. 
* 그가 다른 직장으로 갈 수도 있다. 
* 나는 그가 좋아질지도 모른다. 
정말이다. 처음에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친구가 되는 일도 종종 있다. 내가 변하면 나의 상황도 따라서 변화한다. 그런 법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따질 필요는 없다. 나의 변화는 내 주변을 바꾸게 된다. 단 나의 변화가 진심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나는 프레드한테 관심 없어. 하지만 그는 진짜 멍청한 녀석이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내가 충분히 변화되지 않는 증거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그것은 자신이 변화하는 시간에 달려 있다. 
어째서 지금 이 직장을 떠나지 못하는가? 떠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위선자 밑에서 일하게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이 대우주의 교과 과정이다. 
새로운 도시에 간다면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텐데 
천만에! 대체로 새로운 출발을 할 가장 좋은 장소는 지금 있는 바로 그곳이다. 프레드는 이웃 사람들 절반에게 빚을 지고 있다. 프레드는 자신에게 말한다. '이사를 가야 할까 보다.' 그러나 이사를 하면서 그는 자신의 사고방식과 습관을 함께 가지고 갈 것이므로 그가 살아가는 모습은 변하지 않는다. 프레드는 도시를 바꾸기는 했지만 같은 상황을 불러들이면서 또 다른 성난 채권자들에게 시달리게 될 것이 뻔하다. 
구두쇠는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도 여전히 구두쇠일 것이다. 프레드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충고는 이것이다. 
"주소를 바꾸기 전에 사고방식부터 바꿀 생각을 하게." 
시련은 세상 끝까지 우리를 쫓아다닌다 
질의 가족은 돈을 불결한 단어로 생각했다. 그녀의 부모는 특별히 쪼들리지 않았지만 그녀는 돈을 달라고 하기가 겁이 났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돈을 나누어주지 않았으므로 온 가족이 돈 때문에 말다툼을 했다. 그녀는 집을 떠나서 바르셀로나에 갔고 돈을 많이 버는 남자와 결혼했으나 그는 그녀에게 한푼도 주지 않았다. 
이처럼 시련은 상황이 바뀌어도 끝나지 않는다. 그 시련으로부터 우리가 교훈을 깨닫지 못하는 한 말이다. 만일 당신도 어딘가로 떠날 궁리를 하고 있다면 이 점을 명심하라. 당신은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에 공항에는 이미 이전과 똑같은 시련이 마중을 나와 있을 것이다. 
만일 티벳에 갈 수 있다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텐데 
어떤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먼 나라를 여행하는 숭고한 꿈을 꾼다. 짐 트렉스는 히말라야로 떠났다. 어느 날 그는 설사병에 시달린 몸으로 먼지 날리는 길모퉁이에 앉아 있었다.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리츠 칼튼 호텔에 가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티벳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티벳에서의 깨달음은 티벳 사람에게나 가능하다. 우리 대부분은 아마도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 근교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움이 화를 부른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거기에 맞서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자신에게 필요한 학습 경험을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에 종종 자신이 두려워하는 경험을 불러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만일 무분별하게 빚을 지게 될까 두려워하면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의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기회가 온다. 만일 고독을 두려워하면 고독을 불러들이게 된다. 만일 실패를 두려워하면 실패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삶이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한 마디 더 
우리는 일종의 경고로 작은 조약돌에 얻어맞는다. 그 조약돌을 무시하면 벽돌로 얻어맞는다. 그 벽돌마저 무시하면 바위에 짓눌리게 된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어디서 그런 경고 신호를 무시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뻔뻔스럽게 말한다. 
"왜 하필 나야?" 
살며 배우며 
인생의 보물을 발견하려면 심연 속으로 깊숙이 내려가는 길밖에 없다. 가다가 넘어지면 그곳에 우리가 찾는 보물이 있다. 우리가 들어가기를 두려워하는 바로 그 동굴에서 원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조셉 캠벨(Joseph Cambell(1904--1987): 미국의 신화학자. 비교문학을 공부한 뒤 세계 각국의 신화를 연구하고 널리 알린 인물이다.) 
삶이 항상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고통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다. 우리는 고통 속에 있기 전까지 태연한 척 가장할 수 있다. 우리의 자존심은 말한다. ‘난 잘 지내고 있어.’ 
세상일이 무척 힘들 때, 예를 들어 충분히 외롭거나, 충분히 두려워지면 우리는 나약해진다. 그러다가 자존심조차 더 이상 대답이 없으면 우리는 마음을 열게 돈다. 고통은 우리를 진실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일은 언제나 좀더 수월하다. 우리는 짐을 보고 말한다. '그에게 파산은 배울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우리는 메리를 보고 말한다. '이혼 덕분에 혼자 자립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다. '시련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자신에게 시련이 닥치면 그다지 신중하지 못하다. '하느님, 이게 웬일입니까? 저에게 수월한 시련을 주시지요.' 불행하게도 진짜 시련은 수월하지 않다. 
내게 인복이 있었더라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게으른 남편과 사고뭉치 아이들만 아니었더라도 내가 인격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을 텐데....' 천만에! 당신의 인격을 성숙하게 해주는 사람은 바로 그들이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스승이다. 코를 골로 찬장 문을 열어 놓은 남편, 배은망덕한 아이들, 길 한복판에 주차하는 이웃들.... 아예 포기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제대로 행동해 준다면 내가 좀 더 행복할 수 있을 텐데.' 
아내 때문에 화가 나는 사람은 분노를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을 찾는다. 그 일을 도와 줄 완벽한 사람은 집안에 있다. 아내가 그 연습 상대가 될 수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이혼할 거야. 그러면 해결되겠지.' 그러나 그 방법은 단지 자신을 똑같이 화나게 만드는 누군가와 결혼한다면 더 이상 효과가 없다. 
한 마디 더 
우리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모두 스승이다. 울화가 치밀게 만드는 사람조차 우리에게 인내심의 한계를 가르쳐 준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리의 스승이라는 말은 그들을 좋아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인생은 사다리와 같다고 할까? 올라가기 위해서는 발을 디뎌야 한다. 그것이 일이거나 인간 관계이거나 돈 문제이거나 간에 일단 발을 디뎌야 다음 위치로 이동하게 된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 단계를 해결한다.  
* '이 사다리는 싫어. 다른 것이었으면 좋겠어....'  
이때는 곤경에 빠진 경우이다. 
* '다른 사람의 사다리는 저렇게 좋은데....' 
이것은 질투이다. 
* '이 사다리는 정말 지긋지긋해. 뛰어 내리겠어.'  
이것을 자살이라고 부른다. 
곤경에 처하는 일이 생기면 자신에게 물어 보라. 
'내가 발을 딛고 올라오지 않은 계단이 어느 것이었지? 
삶은 언제쯤 쉬워질까 
쉬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삶을 좀더 잘 다루는 법을 배울 수는 있다. 일단 이 세상에 태어나면 숨을 쉬고 있는 동안에는 학기가 계속 이어지는 '인생 수업'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는 '일단 유치원, 초등학교, 사춘기만 지나면.... 일단 직장만 잡으면....'이라고 말하면서 그 후에는 삶이 쉬워질 것이라고 계속해서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아무도 경고해 주지 않으니 좌절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멀리서 다른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쉬운 길을 걷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빌은 순조로운 항해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는 은퇴해서 충분한 연금을 받고 있으며, 주택 대출금의 상환은 끝났으며, 근사한 차를 타고 다니고,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해외 여행을 다니며, 골프를 즐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지금 보험회사와 소송 중에 있으며, 지붕은 비가 새고, 그의 아들은 마약을 복용하며, 내일 이맘때쯤 강도가 들어서 비디오 테이프 리코더를 훔쳐갈 것이 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우리 모두는 끊임없는 도전을 받고 있다. 
삶이 쉬워지지 않는 또 다른 이유 
세상일이 너무 쉬우면 우리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낸다. '이런 것쯤은 식은 죽 먹기야. 도전이 필요해.' 삶이 너무 단순해지면 우리는 가정을 꾸민다. 주택 융자금을 다 갚으면 더 큰집을 산다. 우리의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 
이다. 
미쳐 버리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방법이 있다. 
* '이만큼 할 때까지는 쉬면서 즐길 여유가 없다'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말라. 어떤 와중에서도 쉬면서 즐겨야 한다. 
*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라. '이 일에서 내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날 그날에서 보람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행복을 저 멀리 보이는 신기루처럼 생각한다. 지금은 사막을 기어가고 있으며 앞쪽에는 '행복'이라고 씌어진 푯말이 있기라도 한 듯 이렇게 말한다. 
'거기 도착만 하면 행복해질 거야.' 
그리고 머리속으로 계산을 한다. 
'지금은 욕실을 개조하고 있으니 편안할 수가 없어. 하지만 다음달이면 나아질 거야.' 
그런데 다음 달에는 아이들이 독감에 걸리고, 고양이가 발정을 하고, 친척이 와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다시 말한다. 
'돌아오는 4월쯤이면 나아질 거야.' 
다른 사람에게 교훈을 주겠다? 
어떤 책을 읽고 흥분한 적이 있었는가? 그랬다면 그 책을 친구에게 주면서 말할 것이다. 
'이걸 읽어 봐. 정말 환상적이야!' 
그러고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서 그가 열광적인 목소리로 전화해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결코 그런 전화는 오지 않는다. 
6개월이 지난 후에 책을 돌려 달라고 했을 때 친구가 그 책을 읽지도 않았거나, 혹은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의 교훈은? 책뿐 아니라 어떤 우정어린 충고라 할지라도 자신이 어떤 지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준비되어 있을 거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 더 
사람들이 물어 보지 않는다면 대체로 알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지금 여기서 나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지금 이 순간까지 자신이 살아온 길을 돌아다보면, 아마도 왜 그러한 길을 걸어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스쳐 지나간 사람들, 스승들, 연인들,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까지 그들 모두가 우리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헌책방에서 발견한 책 한 권이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켰을 수도 있다. 실연, 질병, 실패, 그리고 경제적인 위기와 같은 '사건'들이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 주고 동정심을 가르쳐 주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인생에는 '시련'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차례차례 일련의 교훈들을 배워 왔다는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한 가지 일이 항상 또 다른 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시련 속에서 장기적인 전망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시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체하는 동안 우리는 자신에게 말한다. '이건 각본과는 다릅니다. 미안하지만, 하느님, 당신은 큰 실수를 저지르신 거예요.' 직장에서 쫓겨난 일이 실제로 어떤 계획의 일부인지를 이해하려면 적어도 6개월은 걸린다. 
세상은 환자이자 완고한 스승이다. 그가 보내는 신호를 주의해서 지켜보면 인생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된다. 그러나 핸들을 잡은 채 잠이 들면 콰당, 중대한 학습 경험을 불러들이게 된다. 파산, 이혼, 심장병 등등. 
프레드는 항의할지도 모른다. '인생에는 정해진 길은 없습니다. 모두가 어쩌다 보니 거기에 있게 된 거죠'라고. 그러나 좀더 찬찬히 살펴보면 자신을 위해 준비된 교과 과정을 보게 될 것이다. 
다음에 닥쳐올 교훈은 어디에 있는가 

그 교훈은 대체로 우리 코앞에 있으며, 우리는 종종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눈앞에 사라져 버리기만 바라고 있다. 

 

제2장 세상의 법칙 
 
성공과 행복은 전적으로 자연 법칙을 따른다. 따라서 성공과 행복은 우리가 법칙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씨앗의 법칙 
보편적인 법칙 
옛날에는 성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면 씨앗을 뿌리고 물을 긷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 시절에는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낚시하는 법을 알고 있었으므로 계절과 수확과 물고기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가 양치기이거나 컴퓨터 프로그래머이거나 같은 법칙이 적용된다.  
씨앗의 법칙 
나의 첫 책이 된 'BEING HAPPY!'에는 자연의 법칙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 있다. 이 장을 그러한 원칙 위에서 전개하려고 한다. 자, 그럼 씨앗의 법칙부터 시작해 보자. 
씨앗의 교훈은, '수확을 거두려면 일을 하라'는 것이다. 흙을 파고 씨앗에 물을 주고(노력) 한동안 기다렸다가(인내) 그러고 나서 열매를 따는 것이다. 노력+인내=결과 
사람들은 종종 이 법칙을 잊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오늘 콩을 심으면 내일 무엇이 돌아올까?" 
그 대답은, '젖은 콩'이다. 씨앗의 법칙은 말한다. '오늘 심고, 한참 후에 거두어라.' 지금 콩을 심으면 넉 달 후에 콩을 따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자급자족할 때는 아마도 이 개념을 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인스턴트 라면의 시대이다. 
프레드는 말한다. 
"괜찮은 직장만 있다면 정말 열심히 일하겠어. 하지만 겨우 접시나 닦고 있으니, 제기랄.: 
천만에, 프레드! 만일 자네가 마을에서 최고의 접시 닦기가 된다면 누군가의 눈에 띄거나, 승진을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언젠가는 정말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길 걸세. 
첫째가 노력이고 그 다음이 수확이다. 그것이 원칙이다. 그 과정을 거꾸로 갈 수는 없다. 메리는 말한다. 
"승진만 시켜 주면 잠도 안 자고 일을 하겠어." 
프랭크는 말한다. 
"월급을 올려 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 
제인은 말한다. 
"결혼만 잘한다면 남편에게 잘할 텐데." 
신용카드와 우편 주문 카다로그는 지금 구입하면 2개월까지는 이자가 없으며 3개월째에는 파산하라고 부추긴다. 똑같은 원리이긴 하지만, 먼저 사고 나중에 지불하는 것보다는 먼저 벌고 나중에 지불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우리는 정원에서 또 다른 교훈을 배운다. 열두 개의 콩을 심는다고 해서 열두 그루의 콩 나무를 수확하는 것이 아니다. 프레드는 콩 씨앗을 심는다. 어떤 것은 말라죽는다. 어떤 것은 바람에 날아가 버린다. 해충이 몇 그루를 망친다. 새들이 서너 그루를 먹어 치운다. 결국 작은 콩 나무 두 그루밖에 남지 않자 프레드는 말한다. 
"억울합니다!" 
그것이 인생이다. 
몇 명의 좋은 친구를 가질 때까지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이상적인 종업원을 발견하기 위해 50명을 면접한다. 몇 명의 단골 손님을 잡을 때까지 100명에게 서비스한다. 완벽한 스파게티를 먹어 볼 때까지 수많은 레스토랑을 전전한다. 
어떤 아이디어나 직원, 그리고 친구들조차 대부분 바람에 날려 가거나 새에게 먹힐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이해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가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인과응보 
만일 인생이 지지부진하다면 지금 자신이 어떤 식으로 살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새벽에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공부를 하고, 사람들을 사귀면서 최대한으로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내 인생에는 좋은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군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우리의 인생은 에너지 장치와 같다.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다. 인생은 우리가 투자한 것만큼 돌려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더 이상 자신이 희생자로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보면서 말한다. 
'인과 법칙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랄프가 승진을 하면 우리는 말한다. 
'그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어?' 
이웃이 행복한 결혼 40주년을 기념하며 축하 행사를 벌이면 우리는 말한다. 
'저 사람들은 운도 좋군.' 
남의 일이 뜻밖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인과 법칙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작용한다. 
우리는 살면서 주는 것만큼 받는다. 부루스는 다이아몬드와 향수로 여자들을 황홀하게 한다. 그러다가 여자들이 떠날 때 그는 자신이 쓴 돈을 청구한다. 다이아몬드를 미끼로 낚시를 하면 다이아몬드 정도의 물고기는 낚아야 하지 않겠는가. 전혀 엉뚱한 요구는 아니지. 
웬디는 가슴이 훤히 파인 옷을 입고 마을을 휩쓸고 다닌다. 그러면서 남자들이 자신의 육체만을 원한다고 화를 낸다. 남자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드러낸 가슴을 놓치지 않는 법이다. 뭐가 이상한가? 
한 마디 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여태까지 우리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을 거의 다 열거할 수 있고, 어떻게 해서 스스로 그런 일을 자초하게 되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우주의 법칙이 이웃에게 적용되고 있는지에 신경쓸 것 없다. 자신의 인생, 즉 인간 관계, 성공, 실패 등에서 인과응보의 법칙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좀더 마음이 평온해질 수 있다. 
게임은 잘할수록 점점 더 어려워진다 
우리는 작은 게임에서 성공하면 더 큰 게임을 하고, 또 그보다 더 큰 게임을 하게 된다. 학교에 들어가면 1학년부터 시작한다. 다음에는 2학년 3학년.... 계속 올라간다. 그 효율적 체계의 법칙은 '잘할수록 게임은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길을 걷다가 어디에선가 이러한 법칙에서 벗어난다. 프랭크는 자동차 할부금을 갚기 위해 애쓰고 있다. 20년 동안 일해서 그는 정확히 87센트를 저축했다. 그는 말한다. 
"백만 달러만 있다면 그 돈을 잘 관리할 텐데." 
천만에! 프랭크, 자네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10달러를 저축하는 일이라네. 백 달러가 천 달러가 되고, 그러다 보면 머지않아 백만 달러가 될 테니까. 
캔디는 변두리 술집에서 노래하는 가수인데 스타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그녀는 말 한다. 
"청중이 천 명만 된다면 진짜 쇼를 보여 주겠어요. 하지만 여섯 명의 인생 패배자들 앞에서 내가 내 재능을 낭비할 거라고는 꿈도 꾸지 마세요." 
캔디가 여섯 명을 위해 멋진 쇼를 할 수 있다면 청중은 열두 명이 되고, 백 명이 되고, 그리고 언젠가는 천 명을 채우게 될 것이다. 
짐은 작은 사무실에서 보험 상품을 팔고 있다. 그는 직원 한 명을 두고 있는데 그나마 해고할 생각이다. 짐은 말한다. 
"유능한 직원이 열두 명만 있다면...." 
그게 아닐세, 짐! 우선 둘이 한 팀이 되어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결코 열두 명의 팀을 만들 수 없다네. 
인생은 서서히 발전한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지금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그 대답이 '별로 하는 것이 없다'라면 앞으로도 나아질 수 없다. 
한 마디 더 
세상은 변명이 아닌 노력에 대해 보상한다. 
하나가 또 하나를 낳는다 
세상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면 나는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궁금하게 생각하곤 했다. '저들의 인생은 어찌 저리도 달콤할까?' 나는 그들이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시작이 무언가 다른 것으로, 그리고 또 다른 것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때로 지나치게 까다로운 선택이 실수가 될 수 있다. 일자리를 소개하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이 아니다'라고 따지면서 거절할지도 모른다. 만일 지금 당장에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다면 우선 그 일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 하나가 또 하나로 이어지는 과정을 지켜 보라. 만일 무언가 큰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우선 작은 일에 뛰어들어라. 
젊은 사업가인 존 맥코막은 그의 친구인 닉이 미국에서 첫 일자리를 구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닉은 빈털터리에 영어도 하지 못했으므로 어느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접시 닦기 일을 지원했다. 그는 사장과 면접을 하기 전에 레스토랑 화장실로 들어가서 그곳을 깨끗이 청소했다. 그리고 나서 칫솔을 가져다가 타일 틈새마다 얼룩 한 점 없이 닦아냈다. 닉과 인터뷰를 할 때 사장은 '화장실이 어떻게 된 거지'라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닉은 '접시 닦는 일을 열심히 하겠다'는 의사 표현을 행동으로 보여 준 것이었다. 
닉은 채용이 되었다. 일주일 후에 샐러드 담당이 그만두자 닉에게 요리사가 되는 길이 열렸다. 사람들이 '일자리가 없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닉과 그의 칫솔을 생각한다. 
한 마디 더 
어디에서라도 좋으니 시작하라. 자기 앞에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기회가 두리번거리며 찾아올 것이다. 그것을 평판을 쌓는다고 한다. 또 그것을 '하나가 또 하나를 낳는다'고 한다. 
개구리 법칙 
개구리와 물통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우화이다. 그 이야기는 퇴행의 법칙을 보여 준다. 
만일 똑똑하고 행복한 개구리를 잡아서 물이 끓고 있는 통 속에 넣으면 어떻게 될까? 튀어나올 것이다. 개구리는 즉각 판단한다. 
'여긴 재미없네. 난, 간다.' 
만일 같은 개구리, 아니면 그 비슷한 녀석을 찬물이 들어 있는 통 속에 넣은 다음 다 통을 불 위에 올려놓고 서서히 데우면 어떻게 될까? 개구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느긋하게 쉬고 있다가 몇 분 후에 생각한다. 
'왠지 이 안이 너무 더운 것 같은데.' 
얼마 안 가 개구리 요리가 된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인생은 서서히 진행된다. 개구리처럼 속고 있다가 갑자기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고 만다.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만일 당신은 내일 잠에서 깨어나 20킬로그램이 늘어난 것을 알았다면 걱정할 것인가?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허겁지겁 병원으로 전화를 할 것이다. 
'큰일났어요. 살이 쪘다고요.' 
하지만 이번 달에 1킬로그램, 다음달에 1킬로그램 서서히 증가하면 우리는 그냥 내버려둔다. 
하루 예산에서 10달러를 초과 지출하면 별로 큰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내일도,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하면 결국 파산하고 만다. 파산하고, 살이 찌고, 이혼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보통 갑작스러운 재난이 아니다. 오늘 조금, 내일 조금, 그러다가 어느 날 '콰당'하고 부딪히면 그들은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인생은 누적된다. 물방울이 떨어져서 바위를 뚫듯이 하나에 또 하나가 추가된다. 개구리 법칙은 우리에게 그러한 경향을 조심하라고 귀띔해 준다. 매일 자신에게 물어 보자. 
"나는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작년보다 날씬해지고 건강하고 행복하고 더 풍족한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변화가 필요하다. 
무서운 사실은 정지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얻는 것이 없다면 잃고 있는 것이다. 
자기 훈련을 하라 
내키지 않는 작은 일들을 훈련하다 보면 언젠가 자신이 하고 싶은 큰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 
훈련이란 모든 사람이 달가워하지 않는 말이다. 인기도로 치자면 치과와 설사병의 중간쯤 될 것이다. 그러나 자기 훈련은 커다란 차이를 만든다. 인생은 당장의 즐거움이냐 장기적인 보상이냐를 선택하는 거래이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에 공부를 하는 작은 일이 자질 향상이라는 큰일로 이어진다. 일주일에 세 번씩 체육관에 가는 작은 일이 건강한 생활이라는 큰일로 이어진다. 하루 20달러를 술로 날려 버리는 대신 그 돈을 저축하는 작은 일이 아파트를 장만하는 큰일로 이어진다. 
자기 훈련의 열쇠는 강철같은 의지력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무언가를 왜 원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이다. 만일 더 이상 빚을 지고 싶지 않은 진정한 이유를 안다면 저축하기가 좀 더 쉬워진다. 만일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분명한 이유를 안다면 공부하기가 좀 더 쉬워진다. 
자기 훈련이 되면 다른 곳에서 훈련을 받을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 가면 아무도 이러쿵저러쿵 잔소리하지 않는다. 
우리가 스스로 훈련을 하지 않으면 외부로부터 훈련을 받게 된다. 자기 훈련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종종 떡을 손에 쥐어 주어도 못 먹는 수가 있다. 자기 훈련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감금해 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먼저 질서와 체계를 갖춰라 
첫 번째 확장의 법칙은 '질서'이다. 무언가가 성장하려면 체계가 필요하다. 
꽃잎, 반으로 자른 오렌지, 나무나 벌집 등에서 우리는 대칭 모양을 발견한다.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본질을 보존하고 쓰레기는 버린다. 그것을 체계라고 한다. 사업을 성장시키려면 어떤 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인생을 꽃피우려면 그 속에 어떤 질서가 필요하다.  
프레드는 말한다. 
"내 사무실은 뒤죽박죽이지만 거기에도 어떤 체계가 있지. 사실은 대단히 능률적이라네." 
정말 그럴까? 프레드가 뇌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실로 들어갔을 때, 주사 바늘과 붕대와 빈 병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는 가운데 서 있는 의료진을 발견하는 상상을 해보자. 수술의가 발한다. 
"안심하십시오, 프레드. 여긴 엉망이지만 우리는 완벽하게 일합니다." 
임무 수행이 중요한 곳이라면 어디에든 체계가 있다. 소방대원들은 자신의 헬멧이 있는 장소를 알고 있으며, 구급차 기사는 자동차 열쇠를 두는 장소를 정해 놓는다. 
뒤죽박죽 속에서는 아무 것도 꽃을 피울 수 없다. 파일 캐비닛을 정리하라. 창고를 청소하라. 
그러면 무언가 달라질 것이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고 한다. 우리의 주변 환경은 우리 자신의 사고 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보통 집이 엉망이면 그 사람의 인생도 엉망이다. 
쓸데없는 노력은 없다 
영하 50도에서 얼린 얼음 덩어리를 꺼내 열을 가해 보자. 얼마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많은 열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 0도가 되자 갑자기 얼음이 녹는다. 물이다. 
계속해서 열을 가해 보자. 역시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지만 아무 반응이 없다. 그러다가 100도에 가까워지면 기포가 생기고 수증기가 올라온다. 끓기 시작한다. 
법칙?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힘을 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얼음 덩어리, 어떤 계획, 일에 대한 진전, 그러나 한동안 아무 반응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이미 그 에너지로 인해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다. 계속해서 에너지를 투입하면, 분명 어떤 눈에 보이는 변화가 생길 것이다. 이 법칙을 기억하고 너무 허둥대지 말고, 자포자기하지 말라. 
나는 인생을 핀볼게임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매순간 나는 어떤 노력을 한다. 책상을 정리하고, 글을 쓰고, 친구를 돕고, 그림 연습을 하고, 청구서를 지불하고, 시도하고 실패하면서 득점 기록을 올리고 있다. 나는 내가 하는 모든 노력을 나의 '보편적인 신용도'에 추가한다고 생각한다. 다음 번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득점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런 사실은 지금 당장 결과를 요구하는 것보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좀 더 즐길 수 있게 해준다. 그러다가 보통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가끔씩 신나는 일이 생긴다. 새로운 기회, 초대장, 송금 수표가 날아온다. 
파도타기 
인생은 파도를 타는 것과 같다. 음파, 광파, 뇌파, 극초단파 등과 같은 과학적 용어를 제외한 다른 파도는 우리에게 모든 일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가족 문제, 청첩장, 자동차 수리 등이 한꺼번에 밀어닥친다. 그러니 미리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한 달 동안 청구서가 날아오지 않으면 다음에 밀려올 파도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 또한 파도에 휩쓸리면 '이럴 줄 알고 있었어. 곧 지나가겠지'라고 생각하자. 
적자생존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계절이 오고 가고,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고, 물가가 오르내리고, 사람들은 취직하고 해고당하고.... 우주의 근본 법칙은 변화라는 것을 배우도록 하라. 아니면 화가 치밀 때가 있을 테니까.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우리는 변화에 적응하는 적자생존의 법칙을 공부한다. 예를 들어, 만일 내가 황톳빛 들판에 사는 초록색 벌레라면 피부색을 바꾸지 않으면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항의할 수 있다. 
"들판은 초록색이어야 합니다. 보통 다 초록색이잖아요?" 
그러나 얼마 안 가 벌레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법칙은 잔인하다. '적응하지 않으려면 사라져라.' 생물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 
"명심해라. 이것이 인생의 교훈이다. 적응해야 한다.' 
단체 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변화하며 전문가들이 하는 말도 틀릴 수 있다.  
1927년 워너 브라더스 영화제작사의 해리 워너는 말했다. 
"세상에 배우들이 말하는 걸 누가 듣고 싶어 하겠어?" 
1943년 IBM의 회장인 토마스 왓슨은 말했다. 
"컴퓨터를 세계 시장에 내놓으면 다섯 대나 팔릴까?" 
1977년 디지털 설비 회사의 회사인 켄 올슨은 말했다. 
"집안에 컴퓨터를 갖고 있을 이유가 어디 있겠나?" 
오늘 사실이라고 해서 내일도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늘 잘된다고 해서 내일도 잘되리라는 법은 없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만일 석 달 동안 집을 떠나 있다가 돌아오면 아이들이 변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젖먹이가 갑자기 '아빠' 하고 부른다. 이런 일들은 공평한지 아닌지를 따질 문제가 아니다. 모든 것은 움직이고 있다. 
한 마디 더 
행복한 사람들은 변화를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껴안는다. 그들은 말한다. 
"시한부 인생처럼 삶을 마감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 
제3장 믿음 
 
세상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따라서 변화될 수 있다. 
우리가 항상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일은 바로 그 믿음대로 이루어진다. - 프랭크 라이트(Frank Wright(1869--1959): 미국의 건축가. 시카고파의 대표적인 인물. 윈슬로 저택, 라킨 빌딩, 유니티 전당, 구겐하임 박물관, 동경제국 호텔 등이 대표적인 건물이다.) 
사람들은 '내가 할 수 없는 이유....' 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이야기한다. 흔히들 '그건 내 방식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변명을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그건 내가 방식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물고기를 관찰해 보면 우리의 믿음에 대해 뭔가를 알 수 있다(다음은 우즈 홀 해양 연구소에서 관찰한 실험이다). 
수족관에 들어가자. 그 가운데 투명한 유리벽을 설치해서 반으로 나누면 이제 일종의 이중 수족관이 된다. 이제 자신을 바라쿠다(열대, 아열대산의 육식성 바닷고기 - 옮긴이)로 생각하고 그 이름을 배리라고 한자. 그리고 숭어 한 마리가 있다(바라쿠다는 숭어를 먹는다). 양쪽에 한 마리씩 넣는다. 순식간에 배리는 숭어를 향해 돌진해서 '쾅' 전속력으로 유리벽을 들이받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 또 한 번 꽝! 
그렇게 몇 주일이 지나자 배리는 코가 몹시 시큰거린다. 마침내 그는 숭어 사냥이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고 쫓아가기를 그만둔다. 
그때 유리벽을 치우면 어떻게 될까? 배리는 물탱크 한쪽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며 남은 여생을 보낸다. 숭어가 바로 코앞에서 헤엄치고 있는데도 그는 기꺼이 굶어 죽는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거기서 나오지 않는다. 
배리의 이야기에 동정심이 간다고? 사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유리판에 달려들지 않는다. 교사들과 부모들과 친구들이 내 적성에 맞고 내가 할 수 있다고 말해 주는 일에만 달려든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자신의 믿음에 달려든다. 믿음이 정해 놓은 영역에 갇혀서 그 밖으로 나서려 하지 않는다. 
바라쿠다 배리는 말한다. 
"한때 최선을 다해서 달려든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제자리에서만 맴돌고 있어." 
우리는 말한다. 
"전에는 한때 공부, 결혼, 일에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는 자신이 만든 유리 상자에 갇혀서 그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것은 그렇게 우리가 믿는 것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에 얼마나 매달리는지 알고 싶다면, 저녁 모임에 참석해서 종교나 정치 이야기를 꺼내 보라. 
그래도 내 말이 맞다니까. 
정말 신기한 일이다. 우리 모두가 세상에 대해 서로 다르게 믿고 있으면서 모두 자신이 믿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모두들 자기 생각이 맞다고 생각한다. 프레드는 인생은 고난이며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주일에 70시간을 일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는 신문에 난 구인 광고를 훑어보다가 가까운 근교에서 직원을 구하는 광고를 본다. '근무 시간 자유, 신나는 여행 기회, 회사 자동차 제공, 최고의 보수.' 프레드는 말한다. 
"믿기지가 않아....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 
프레드는 계속 찾아본다. 그는 또 다른 광고를 발견한다. 이번에는 시내를 가로질러 두 시간을 가야 하는 직장이다. 자동차도 주지 않고, 근무 시간도 길고, 보수도 형편없다. 프레드는 말한다. 
"한번 자세히 알아볼 만하겠어.: 
그는 면접을 보러 간다. 상관이 말한다.  
"우리 상품은 형편없고, 고객들은 우리를 미워하고, 소유주는 악질이라네. 여기서 일하겠다면 자넨 미친놈이야." 
프레드가 대답한다.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죠?" 
프레드는 인생에 대한 자신의 이론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불행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살에 대해서는 행복하다. 
우리가 성장하는 동안 교사, 부모, 친구들은 이야기한다. '너는 수확에는 전혀 가망이 없어. 노랫소리는 참을 수가 없고, 그림은 소질이 없어.' 그들은 말한다. '인생은 고난이야. 언제나 쪼들리면서 정부를 비난하고... 그게 인생이지. 그렇게 살수밖에.'  
그래서 우리는 마치 그 각본대로 연기를 하듯이 살아간다. 그 각본이 삶을 망칠지라도 우리는 그대로 믿는다. 
프레드에게 그가 40년간 인정해 왔던 무언가를 '믿지 말라'고 하면 그는 아마 매우 화를 낼 것이다. 
"나는 내 믿음대로 40년 동안 불행하게 살아왔네. 이제 와서 그걸 포기하라는 건가? 내 자신이 이렇게 엉망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시인하라고?" 
우리 대부분은 행복해지기보다는 자신의 믿음이 맞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내가 가진 사연은 
우리 대부분은 각자 '사연'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름표를 붙인다. '나는 학교 교사예요.' '나는 할머니요.' '나는 신세대죠.'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연은 양쪽 귀에 매달아 놓은 일종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처럼 우리의 삶을 조정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신상명세서이다. 우리는 그것을 휴대하고 일터에 가고 휴가를 간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는 그것을 내민다. '나는 이혼한 사람이오.' '나는 학대를 받고 있어요.' '나는 도를 닦고 있소.' 우리는 자신의 사연에 맞추려고 노력하면서 인생을 허비한다. 그 사연에 맞춰서 자동차와 옷을 사고 친구를 선택한다. 
짐은 의사이다. 그는 자신에게 말한다. 
"나는 의사처럼 행동하고 의사처럼 말해야 해. 나에게는 의사가 살 만한 집이 필요하고 의사가 즐길 만한 취미가 필요해." 
자신의 역할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가련한 짐의 인생은 강아지 비스킷처럼 무미건조하다. 
자신의 '사연'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만일 내가 자신을 '나는 학교 교사이다'라고 규정해 놓았다면, 직장을 잃었을 경우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또한 만일 '나는 이 집의 완벽한 안주인이다'라고 자신을 규정한다면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완벽한 일은 없으며, 이웃에게 식사대접을 하려고 상을 차리다가 간장 종지 하나라도 빼놓게 되면 절망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사연으로 자신을 제한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남들은 그런 사연 따위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범주에 속하거나 상자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연속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 인간이다. 우리가 자신의 사연을 끌고 돌아다니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에 맞는 임무'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스웨덴인 친구인 안나와 퍼에릭을 생각하고 있다. 70대 초반이나 80대 초반 정도 된 그들은 아직도 세계를 여행한다. 퍼에릭은 손자의 롤러 블레이드를 타고 인터넷을 항해한다. 안나는 즐겨 새벽 4시까지 춤을 춘다. 그들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대신 그들은 활기에 차 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나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그만한 대접을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부유함과 학벌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되기를 바라는 동안에는 고통스러울 따름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복이 다른 사람들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존재'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자. 그건 일종의 스트레스이다. '중요한 존재'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자. 그건 일종의 스트레스이다. '중요한' 인물이 될 필요가 없는 순간부터 우리는 편해질 수 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더 많은 존경을 받을 수 있다.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오. (일등칸을 타고 여행하는 사람, 스킨 스쿠버를 하는 사람, 극장에 가는 사람, 정장을 입는 사람, 생선회를 먹는 사람 등등)." 
우리는 '나는 절대' 또는 '난 언제나'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상자 안에 가두어 두지만, 그것은 자신이 말하는 사연에 불과하다. 또 다른 종류의 사연도 있다. '나는 아주 예민해서 짜증이 납니다.' '나는 현실적인 사람이오.' '나는 사수 자리에 태어났기 때문에 항상....' 
"나는 이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67세에 처음 책을 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68세에 돌아가셨고 그 책을 끝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떤 출발을 했고, 그 일로 좀더 행복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배우고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해야 한다. 만일 책을 쓰거나 집을 짓거나 사업을 하다가 다 끝내지 못하고 도중에 버스에 치였다고 해서 공연한 짓을 했다고 후회하면서 죽겠는가? 
한 마디 더 
자신에게 물어 보자. 
"나에게 아무런 사연이 없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우리가 가진 믿음 중에서 어떤 것을 버려야 할까 
우리를 가난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믿음을 제거해야 한다. 도움이 되지 않는 믿음은 폐기하자. 그 믿음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우선 '해야 한다'라는 말이 들어가는 믿음을 조심하자. 
* 사람들은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 사람들은 나의 장점을 칭찬해야 한다. 내가 일을 잘한다는 것을 남편이 알아주어야 한다. 
* 사람들은 사랑에 응답해야 한다. 
* 사람들은 좀 더 이해심을 가져야 한다. 
* 사람들은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해야 한다 목록'은 합리적인 기대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믿음을 버린다면? 만일 사람들이 나에게 동조할 필요가 없고, 은혜를 갚지 않아도 되고, 내가 잘한 일을 칭찬하지 않아도 되고, 나에게 사랑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면? 그렇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그렇다고 칭찬이나 인사를 덜 받게 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사람들이 내 기대에 어긋난다고 해도 나는 즐거울 수 있다. 
'해야 한다'는 믿음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은 그런 믿음과는 상관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냉정하다. 현실을 비난하면 언제나 현실이 이긴다. 
믿음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아버지들은 아이들을 칭찬하고 많은 선물을 사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하자. 나의 아버지가 그렇지 않으면 나는 화가 난다. 그래서 아버지를 바꾸고 싶어진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믿음을 바꾸려고 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이 항의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믿는 것 아닌가요?" 
아니다. 그렇게 믿지 않기 때문에 더 행복한 사람들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 주기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좀더 마음이 평온하다. 
세상일을 다르게 보기 위해서는 의지력, 자신감, 또는 뇌수술 등이 필요한 게 아니다. 단지 익숙한 생각을 그만둘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음 번에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기억하자. 화가 나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이라는 것을. 무엇이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생각은 단지 자신의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그런 생각들을 바꿀 수 있다. 
문제는 직업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직업에 대해 불평할 때 대체로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내가 일이 지루하다고 말할 때는 나는 그 말과 한 쌍을 이루는 '일이 지루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내가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직장에 지원한다고 해도 그 직장에서는 나를 지루한 사람으로 보고 채용하지 않거나, 채용이 된다 해도 나 자신이 그 일을 지루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반대로 '일이 재미있다'고 믿는다고 하자. 그런데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을 하고 있다면 언젠가 이렇게 말할 날이 올 것이다. 
"이 일은 내 사기를 저하시키고 나의 믿음과 전혀 맞지 않는다. 하루라도 더 여기에 있을 수 없다." 
결국 나의 기본적인 믿음이 좀더 나은 일을 찾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다.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믿음이다. 
돈 벌기 
돈벌이가 충분치 않다 
메리는 말한다. 
"당신은 이해 못해요. 문제는 나의 믿음이 아니라고요. 문제는 내 직업이에요. 내가 하는 일로는 돈을 벌 수가 없어요." 
그런데 메리, 당신은 왜 그 일을 하고 있나요? 메리가 말한다. 
"이것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자, 믿음을 바꿔 보세요. 새로운 직장을 구하거나, 시간제 일을 하거나, 돈을 재투자해 보거나, 좀 더 기술을 익히거나, 열심히 일해서 승진해 보는 건 어때요? 메리가 말한다.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아요. 신문에 그렇게 나온다고요." 
그것 또한 당신이 믿는 거예요, 메리. 만일 신문을 믿지 않아도 된다면 어떨까요? 성공하기 위한 자질에는, 이웃이나 신문이 무슨 소리를 하건 간에 자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포함된다. 
하지만 난 월급쟁이라서 
월급쟁이건 아니건 우리가 어느 정도 성공하느냐는 우리의 믿음에 의해 좌우된다. 같은 회상에 다니면서 같은 월급을 받는 여덟 사람을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은 저축도 하고 풍족하게 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샌드위치를 사기 위해 은행 대출을 받아야 한다. 그 차이는 그들이 버는 돈이 아니라 그들이 돈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에 있다. 
만일 내게 필요한 돈이 없다거나, 점점 더 쪼들리고 있다면 거기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 있다. 
믿음이 어떻게 성공을 좌우하는지 확실하게 보여 주는 실례로는 복권 당첨자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돈이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복권에 당첨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뜻밖의 횡재를 하고 나서 두 해만 지나면 그 수표를 받기 전보다 더 많은 빚더미에 올라앉는다. 왜? '나는 언제나 빈털터리야'라고 말하는 믿음이 순식간에 백만 달러를 삼켜 버리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는 호주의 브리스반에서 텔레비전을 켰다가 방금 두 번째 복권에 당첨된 사람을 보았다. 인터뷰에서 그가 말했다. 
"저는 지금 생활보호 대상자이기 때문에 130만 달러를 요긴하게 쓸 것 같습니다." 
그 남자는 불과 2년 전에 복권을 탄 사람이었다. 
우리의 예금 잔고는 항상 자신의 믿음 체계와 맞아떨어진다. 만일 자신의 이미지가 예금 잔고와 어울리지 않는다면 그 수치가 변할 가능성이 좀더 많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인생을 조절하는 것은 외부적인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에 달려 있다. 
빈털터리의 이로운 점 
자신이 왜 빈털터리인지 의아해 하는 사람은 '나는 어째서 돈이 한 푼도 없을까'라고 분명하게 질문해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빈털터리로 살면 이로운 점들이 있으니까. 
예를 들어보자. 
* 나는 성스럽게 느낄 수 있다. 신은 나를 사랑하실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 '한통속이 될 수 있다. 내가 가난한 채로 남아 있으면 주위 친구들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 '동정을 받을 것이다.' 
* '나 자신을 훈련할 필요가 없다.' 
* '습관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 
* '무엇보다 좋은 점은 다른 사람들, 그리고 정부를 비난할 수 있다.' 
솔직하게 생각해 보면 빈털터리가 자신에게 어울린다는 사실은 인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시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들은 모두 그럴 듯한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가난'을 포함한 모든 일은 인과응보이다. 
부모들의 돈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현실로 작용한다 
우리 부모가 종종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 '돈은 벌기 쉽다.' 
* '우린 언제나 충분한 여유가 있다.' 
* '돈을 쓰면 그만큼 더 들어온다.' 
아니면 혹시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 '돈은 모든 악의 근원이야.' 
* '우린 그럴 만한 여유가 없어.' 
*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아니?' 
만일 두 번째 목록에 좀 더 익숙하다면 아마도 부모의 믿음이 우리의 현실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고난이 우리의 고난이 되는 것이다. 
돈을 편안하게 생각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섹스보다 돈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돈을 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쩔쩔맨다. 
"아니야, 됐어. 정말 필요 없다고." 
그들이 빵과 물만 먹고사는 줄 알고 있는데, 그들은 돌변한다. 당황한다. 수치스러워한다. 
"자네 돈은 필요 없어. 난 괜찮다니까."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친구에게 일주일치 봉급을 빌려주고 그 돈을 돌려 받고자 할 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를 모른다. 
"아, 자네도 알겠지만....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중요한 이 
야기는 아니고. 정말 내가 필요한 것도 아니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저 내 생각에는...." 
어째서 '내 돈을 돌려줄 수 있니'라고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직장과 인간 관계에서 불만이 생기면 조만간 떠나 버린다. 우리가 돈을 불편하게 생각한다면, 만일 돈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불편하다면, 만일 돈이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역시 거기서 떠나게 된다. 그것은 의식적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서투른 일을 우리는 피하게 마련이다. 
한 마디 더 
인생에서 무언가를 소유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과 친해져야 한다. 돈을 벌고 돈을 지키기 위해서는 돈을 편안하게 느껴야 한다. 
내가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들이 그만큼 없이 지낼 것이다? 
이것은 가장 어리석은 믿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풍족하면 다른 사람들이 고통 받을 것이다'라고 믿으면서 성장했다. 누가 그런 생각을 퍼뜨리는 줄 아는가? 바로 가난뱅이들이다. 
만일 산타클로스가 우리 거실에 들어와서 탁자 위에 백만 달러 현금을 떨어뜨리고 갔다면 그 돈이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까? 천만에! 그 돈을 베개 밑에 쑤셔 넣지 않는 한, 자동차 거래상이 한몫 챙길 것이고, 여행사 직원이 또 한몫을, 근처 레스토랑, 꽃집, 의상실, 세금 징수원 할 것 없이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이익을 보게 된다. 그런데도 부자가 되면 다른 사람을 착취하게 되므로 좋지 못하다고? 헛소리! 
부유해지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그들을 도와 줄 수 있다. 
 
스스로를 보살피자 
인생이란 묘한 거야. 최고를 고집하면 종종 그걸 얻게 되거든. - W. 세머셋 몸(William Somerset Maugham(1874--1965): 영국의 소설가, 극작가, 대표작으로는 '인간의 굴레'. '달과 6펜스' 등이 있다.) 
세상이 날 대접하기를 원한다면 스스로 자신을 잘 대접해야 한다. 구멍 뚫린 속옷을 입고 어떻게 자신을 당당한 거물로 느끼겠는가? 프레드는 말한다. 
"팬티에 구멍이 나면 어때? 아무도 보지 않는걸." 
하지만 거기에 핵심이 있네, 프레드. 자네가 알고, 자네의 몸이 느낀다네. 나를 특별하게 느끼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라네. 만일 자네가 자신을 자랑스럽게 느끼지 않는다면 아무도 자네를 자랑스럽게 느끼지 않는다네. 
우리가 사는 집 또한 우리의 기분에 영향을 준다. 문에 들어섰을 때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공간을 창조하자. 집에 자신의 개성을 부여하자. 집주인과 상의해서 그가 재료를 제공하면 우리가 직접 페인트칠을 하는 거다. 
정리 정돈하는 일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깨끗한 방 한 칸에 사는 것이 지저분한 저택에 사는 것보다 낫다. 한 부인이 우리 집사람에게 물었다. 
"20달러로 집을 꾸미려면 어떻게 해야죠?" 
아내가 대답했다. 
"빗자루부터 사세요." 
지금 가진 것을 즐기자 
많은 사람들은 찬장 속에 멋진 그릇들을 쌓아 두고 흠집투성이의 낡은 플라스틱 접시에 사과와 바나나를 진열한다. 우리가 죽어서 아이들에게 크리스털을 물려주면 모두 깨 먹을 텐데. 내 말은, 만일 멋진 물건이 있으면 직접 깨 먹으라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남자는 그의 최신형 볼보를 다시 팔아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낡은 침대보로 시트 커버를 만들어 씌웠다. 매우 실용적이다. 빨래 바구니 안에 앉아 있는 기분이 아니라면.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 집사람에게 배운 점이 많다. 그녀의 철학은 '한껏 자신을 꾸미고, 충분히 먹고, 집을 깨끗이 하면 축복 받은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그녀는 늘 그렇게 말한다. 
"모든 일은 다른 모든 일에 영향을 준답니다. 걷는 방법이 말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고, 옷 입는 방법이 느끼는 방식에 영향을 주죠. 자신을 보살피면 남도 보살피게 돼요." 
아내는 어깨에 패드를 댄 잠옷을 입는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잠옷은 실크이다. 
우리 자신을 웬만큼 보살피도록 하자. 사람들은 묻는다. 
"잘 먹는다고 해서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는 일과 무슨 상관이 있죠?" 
모든 일에 상관이 있다. 우리가 풍족하게 느끼면 풍족함을 불러온다. 
프레드는 말한다. 
"성공하고 나면 쥐새끼처럼 살지 않겠어." 
천만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성공한 것처럼 살기 시작하고 지금 성공을 느끼고 있어야 한다. 
한 마디 더 
풍족함이란 반드시 돈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생활 방식에 관한 문제이다. 
세상일은 생각대로 이루어진다 
전설에 의하면, 중세기의 '연금술사'들은 납을 금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오죽 좋을까. 
어떤 면에서는 우리 모두 표면적인 모습 너머를 볼 수 있는 연금술사가 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일상적인 도전은 불행하게 보이는 상황에 대처해서 - 비행기를 놓치고, 자동차 사고가 나고, 이혼하고, 무례한 웨이터를 만나고 - 그러한 상황들을 전화위복으로 바꾸는 일이다. 
그렇다고 다리가 부러지기를 바라느냐고? 그건 아니다. 하지만 만일 다리가 부러진다고 해도 그 '시련' 속에서 어떤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일이 나에게 뭐가 이로운가?' 라고 질문해 보는 것은 몇 가지 차원에서 도움이 된다. 
* 자신에게 닥친 일에 대해 좀 더 감사할 수 있다. 
* 마음이 보다 평온해진다. 
* 지금 인생이라는 버스를 타고 있으며, 적어도 멀고 가지는 않아도 된다. 
냉소적인 사람은 말한다. 
"순진하기도 하지. 그러다가 졸지에 당하면 어쩌려고?" 
천만에! 예기치 않은 일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면 칼자루를 쥘 수 있는 법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을 재난으로 믿는 한 계속해서 재난이 이어지게 된다 
최근에 이혼을 하고 나서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믿는 한 그렇게 될 것이다. 나이 50에 직장을 잃고 자신의 전성기는 끝났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렇게 믿는 한 그렇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려는 사실은 우리의 마음가짐이 부정적인 한, 인생을 개선해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다. 우리가 재난만을 생각한다면 더 큰 재난을 불러들이게 된다. 연인에게 상처를 받고, 상관에게 들볶이고, 사고가 나고, 집주인에게 쫓겨나면서 점점 내리막길로 치닫게 된다. 세상일이란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전개된다. 
상황에 대한 믿음을 바꾸는 순간 달라진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의 새로운 기회를 불러들일 것이다. 
한 마디 더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재난'은 재난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의 상황은 우리가 반응하는 생각을 바꾸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질병, 나의 청구서, 나의 주정뱅이 남편 때문이야." 
정말 그것은 나의 문제이다. 
인생이 이렇게 즐거울 리가 
한 여자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평생 동안 내가 원하는 일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 말은 마치 '나는 희생당해 왔어요. 난 순교자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생각했다. '불쌍도 해라.'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 새들은 매일 아침 노래를 한다. 아기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깔깔거린다. 돌고래를 보라. 파도 속에서 뛰어 다니는 강아지를 보라. 누가 인생이 아무 재미도 없다고 말하는가? 즐거운 세상이다. 만일 인생이 즐겁지 않다고 하는 생각을 물려받았다면 그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라. 그것은 우리가 '믿지 않아도 되는' 믿음일 뿐이다. 
시간을 내서 외출해서 단지 재미를 위한 무언가를 해보라. 허리가 굽어지게 일만 하는 것은 '인생이 투쟁'이라는 생각을 굳혀 준다. 느긋하게 생각하자. 인생을 즐기는 일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인생이 달콤하면 어떤 작은 목소리가 말할 것이다. 
"오래가지 않을걸." 
그러면 자신에게 말하자. 
"웬걸, 점점 나아지는 것 같은데." 
제4장 집착 
 
사람이든 돈이든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라. 지나친 집착은 오히려 일을 그르친다. 
집착에 대하여 노래를 한다면 돈을 바라지 말고 사랑을 한다면 결코 후회 없이 춤을 춘다면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듯이 성공하고 싶다면 마음에서 우러나서 해야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쫓아가면 그것은 달아나 버린다. 동물이나, 연인이나.... 돈도 마찬가지! 
파티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다음주에 전화하죠'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일주일 동안 화장실도 가지 않는다. 전화 옆에 앉아서 꼼짝 않고 기다린다.  
누가 전화를 할까? 모두들 전화해도 그 사람은 하지 않는다. 
자동차나 집 같은 어떤 물건을 절실하게 팔려고 했던 적이 있었는가? 살 사람이 나타났는가? 아무도! 그래서 가격을 내렸다. 관심을 보인 사람이 있었는가? 아무도! 우리가 절실하면 응답이 없다. 
외판원들과 이야기해 보면, 분사기를 팔거나 세제를 팔거나 간에 똑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절실함은 우리를 구덩이 속으로 끌어당긴다. 우리가 초조해할수록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다. 음식점에서 급하게 식사를 시키면 어떻게 될까? 웨이터가 내 주문서를 잃어버린다. 
나는 공항에서 집착의 법칙에 대해 배운다. 작가로서 나는 세계 여러 나라를 열 몇 차례 방문했다. 이러한 여행은 보통 육 주에서 넉 달이 걸리는 여정이다. 최근까지 우리 집사람 줄리는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거의 혼자서 여행을 했다. 
나는 백 번의 비행을 하면 아흔 아홉 번은 대개 정시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아내가 보고 싶어서 초조하게 분초를 세는 날은 영락없이 4시간 연착이었다. 
지난번 북아메리카 작가 순회 강연을 끝내고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내가 호주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아직 포틀랜드에 있었다. 나는 이러한 지연 출발에 익숙했으므로 수화물 창구에 가서 물었다. 
"6시에 떠나는 샌프란시스코행이 얼마나 늦어질까요?' 
그 친구가 말했다. 
"늦지 않습니다." 
"늦지 않는다구요?" 
나는 기뻐서 펄쩍 뛰었다. 창구를 뛰어 넘어가서 그를 껴안아 주려고 했을 때 그가 말했다. 
"왜 늦지 않는지 알고 싶으세요? 취소됐습니다." 
결국 밤 10시 30분에 산 호세로 가는 비행기를 탔고,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버스를 잡아서 새벽 4시에 아내가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7시간 지각이었다. 
우리가 절실하게 어떤 변화나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면서 애를 태우면 우리 자신이 그것을 가로막는다. 동전의 이면이라고 할까? 느긋하게 기다리면 때가 온다. 
우리는 여자친구나 남자친구가 없이 일년 반을 보내면 초조해진다. 나타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포기를 하면서 말한다. 
"애인 따위는 필요하지 않아. 혼자서도 즐거울 수 있다고." 
그러자 갑자기 벌떼처럼 벽 위로 넘어오고 침대 밑에서 기어 나온다. 
말다툼이 그 전형적인 실례이다. 상대의 마음을 바꾸어 보려고 논쟁을 벌이면? 그가 마음을 바꿀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상대를 다그치지 않으면 종종 그가 나의 사고방식에 접근해 오기도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 누군가 전화해 주기를, 남편이 담배를 끊어 주기를, 승진하기를, 상관이 이해심을 보여 주기를 - 절실히 원할 때마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물리치는 에너지를 우리 주위에 발산한다. 
초연함 대 무관심 
초연하다는 것은 무관심한 것과 다르다. 우리는 초연하면서 동시에 매우 단호할 수 있다. 초연하면서 단호한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과 능력이 결국에는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만일 이번에 하지 못하면 다음 번에, 아니면 그 다음 번에 해낼 것이다." 
어느 대기업에 입사 원서를 낸다고 하자. 우리는 그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진지하고 세심하게 준비한다. 면접할 내용을 미리 써 보고 화장실 거울 앞에서 연습한다. 새 구두를 사고 이발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일찌감치 면접을 보러 가서 최선을 다한다. 
그러고 나면? 집에 돌아와서 생활을 계속하라. 다른 공부를 하고, 다음 입사 지원을 계획하라. 만일 그 회사에 채용이 되면 다행이다. 안 된다 해도 계속 앞으로 전진하면 된다. 
무관심한 사람들은 말한다. 
"상관없어. 뭣 때문에 안달을 하겠어?" 
필사적인 사람들은 말한다. 
"이번에 안 되면 죽어 버릴 거야." 
단호하고 초연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한다. 
"기회는 또 있어. 나는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어. 시간이 좀 걸리면 어때?" 
돈에 대한 집착 
부자들보다 돈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가난뱅이들이다. -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1854--1900): 아일랜드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세기 말 영국 문단의 제1인자이며 탐미주의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집념', 즉 집착은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고자 애를 쓰는지 설명해 준다. 돈은 생존 수단일 뿐 아니라 성공의 상징이기 때문에 우리 대부분은 돈에 연연해한다. 돈에 관심이 없다고 떠벌리는 사람들도 사실은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 불행히도 돈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다 보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가 무언가에 연연해할수록 그에 대한 지배력을 잃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 때문에 전전긍긍하다가 완전히 속수무책이 된다. 
초연함은 부자들이 더 부유해지는 중요한 조건이다. 그들은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필사적이 아니다. 당장은 돈이 없더라도 앞으로 생기리라고 생각하면서 충분히 편안하게 생각해야 한다. 돈이 생겨서 일부를 저축하면 좀더 여유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더 벌 수 있다고 생각하자. 가난한 사람의 태도, 즉 돈을 벌고 싶다는 믿음과 부유한 사람들의 사고방식, 즉 돈을 벌게 되리라는 믿음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가 필요해'라는 말의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 
흔한 일로 컴퓨터를 팔려고 한다거나,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거나, 승진하기를 바라거나, 골프 공을 홀에 넣으려 한다거나, 송금 수표를 기다린다거나, 남편감을 찾고 있다면 편하게 마음을 먹자. 그것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나서 자신에게 말하라. 
"그것이 아니라도 행복할 수 있다." 
거기에 대해 잊어버리고 지내다 보면 대개는 좋은 결과가 찾아올 것이다. 
한 마디 더 
우리의 정신과 육체는 자연법칙을 따른다. 자연은 집착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연은 균형을 찾으므로 어딘가에 치우쳐 있으면서 동시에 균형을 이룰 수는 없다. 삶을 끝없는 투쟁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흘러가는 대로 놓아두자. 그렇다고 해서 세상일에 대 
해 무관심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억지로 강요해서도 되지 않는 법이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지구 중력의 원리를 이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할 일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순리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받으려면 먼저 주어라 
만일 무언가를 원한다면 그것을 먼저 주어야 한다. 무슨 정신나간 소리냐고? 가진 것을 좀더 얻으려면 가진 것의 일부를 주어야 한다. 농부는 더 많은 씨앗을 원할 때 씨를 가져와서 땅에 뿌린다. 미소를 받고 싶다면 스스로 미소를 지어 보여라. 애정을 원한다면 애정을 주어야 한다. 사람들을 도우면 그들도 나를 돕는다. 입맞춤을 원하면? 누군가에게 먼저 입을 맞추어라. 사람들이 나에게 돈을 주기를 바란다면? 내가 가진 돈의 일부를 나누어주어야 한다. 
생각해 보자. 만일 집착이 우리의 삶 속으로 좋은 일들이 흘러드는 것을 막는다면 그 반대는 집착을 버리는 것, 즉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의 일부를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버리는 것이 자신에게 돌아오게 된다. 
사람들이 나에게 말한다. 
"내 인생의 전부를 바쳤는데 돌아오는 것이 없군요." 
나는 그들이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차이가 있다. 
남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돈 많은 늙은 구두쇠는 어떻게 된 거지? 
우리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빵 부스러기만 먹고살면서 한푼 쓰기도 벌벌 떨던 인색한 늙은이가 죽은 후에 침대 밑에서 백만 달러가 나왔다나?'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받기 위해 주어야 한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예금 잔고가 풍요로움을 측정해 주지 않는다. 풍족함이란 우리 인생을 통해 돌고 도는 것이다. 돈은 주고받는 흐름이다. 만일 내가 스위스 은행에 많은 재산을 예치해 놓고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계산상으로 그 돈은 내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나는 거기서 아무 것도 '받는' 것이 없다. 그 돈이 나를 풍족하게 해주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에 속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주고받는 원칙이 적용된다. 
한 마디 더 
주는 것의 비결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이다. 만일 무언가를 바라고 준다면 어떤 결과에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면 가능성은 점점 적어진다. 
물질적인 소유를 즐겨도 되느냐고? 당연한 말씀! 단 우리가 물질을 소유하되, 물질이 나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라. 
연인에 대한 집착 
번뇌의 근원은 욕망이다. - 석가모니(Gautama Buddha(B.C.563--483): 불교의 창시자. '석가'는 족칭, '모니'는 성자. '부다'는 깨달음을 얻은 자라는 뜻이다.) 
메리는 한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고 보살펴 주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런 남자를 찾을 가능성이 있을까? 글쎄올시다. 우선 그녀의 절실함이 남자들을 멀리 밀쳐 낼 것이다.  
둘째, 안달을 하는 여자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프레드는 여자친구에게 말한다. 
"당신이 필요해.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굶주림이다. 누군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다(말 그대로 누군가가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라면 무능력자나 다름없다. 누가 그런 사람을 원하겠는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 스스로 원하는 사람이 되고,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이 나의 삶을 함께 하기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무언가를 또는 누군가를 가지려면, 놓아주어야 한다. 
집착과 증오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것은 변화시킬 수가 없다. - 칼 융(Carl Gustav Jung(1875--1961): 스위스 출신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와 함께 정신분석학 연구에 몰두하다가 나중에는 그와 결별,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어 내었다. 
증오란 일종의 해로운 생각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증오하고 있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게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 주의를 맴돌면서 떠나지 않는다. 
내가 빚을 지고 있고 그 상황을 증오한다고 하자. 그런 마음 상태로는 경제를 개선하기 어렵다. 나는 그 상황을 증오하는 데 온 힘을 탕진해서 지쳐 버리고 기진맥진해진다. 그러나 일단 자신의 빚을 인정하고 감정적인 혼란에서 벗어나면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인정하는 일은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황을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자신이 비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전에는 살이 쪘다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살이 찐 자신을 증오한다. 둘 중에 어떤 식으로 생각하건, 살이 찐 채로 남아 있게 된다. 일단 살이 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체중을 줄일 수 있다. 
성경에는 '악에 대항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지당한 말이다. 화를 내거나 싸워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저항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후에 상황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 
제5장 긍정적인 생각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즉 자신이 원하는 상황을 생각하라.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이유 
비행기를 타고 유럽 상공 어딘가에 앉아 있는데 날개 엔진이 꺼졌다고 상상해 보자. 비행기 조종사가 어떻게 하기를 바랄 것인가? 그가 '모두 진정하시고 안전벨트를 매십시오. 쉽지는 않겠지만 무슨 방법이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기를 원할까? 
아니면 기장이 통로를 오르내리면서 '우리 모두 죽을 거요. 모두 죽을 거라고요' 하고 소리치기를 원할 것인가? 둘 중에 어떤 사람이 우리를 안전하게 내려 줄 것같이 생각되는가? 
그러면 이제 자신이 조종사로 있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 대해 생각해 보자. '방법이 있을 거야' 아니면 '우리 모두 죽을 거야' 중에 어떤 접근 방식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 같은가? 긍정적 사고의 본질은 확실한 보장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선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패배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불가능하게 될 때까지 불가능한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가능한 것을 생각한다. 가능성에 집중하면 실제로 가능하게 된다. 
긍정적 사고가 우리의 무의식을 형성한다 
우리의 무의식은 모든 사고의 집합체이다. 가장 일상적인 생각들이 가장 강력한 무의식적 행동을 만들어 낸다. 
긍정적 사고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을 그림으로 그려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뇌를 커다란 호두처럼 반으로 쪼갠다고 생각하자. 위의 절반은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담고 있는 의식이고, 아래의 절반은 무의식이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숨을 쉬고 소화를 시키는 것처럼 선천적으로 타고난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과, 걷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 창조해 낸 프로그램들이 있다. 
자, 운전을 배운다고 상상해 보자. 모퉁이에 접근할 때마다 우리는 뇌의 윗부분으로 의식적인 생각을 한다. '오른쪽 다리를 들어서 왼쪽으로 12센티미터를 이동해서 가볍게 페달을 밟는다.' 한 달 동안 그렇게 의식적인 생각을 계속하면 아무 생각 없이 어디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동적인 프로그램으로 발전된다. 브레이크를 밟는 프로그램이 뇌의 아랫부분인 무의식 속에 심어지면 새로운 무의식 프로그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숙련된 운전자는 5시간 동안 운전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운전을 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무의식이 모든 것을 해낸 것이다. 어떤 의식적인 사고라도 오랜 기간 반복하다 보면 프로그램이 된다. 
그러면 예를 들어, 여러 해 동안 '나는 항상 빈털터리다'라는 의식적인 생각을 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할 필요가 없는 자동적인 프로그램이 형성된다. 그리하여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자신을 빈털터리로 만들 수 있다. 
이 과정을 어떻게 긍정적인 사고에 적용할 수 있을까? 간단하다. 우리는 하루에 오만 가지 생각을 한다. 그 대부분은 주로 부정적인 생각들이다. '살이 찌고 있다. 기억력이 없다. 청구서를 지불할 돈이 없다. 나는 되는 일이 없다.' 
우리가 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어떤 종류의 무의식적인 행동이 나타날까? 아무 생각 없이 생활과 건강을 해치는 부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째서 파산을 하거나 불행해졌는지 의아해 하겠지만 사실은 스스로 반복적인 생각들을 통해 자동적인 유형을 창조해 낸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차를 운전하는 프로그램을 갖게 되는 것과 똑같은 식으로, 우리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지각을 하게 되고, 불행해지고, 파산을 하도록 자신을 프로그램화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는 신을 원망한다. 
반면 희망적인 일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자신의 무의식 유형에 대해 이해하면 아무도 패배자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의식적인 생각에 달려 있다. 우리가 생각을 훈련하기 시작하면 새로운 무의식의 프로그램을 창조하게 된다. 운전하는 무의식적인 행동을 발전시키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보다 성공할 수 있는 무의식적인 행동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사고의 훈련과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프레드는 의욕 증진 강좌에 다니면서 긍정적 사고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 그는 말한다. 
"내 생활을 완전히 바꾸겠어." 
그는 아침식사 전에 몇 가지 목표를 종이에 적는다. '승진하자. 롤스로이스를 사자. 타지마할을 사자....' 그리고 나머지 일주일은 평상시대로 부정적인 내리막길을 걷는다. 금요일이 되면 그는 말한다. 
"아무래도 긍정적 사고법이 효과가 없는 것 같아." 
그는 아마도 하루에 48,000에서 47,500가지의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 자신이 어째서 복권에 당첨되지 않았으며, 관절염이 치료되지 않고, 아내와 계속해서 다투는지 - 걱정하며 보냈을 것이다. 
하룻동안 긍정적이 된다고 해서 달라질 수는 없다. 우리의 생각을 강화하는 것은 체력을 단련하는 것과 같다. 스무 번 팔굽혀펴기를 하고 거울로 달려가 보면 아무런 차이도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24시간 동안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고 해서 어떤 차이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몇 달 동안 생각을 훈련하면 체육관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자신의 삶에서 더 큰 변화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청소하는 일은 평생의 작업이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이유는 종종 우리가 부정적인 상태에 있을 때 자신이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을 점검하고 싶으면 자신의 삶을 점검하라. 풍족함, 행복함, 원활한 인간 관계, 건강 등이 우리의 가장 일상적인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한 마디 더 
프레드는 말한다. 
"내 인생이 엉망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 생각도 그런 거야." 
아닐세, 프레드. 자네의 생각이 엉망이기 때문에 자네의 삶이 그런 거라네. 
생각이 결과를 낳는다 
만일 우리의 삶 속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면 이제부터라도 더 이상 그것에 대한 걱정과 그것에 대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쏟아 붓는 에너지가 그것을 계속 살아 있게 만든다. 
그러나 에너지를 거두면 그것은 사라진다. 말다툼이 완벽한 예이다. 남편이 집에 와서 불평을 늘어놓을 때 불평에 맞서 싸우기를 거부한다면? 혼자서 말다툼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가 무언가 걱정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단지 생각만 하고 있을지라도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그것에 대해 언급하게 만든다. 어릴 때 나는 이런 일들이 신기하게 생각되곤 했다. 내가 아빠의 담배를 몰래 피웠을 때마다 어째서 엄마가 잘 자라고 키스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감정적으로 무시하면 그것은 저절로 증발한다. 여기 또 다른 법칙이 있다. 
우리가 세상일을 편하게 놓아주면 세상일도 우리를 편하게 놓아준다 
우리가 자신을 방어하고 있는 한 사람들은 우리를 공격하려고 한다. 왜? 우리가 자신을 방어하는 이유는 자신의 위치를 불안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어, 이웃 사람이 나에게 외계에서 온 화성인이 아니냐고 추궁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내가 허겁지겁 외계인이 아니라고 맞서 싸울 것인가? 
설마! 나는 내가 화성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마 웃어 넘길 것이다. 
또 예를 들어, 회사 사람들이 내 뒤에서 험담을 한다고 하자. 만일 내가 공개적인 발표를 하고 무죄를 주장한다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꼴이 된다. 
무시해 버리면 소문은 곧 지나갈 것이다. 
자신을 방어하지 말라는 의미는? 
우리가 저항하고 고민하면서 펄펄 뛰는 동안 우리는 그 문제를 살려 둔다는 말이다. 
나는 1960년대에 텔레비전에서 시위 행렬을 지켜 본 기억이 있다. 내가 아빠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은 왜 서로 치고 받고 하는 거죠?" 
아빠가 대답했다. 
"평화를 바라기 때문이란다!" 
전쟁을 하지 말라. 평화에 초점을 맞춰라. 
한 마디 더 
만일 우리가 인생을 세상에 대항하는 전쟁으로 바꾼다면 우리가 대적해야 하는 세상은 더욱 넓어진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자.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프레드와 메리는 처음으로 저녁식사 데이트를 나간다. 프레드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리라고 마음먹는다. 메리가 감자 샐러드를 무릎에 떨어뜨리자 프레드가 말한다. 
"자, 내가 닦아주죠." 
그녀가 집 열쇠를 잃어버리자 프레드는 말한다. 
"나도 항상 잃어버리는 걸요." 
3년이 흐른다. 메리와 남편 프레드가 저녁에 외식을 하러 나간다. 그녀가 무릎에 감자 샐러드를 떨어뜨린다. 프레드가 말한다. 
"정말 못 말리겠군." 
그녀가 열쇠를 잃어버린다. 그가 말한다. 
"이런 새대가리." 
똑같은 사람들이 똑같은 상황에서 다른 태도를 보인다.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으면 너그러워질 수 있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짜증을 내고 싶으면 그의 잘못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우리가 사람들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행동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가짐이다. 
우리 대부분은 상대방이 잘하는 것보다는 잘못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메리는 프레드에 대해 생각하는 두 종류의 목록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아내로서 프레드의 단점들을 간단히 적은 짧은 목록이다. 두 번째는 미망인으로서 프레드의 장점들, 즉 친절함, 유머 감각, 관대함, 기지 등등을 빠짐없이 적은 긴 목록이다. 
그녀는 결혼 생활 내내 남편이 자신을 짜증나게 만드는 몇 가지 짧은 목록에 집중하면서 보낸다. 
"아침상에 신문을 온통 펼쳐 놓고 나간다니까. 또 변기는 왜 그렇게 항상 올려놓는지." 
그러다가 불쌍한 프레드가 트럭에 치인다. 밤사이에 그녀는 짧은 목록 대신 긴 목록으로 바꿔치기 한다. 
"남편은 천사 같았어. 친절하고, 관대하고, 열심히 일하고.... 정말 좋은 남자였는데." 
만일 어떤 목록을 가지고 싶다면 이와 반대로 만들도록 하라. 사람들이 가진 장점에 초점을 맞추고 산다면, 그들이 떠났을 때 '그런데 코를 너무 심하게 골았어' 하면서 자신을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 
만일 '당신 어머니에 대해 못마땅한 점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또, '어머니의 모습, 태도, 행동에 싫어하는 다섯 가지를 열거해 보라'고 한다면? 물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백 가지, 아니 천 가지라도 생각해 낼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는 어머니를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부정적인 면에 관심을 집중하는 사람들은 보통 '난 단지 현실적으로 생각할 뿐이야'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변명한다. 실제로는 우리가 스스로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나름대로 어머니와 다른 모든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자신의 인생에서 누군가를 골라서 그의 장점에 집중해서 생각하다 보면 그와의 관계가 진전될 것이다. 그것은 어렵고 꺼림칙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확실히 효과가 있다. 
감사하면 풍족해진다 
나는 감사할 줄 모르면서 행복한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 지그 지글라(Zig Ziglar: 미국의 유명한 저술가. 자기 개발 및 성공학의 권위자로, 교육, 처세, 기업 경영 등에 대한 명강사이며 밀리언셀러 '정상에서 만납시다'의 저자이다.) 
모든 종교적 가르침은 우리에게 감사하라고 권유한다. 프레드는 말한다. 
"내가 왜 신의 자존심을 만족시키면 살아야 하지?" 
하지만 나로서는 하느님에게 자격지심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산을 움직이고, 우주를 만들고,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분이 굳이 무엇을 증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가 받은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받게 된다.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해 감사를 표시할 때 더 풍족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더 많은 것이 주어진다. 
내가 아내 줄리를 만났을 때 나는 그녀의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단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덧셈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버는지, 얼마나 빚을 지고 있는지, 얼마나 소비를 하는지 잘 모르지만 어쨌든 언제나 풍족함을 즐겨 왔다. 줄리는 삶의 질에 관한 한, 감사하는 마음과 삶이 우리를 축복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논리와 수학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살아 있는 본보기이다. 
제6장 마음가는 대로해라 
 
인생의 목적은 아무 문제없이 조용히 사는 것이 아니라 흥미진진하게 사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자 
세상이 내 인생에 빚을 지고 있다고 떠들고 다니지 말라. 세상은 우리에게 아무 의무도 없다. 이곳에 먼저 온 것은 세상이다. - 마크 트웨인(Mark Twain(1835--1910): 미국의 소설가. 대표작으로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이 있다.) 
이 장에는 두 가지 주제가 있다. 
* 자신의 마음가짐을 선택하라. 그러면 대부분의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다. 
*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좀더 행복하고 좀더 성공하기 쉽고 아마 돈도 더 많이 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선 나는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일이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는 마음가는 대로해라." 
모순이 있다고? 아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우리는 종종 현재의 상황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다. 
만일 돈이 필요하면 현재의 직업을 계속 유지하면서 미래를 계획해야 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자신에게 적절하게 느껴지는 일을 해야만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 
완벽한 일이란 없다 
보통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이 더 쉽고 더 재미있고 보수도 더 많은 것처럼 보인다. 간호사들은 의사 직업이 수월하게 보인다. 세일즈맨들은 관리자가 하는 일이 더 쉬워 보인다. 모든 사람들이 정치가가 쉽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세상에는 완벽한 일이 없는 셈이다. 왜? 사람들이 보수를 지불하는 일은 자신이 할 수 없거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결할 문제가 없다면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만일 자신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두 가지 대안이 있다. 자신의 마음가짐을 바꾸거나, 아니면 직업을 바꾸는 것이다. 
'일이 좀 쉬워지면 행복할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는 쉬운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이 너무 쉬워지면 보통 그만둔다. 우리는 도전을 너무 즐기는 나머지 여가 시간에도 도전을 찾아 나선다. 골프가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은지 생각해 보았는가? 사람을 안달이 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프레드는 말한다. 
"반복적이지 않은 일을 할 수 있다면 행복하겠어." 
대부분의 일은 반복적이다. 비서는 계속해서 서류를 타자해야 하고, 배우는 한 역할을 끝내고 나면 다음 역을 맡는다. 모든 일은 반복이다. 
우리가 삶의 일부에 '일' 또는 '역할'이라는 딱지를 붙인다면 스스로를 제한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나는 이제 일하러 가야 하니까 5시까지는 고통이야'하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일' 또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그것을 자신의 삶 자체로 생각하자. 직업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정신없이 빠져들지만 오랜 기간 동안 '사랑하기'에는 다짐이 필요하다. 
최선을 다하라 
일은 자발적으로 해야만 존엄성을 가질 수 있다.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1913--1960): 프랑스의 소설가.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 실존주의의 대표 작가이며 대표적으로 '이방인', '페스트', '칼리쿨라' 등이 있다. 
우리가 무슨 일이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우리는 100퍼센트를 다할 때 좀더 즐거울 수 있다.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자. 숙제를 모두 끝내고 최선을 다한 날에는 학교에 가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는가? 좀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가? 
졸업한 지 50년이 되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여전히 '숙제 법칙'이 적용된다. 교사들은 우리에게 열심히 하라고 말했고, 부모님들도 우리에게 열심히 하라고 말했고, 이제 직장 상사가 우리에게 열심히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열심히 하는 이유는 부모님과 교사와 상관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다. 
둘째, 세상은 게으름과 불손함을 처벌하는 법칙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하면 인생이나 일이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다. 적당히 넘기려고 하다가는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한다. 권투 선수가 상대를 얕잡아 보면? 사업가가 경쟁사를 우습게 보면? 매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를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 즉, 프로정신이다. 
어째서 어떤 택시 기사는 즐겁게 운전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일을 고통으로 만드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똑같이 반복적인 일을 하는 두 사람의 차이가 어디에서 올까? 즐거운 기사 양반은 다른 인생 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프레드는 말한다. 
"그야 기분이 좋으면 서비스를 잘하겠지." 
아니다! 서비스를 잘하기 때문에 기분이 좋은 것이다. 
자신의 일을 즐기는 사람은 잠에서 깨면서 말한다. 
"오늘은 어제보다 좀더 능률적으로 열심히 일해야겠다." 
그들이라고 해서 백발백중 성공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목표이다. 
나는 최근에 지그 지글라와 함께 싱가포르에서 강연을 했다. 지그는 25년이 넘게 전문적으로 강연을 해왔으며,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올라선 사람으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바쁜 스케줄과 고액의 강연료가 그 사실을 입증해 준다. 
그가 연설을 하기 전에 내가 물었다. 
"지그, 이 이야기를 수천 번은 하셨겠군요. 오늘 발표를 위해서 얼마나 준비하셨나요?" 
그가 대답했다. 
"3시간" 
지그는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요행수나 지름길을 바라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재주에 전념하면서 끊임없이 발전하려고 노력해 왔다. 지그에게 '재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을 과소 평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최고의 자리에 머물기 위해서는 재능 이상의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해 일하나 
항상 받는 돈만큼보다 더 많이 일하면, 언젠가는 일하는 것보다 더 많이 받게 될 것이다. 
최근에 나는 불손한 웨이터를 만났다. 그의 태도는 '당신, 누구 허락 받고 이 음식점에 들어온 거요'라고 말하는 듯이 보였다. 20분이 지나서야 내가 주문한 카푸치노가 도착했는데, 거의 대부분 컵 받침에 쏟아져 있었다. 
이야기 끝에 나는 그 웨이터에게 자신이 하는 일과 상관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가 말했다. 
"남은 여생 동안 절대 그런 멍청이를 위해 일하고 싶지 않아요." 
안타깝게도 그는 일터에서의 삶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우리는 직장 상관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일한다. 
고용주들은 하나같이 완벽하지 않고 동료들은 게으름뱅이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직원으로 들어간 이상,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월급 주는 사람을 흠잡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마지못해서 일할 때는 고용주보다 더 고통을 받는다. 그는 단지 몇 푼을 잃겠지만, 우리는 열정과 자존심과 인생 전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좋은 직업을 가질 수만 있다면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하기에 '즐거운' 일이 있고 '즐겁지 못한' 일이 있다고 믿는다. 
천만에! 재미있는 사람은 지루한 일도 재미있게 만들 수 있다. 
실직을 한 은행가에게 20년 동안은 아니지만 몇 개월 정도 세차장에서 일하라는 것은 좋은 치료약이 될 수 있다. 
풍족하게 살다 보면 교만해진다.  
해고된 건축 기사가 말한다. 
"난 집 짓는 사람이지 창문 달아 주는 사람이 아니오." 
해고된 행정관은 정부의 관직에 애착을 못 버리고 실업 수당을 받을 망정 식당 웨이터가 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일을 즐기면서 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내 남동생인 크리스토퍼는 다른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일도 기억할 만한 일로 만들 줄 안다. 
도랑을 파거나, 지붕에 페인트칠을 하거나, 콘크리트를 철거하는 일에 도움이 필요하면 나는 그에게 부탁할 것이다. 
그는 그런 일들이 즐거울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어떤 칵테일 파티에 참석하는 것보다 크리스토퍼와 함께 닭털을 뽑는 쪽이 더 재미있다. 
한 마디 더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최선을 다할 때만이 자신이 즐겁게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업 선택 
이 책은 직업 안내 책자가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을 자신이 좋아하는 일들을 하면서 보내야 한다는 인생 철학을 이야기하는 중이다. 우선 우리는 두 가지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 원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적어도 여가 시간에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하자. 어떤 사람들은 순교자 역할을 하면서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지 않는다. 만일 여가 시간에조차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정말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일이 힘들 수밖에 없다고 믿으면서 성장한다. 천만에! 어떤 사람들은 일을 하면서 재미도 보고 돈도 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닌 경우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열대의 해변에 누워 있기 위해서 월급을 아껴 두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무언가에 대해 열정을 가지는 것이며,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의 사랑과 에너지와 창조성을 쏟아 붓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어떠한 모험도 불사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대체로 겨우 근근히 먹고 살 정도의 보수밖에 되지 않을지라도 그 일을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흥미를 느끼게 되는 원인의 절반은 불확실성 때문이다. 투쟁이 없으면 무언가가 빠져 있는 삶이다. 그래서 부유하고 저명한 집안의 자녀들이 마약을 과다 복용하면서 두뇌를 혹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는 도전할 일이 없다. 일을 하거나 안 하거나 물질적으로 풍족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완전한 책임을 질 때 비로소 움직인다. 그 목록에는 직업의 선택이 가장 우위에 있다. 
프레드에게 질문해 보자. 
"왜 이 일을 하고 있죠?" 
그는 말한다. 
"어쨌든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해야 하니까요." 
그 대답은 충분치 않네, 프레드.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일생을 보낸다고 해서 훈장을 주지는 않는다네. 만일 마음속으로 직업을 잘못 선택했다고 느끼고 있다면 전업을 해보게나.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고.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만일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모른다면 아마도 오래 전부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가족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야구를 하고 싶었지만 엄마가 피아노를 시켰다. 스포츠카를 원했지만 언제나 '실용적인' 차를 샀다. 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회계사가 되었다. 남아메리카 여행이 꿈이었지만 항상 테드 삼촌 댁에서 휴가를 보냈다. 
우리는 '적당한' 취미를 선택해 왔다. 우리는 '남들이 요구하는' 일을 해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일어나서 말한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만일 우리가 가진 정열을 너무 오랫동안 억누른다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어떤 내면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이기적이라고 상기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작은 목소리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나는 내 일을 증오하지만 어쩔 수 없어." 
또한 모든 사람들이 내가 그 일을 좋아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자신도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자신의 일을 정말 좋아하는지 알 수 있는 증거가 있다. 
* 아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하루 종일 쉬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 시간에 대해 잊어버리고 자신에 대해 잊어버린다. 
* 굳이 애써 노력하지 않더라도 몇 시간 동안이라도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며, 보통 그렇게 하고 있다. 
정열을 되찾자 
생활을 단순화시키자. 습관적인 일들을 더 이상 계속하지 말자. 우리의 일상에서 쓰레기를 치우면 좀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한 달 동안 텔레비전을 켜지 말자.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읽고 있는지에 주의해 보자.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자. 그러면 자신의 내부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른다. 
"이건 괜찮은데. 흥미로운걸." 
귀를 기울여라. 시립 도서관에 가서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걸어가 보자. 책꽂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무엇이 나를 끌어당기는가? 
새로운 일들을 시도해 보자. 유화, 분재, 소년 축구단 코치, 이탈리아어 공부 등등. 열 가지를 하면 아홉 가지는 흥미를 느끼지 못할 테지만, 열 번째에 전혀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이 활짝 열릴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도 효과가 없으면 다시 열 가지를 시도해 보자. 
발견하기 위해서는 찾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을 동네 술집에서 찾을 수는 없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관찰 할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보자. 혼자서 일주일 동안 산이나 해변에 가 보라. 프레드는 말한다. 
"그럴 시간이 없어." 
그 말은 마치 '난 길을 잃었지만 걸음이 너무 느려서 지도를 들여다 볼 여유가 없어'라는 듯이 들린다. 
가장 중요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과 친해지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일이 가능하다고 믿어야 한다. 내가 무슨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깨닫는다면 '무슨 일을 하면서 평생을 보내고 싶은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할 수 있다. 
한 마디 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있으며, 그것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초조해 한다. 만일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면 가장 근접한 일을 찾아서 거기서부터 시작하라. 
재능만이 전부는 아니다 
'재능'은 반드시 걸작을 창조해 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재능이다. 가르치는 일이 재능이다.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것도 재능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재능이다. 경영이 재능이다. 육아 또한 재능이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재능을 과소 평가한다. 도예가는 말한다. 
"내가 작곡을 할 수 있었다면 지금쯤 상당히 성공했을 텐데." 
피아니스트는 말한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일이라면 상당히 성공했을 텐데." 
자신의 능력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인정하라. 다른 사람의 재능을 바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재능을 발전시킬 때 비로소 꿈을 이룰 수 있다. 
메리는 말한다. 
"저는 하느님이 아이들에게 주시는 재능을 받긴 했지만 아무래도 전 은행원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메리, 만일 당신 말대로 하느님이 취학 전 아이들에게 주시는 재능을 당신이 받았다면 어째서 그가 당신이 숫자와 씨름하게 되는 걸 바라셨겠어요? 하느님에게 기회를 주어 보세요. 당신이 자신의 재능을 알고 있다면, 하느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내가 알아 낸 또 다른 사실은, 자신이 재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별로 시도해 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재능이 도움이 되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사람들은 골프 황제인 잭 니콜라우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보통 그의 특출한 재능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잭은 자신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 자신이 연습한 타구를 이야기한다. 잭은 잭 니콜라우스 자신과 수많은 다른 골퍼들의 차이가 마음가짐과 노력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관자들과 노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재능을 강조한다. 그들은 재능이 있거나 없다는 사실로 자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이유를 변명한다. 
만일 위대한 예술가, 과학자, 운동 선수, 박애가와 재벌에게 공통된 확실한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재능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헌신적인 노력이다. 
일단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알면, 그 일에 전력 투구하라.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다. 
고래를 보호하고, 환자를 치료하고, 오존층을 틀어막는 일을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어떤 일들은 나머지 인류에게 맡겨 두자. 
취미를 가져라 
일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랑이다. - 칼릴 지브란(Khalil Gibran(1883--1931): 레바논의 철인, 시인, 소설가. 대표작으로 '예언자', '선구자', '광인' 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취미를 본업으로 바꾸고 있다. 취미가 생활 수단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대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프랭크는 사진을 좋아해서 여가 시간을 사진 찍는 일에 보낸다. 그는 친구들의 결혼 사진을 찍는다. 지방 아마추어 대회에서 몇 차례 우승한다. 점차 그는 많은 일을 하게 된다. 2년 후에 그는 직장에서보다 주말에 더 많은 돈을 번다. 물론 어떤 결혼식은 취소되고, 어떤 고객은 수당을 주지 않아서 몇 달 동안 수지가 맞지 않고 있지만 프랭크에게는 그 일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 
마리아는 어학에 관심이 많다. 그녀는 이탈리아어와 영어를 구사하면 스페인어를 배우고자 한다. 그녀는 바르셀로나에서 휴가를 보낸다. 스페인어를 배우고자 한다. 스페인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퇴근 후에 남아메리카 이주민들에게 무료로 영어를 가르친다. 2년 후에 그녀는 3개 국어에 능통한다. 마리아는 여행사 세 곳에 지원해서 떨어지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통역 과정을 수강한다. 마침내 그녀는 어학원에 직책을 얻는다. 
짐은 도보 여행과 등반을 즐기며 등산화, 텐트, 배낭 등 모든 장비를 갖추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등반을 원하지만 장비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그들에게 장비를 임대해 준다. 때로는 전체 등반 여행을 주관해서 자신의 밴에 사람들을 태워서 데려다 주고 비용을 청구한다. 등반자들이 그의 밧줄을 잃어버리고 텐트를 태우기도 하지만 짐은 '완벽한 직업은 없다. 음침한 실내에서 하던 일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배울 점은? 
*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 
* 세상은 시장이다. 일단 어떤 기술을 익히면 사람들이 그 일에 돈을 지불한다. 
또한 현실이 연속극과 다르다는 것을 배운다. 텔레비전은 다음과 같은 식이다. 
* 오후 7시 30분, 장면 1: 사만다는 모델 에이전시를 시작하려고 결심한다. 
* 오후 7시 34분, 장면 2: 사만다는 테니스 코트만큼 넓은 사무실을 임대한다. 
* 오후 7시 36분, 장면 3: 사만다는 매니저를 임명하고 은퇴해서 하와이로 떠난다. 
현실이라면 사만다는 자금 조달을 위해 여덟 개 은행을 방문할 것이다. 현실이라면 사만다는 주말에 햄버거를 먹으면서 일해야 할 것이다. 현실이라면 사만다는 화장실만한 사무실에서 시작할 것이다. 
현실은 좀 더 실망스럽다. 현실은 좀 더 시간이 걸린다. 
연속극에서는 심심풀이가 직업으로 바뀌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대부분 생략된다.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삶을 사는 것과는 딴판이다. 
 
한 마디 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취미가 소득원이 될 수 있다. 취미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취미의 선택 범위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 
인생 다모작 시대 
우리 아버지는 항상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다. 어느 때는 항해사, 푸줏간 주인, 농부, 발명가, 풍경화가, 택지 개발업자로 일했다. 
나는 일이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라고 믿으면서 성장했다. 언제라도 다른 직업을 원하면 그것을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부모의 압력에 대항해서 자신의 꿈을 따르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아버지에게 '법률 공부를 집어치우고 미술가가 되겠어요'라고 하자 아버지가 말했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좋고말고." 
나는 20대 중반까지 초상화를 그리다가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주는 이로움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유화를 직업 대신 취미로 그리기로 마음먹었고, 인성 발달 세미나를 지도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30대에 이르러서는 책을 쓰기 시작했고, 내 책에 그림을 그려 넣기 위해 만화가가 되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근무 시간을 회의와 집회에서 연설을 하면서 보낸다. 
내 자신의 경험을 대상으로 대강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우리가 일에서 의미와 열정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살고 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자영업자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혼자서 일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들도 있다. 은행가나 비행기 조종사가 혼자 일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한 우물을 파는 쪽을 택한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종종 한심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을 보면 맥이 빠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믿음에 맞추어서 직업을 잘못 선택하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무분별한 십대 시절에 자신의 인생 길을 선택한다. 만일 열일곱 살에 첫 직업을 선택했다면 아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은 인생 다모작의 시대이다. 
나는 음악 교사가 되기를 원했는데,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려고 토목 기사가 되었다고 해보자. 매일 아버지의 말이 귓속에서 맴돌고 있다. 
‘아들아, 너는 내가 가지지 못했던 기회를 가졌다. 나는 다리를 건설하고 싶었단다.’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 피아노를 쳐야 한다. 
우선, 아버지를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없다. 아버지는 그 자신의 인생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내가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 희생하고 있는 동안 그의 성숙과 나의 성숙을 지연시키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부모들의 좌절된 꿈을 충족시키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또한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기술자가 되기 위해 4년을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앞으로 40년을 증오하는 일을 하면서 보내야 하겠는가? 그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에 해로우며, 또한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은 평범하게 끝날 수밖에 없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일을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베토벤은 음악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페라리가 빠른 자동차를 얼마나 좋아했는가? 
두 사람의 의사를 예로 들어 보자. 한 의사는 환자들을 성심 성의껏 돌본다. 또 한 의사는 자신의 BMW를 애지중지한다. 어느 의사에게 담낭 제거 수술을 맡기겠는가? 
누군가는 '그러면 우체국 일을 그만두고 록밴드를 시작할까요'라고 물을 것이다. 음악 수업과 몇 번의 연주회를 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모험에도 계산이 필요하다. 능력을 개발하고, 지식을 넓히고, 공부를 하고, 자신의 기술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고.... 그러고 나서 자신이 원하는 일로 옮겨가야 한다. 
프레드는 말한다. 
"나는 벌어 먹여야 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그래도 회사를 그만두라는 말입니까?" 
글쎄 프레드, 만일 자네 마음이 다른 일에 있다면, 그 일을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다네. 
돈을 위한 일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낚으려는 고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평생 낚시를 한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1817--1862): 미국의 시인, 비평가, 수필가, 무정부주의적 경향을 띠는 급진적 이상주의자이다.) 
만일 우리가 돈만을 바라고 일한다면 행복할 수 없으며, 아마 많이 벌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가 의욕을 가지고 일하려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4장에서 나는 애착을 버리라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정말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한다면 돈에 덜 급급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보통 더 많은 돈을 벌게 된다. 돈은 게임이다. 게임은 열심히 참여해서 이기는 것이지 점수를 가지고 고민한다고 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돈을 중요시하지만, 전력투구한다는 것은 돈보다 중요하다. 지금 무슨 일을 하건 간에 우리는 서로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맞서 경쟁하고 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경쟁에서 밀려나게 된다. 
우리에게 잠재력이 있느냐고? 우리 모두는 잘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사람들의 80퍼센트는 아주 훌륭하며, 평범한 사람은 일부이다. 깨끗한 택시를 얼마나 자주 타게 되는가? 의사가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음식점에 가면 저마다 얼마나 친절한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오랜 준비와 큰돈을 들여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종종 분명한 재난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집사람이 가는 미용실에는 한구석을 임대해서 손톱 손질을 해주는 다니엘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미용실 주인이 임대료를 두 배로 올리자 다니엘은 암담해졌다. 그러자 그녀는 스쿠터를 타고 낚시 도구 상자에 매니큐어를 넣고 다니면서 가정 방문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시간을 잘 지키고 서비스가 만점이기 때문에 몇 주일 후까지 예약이 되어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지금만큼 돈을 벌 수 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종종 장기적으로 볼 때 훨씬 더 번창할 가능성이 있다. 반드시 그렇지 못할 경우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돈을 덜 필요로 하게 된다. 
내가 회사 간부라고 하자. 나는 커다란 저택에 살면서, 아담한 주말 농장에, 근사한 자동차에, 간부들에게 제공되는 회사경비 구좌를 가지고 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말을 키우고 승마를 가르치는 일이지만, 나는 말한다. 
"이런 것들을 유지하면서 살려면 지금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승마 교사가 되면 저택과 스포츠카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때로 우리는 자신이 증오하는 일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노리갯감들을 사들인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산다면, 작은 농장과 작은 지프 한 대로 만족할 지도 모른다. 
일은 사람과의 관계이다 
우리는 훌륭한 간호사들에게서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즉 그들이 약보다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우리가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 일은 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은 우리를 사람들과 연결해 주는 매개체이다. 일에서 얼마나 성공하는지는 우리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말했다. 
"봉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에 대한 봉사'는 굴종이나 희생의 의미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주는 기쁨을 느끼는 것일 뿐이다. '봉사'는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돌보는 일이 될 수 있고, 아름다운 꽃을 팔거나, 미소를 보이면서 난방기구를 수리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봉사한 직업을 묘사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철학이다.  
종종 박사와 석사라는 학위로 경력을 평가하는 우리 사회는 중요한 요지를 빠뜨릴 위험이 있다. 즉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열두 살짜리 아이들의 농구팀을 코치하고 있다고 하자. 농구를 사랑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일이 농구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 
'농구 코치가 열두 살짜리 아이들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천만에! 농구는 단지 구실에 지나지 않으며 아이들에게 인생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코치들도 있다. 
반면 많은 교사들이 자신에게 말한다.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아이들은 대수학엔 관심이 없어." 
지당한 말씀! 만일 6학년을 가르치는 교사라면 그의 목적은 대수학이 아니다. 그의 목적은 아이들이 되어야 한다. 만일 은행가라면 그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대상은 대차대조표가 아니라 사람들이다. 
기꺼이 해보죠. 
몇 년 전에 나는 오하이오주 데이튼에 있는 북스 서점에 초빙 작가로 간 적이 있었다. 내가 서점에서 만화를 그리고 있을 때 직원들이 두 명의 고객에 대한 낭만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레베카 배틀스와 레이 치코우스키는 유족들에게 슬픔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서적들이 진열된 코너를 둘러보고 있었다. 레베카와 레이는 두 사람 모두 최슨에 배우자를 병으로 잃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어떤 유족 상담 모임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두 사람은 친해졌다. 
몇 개월 후에 레베카가 다시 북스 서점에 찾아왔다. 점원이 레베카에게 물었다. 
"원하시는 것을 찾으셨나요?" 
레베카가 말했다. 
"내가 바라던 것 이상을 찾았죠. 필요한 책과 약혼자를 한꺼번에 같은 코너에서 찾았답니다. 우린 9월 15일에 결혼할 예정이에요." 
북스 서점은 온통 흥분해서 서점에서 결혼 피로연을 열어 주기로 자청하고 나섰다. 책꽂이들을 치우고, 탁자와 의자를 빌리고, 꽃을 들여 놓고, 장식을 매달고, 선물포장 코너를 음식점으로 바꾸었다. 
서점 주인인 애니와 조는 책 판매를 중지하고 웨딩 케이크를 날랐다. 그것은 특별하고 감동적인 행사였다. 
북스 서점은 기쁨이 노력과 상상력의 결합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여 주고 있다. 기쁨은 동참하기를 선택하고 '기꺼이 해보죠'라고 말하는 데서 나온다. 애니와 조에게는 '그건 우리가 신경쓸 일이 아니야. 여기는 서점이야. 결혼식장이 아니라고' 하고 말하는 편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북스 서점은 좋은 책들을 진열하는 외에도 매주 재즈 밴드를 초청하고, 시 낭송회, 낚시회, 강연 등을 열기도 한다. 내가 방문하기 전 일요일에는 서점 안에 500마리의 강아지들이 모였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하느냐이다. 서점 주인이거나, 선박 건조인이거나, 아기를 돌보는 보모이거나 간에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만 해도 되겠지만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해 볼 수도 있다. 
한 마디 더 
우리가 일을 하고, 일을 확장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그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하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고 유명해진다면 무슨 일이건 상관없다? 
산스크리트어에는 '인생의 목적'이라는 의미로 '다르마'라는 말이 있다. 다르마의 법칙에 따르면 우리 각자는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고유한 재능이 있다. 그 재능을 표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 법칙에 따르면 우리 대부분은 '내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줄 것인가'라고 물을 때 그러한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빌 게이츠는 세계 최고의 갑부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는 돈보다는 소프트웨어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음반을 내기 위해 노래를 시작했다. 부자가 되는 것은 목표가 아니라 부산물로 따라오는 결과이다. 
유명세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인기인들이 번거롭고 불편하게 생각한다. 누가 자기 집 뒷 담장에 낯모르는 사람들이 기어오르기를 바라겠는가? 누가 50여 명의 사진사들이 길 건어에서 망원렌즈를 자기 집 화장실 창문에 겨냥하고 있기를 바라겠는가? 
너도나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 도로 포장은 누가 하란 말인가? 
도로 포장이 나에게는 천직이 아닐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은 그 일을 사랑할 수 있다. 
전화가 걸려오지 않고, 교외에서 큰 트럭을 타고, 컨트리 뮤직을 들으면서.... 그 일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 
우리 이웃인 울프강은 외과 의사이다. 최근에 볼로냐식 스파게티를 먹는 만찬에서 그는 우리에게 그날 오후에 자신이 집도한 산뜻한 치질 수술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누군가의 엉덩이를 수술하는 상상을 하면서 생각했다. 
'이 친구는 정말 웃긴다니까.' 
그런데 나는 그가 농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울프강은 절단 수술에 대해 진지하며, 훌륭한 치질을 사랑한다. 울프강은 치질을 묘사할 때 생기에 넘친다. 
사람들마다 다른 일을 좋아한다. 우리는 각자 다른 걸음으로 다른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일을 하기 위해 가고 있으면 누군가 동참하는 사람도 생길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면 문제가 없을까 
천만에! 인생의 목적은 문제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흥미진진하게 사는 것이다. 
돈을 벌 수 있는 최선의 기회는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는 데 있다. 사랑은 힘이다. 
사랑을 가지고 일하면 모든 일이 '양질의 에너지'로 채워지면서 그러한 에너지가 돈으로 변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좌절과 고통이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요즘 나오는 책들이 장밋빛 환상을 심어주는 데 대해 동조할 수 없다. 그런 책들은 '꿈을 쫓아가기만 하면 저절로 수레에 돈을 싣고 갈 수 있다'고 말한다. 
한 마디 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좀더 수월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흥미로운 삶을 살기 위한 비결이다. 따라서 더 많은 책임감과 문제점들을 해결해야 할지도 모른다. 
BEING HAPPY! 
나의 첫 책이 된 'BEING HAPPY!'의 원고를 출판사로 들고 찾아다닐 때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자기계발 지침서가 필요 없습니다." 
또한 모두들 'BEING HAPPY!'와 같은 책을 쓸 자격을 갖추려면 내가 정신과 의사여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렇게 말하지 않은 단 한 사람은 내가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년 반 동안 거절을 당하다가 나는 선견지명이 있는 출판사인 싱가포르의 미디어 마스터스를 찾아냈다. 미디어 마스터스는 출판 시장이 극도로 경쟁이 심하여, 신문과 텔레비전에서는 무명 작가에 대해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전략이 필요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직접 'BEING HAPPY!'를 선전하기로 결정했다. 싱가포르에서 처음 책을 출간할 때 나는 이젤과 마이크를 들고 시내에 있는 거의 모든 서점을 찾아 다녔다. 만화를 그리고, 나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책에 사인을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에 가면 학생들과 이야기했고, 회사에 가면 직원들과 이야기했다. 우리는 'BEING HAPPY!'가 싱가포르에서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를 때까지 그 계획을 그대로 계속했다. 그러고 나서 말레이시아, 호주 등지에서도 같은 전략을 사용했다. 
나는 지구촌의 각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6년을 보냈다. 창고와 감옥에서 연설을 했고 수많은 쇼핑 센터에서 만화를 그렸다. 나의 다음 책은 '전세계의 쇼핑몰'이 될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행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어떤 날은 호텔 방에서 눈을 뜨며 생각했다. 
"다음 서점에 들어가면 거기다 토하고 말 거야." 
한 서점에서 한 도시로, 한 도시에서 나라 전체로, 그리고 마침내 국제 시장에서 'BEING HAPPY!'가 팔리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신문과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우리를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웃지 못 할 일도 많았다. 항공회사가 파업을 하고 있는 와중에 호주 전체를 돌아다니며 선전 여행을 했는가 하면, 뉴질랜드에서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그림을 그리게 했다. 
미국에서 'BEING HAPPY!'를 출간할 때는 언론의 주목을 끌기 위해 맨해튼의 5번가에 있는 호주 대사관에서 칵테일 파티를 열었다. 우리는 미국의 동부 연안에 위치한 신문사, 뉴스 보도국, 텔레비전 방송국, 라디오 방송국에 거의 빠짐없이 초대장을 보냈다. 그날 200여명을 접대했다. 그리고 1990년 6월 20일 출판 기념회를 위해 뉴욕으로 날아갔다. 
우연히도 6월 20일은 넬슨 만델라라는 친구가 역시 뉴욕으로 날아온 날이었다. 보잘것없는 앤드류가 넬슨 만델라보다 더 큰 뉴스거리라고 생각한 언론인은? 아무도 없었다. 
혼자서 칵테일 파티를 해본 적이 있다면, 그것도 열한 명의 웨이터들과 함께였다면, 그 파티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백만 권이 팔릴 때가지 어떻게 하셨나요?"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 
"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면서, 오백 번 연설을 하고, 천 번 인터뷰를 했으며, 스물 세번 짐을 잃어버렸답니다." 
이것은 책이나 사업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언제라도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행운보다는 노력이다. 
열정에 대하여 
우리가 자신이 하는 일을 소중히 여긴다면 자연스런 열정이 우리를 몰고 간다. 스스로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자극도 필요하지 않다. 
만일 '꿈의 레스토랑'을 개업했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고 하자. 대만원을 이룰 때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요리법과 아이디어를 개발해야 한다. 만일 돈이 떨어진다면 우리가 가진 정열을 자금이 풍족한 누군가에게 전해 주고 동업을 할 수도 있다. 좌절을 겪고, 몇 번 요리사를 갈아치우지만 마음속으로 우리는 그것을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많은 결단이 필요하겠지만 우리의 열정이 기초가 되어 줄 것이다. 
생명력은 목적 의식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나오며 우리에게 생기를 불러일으켜 주는 다른 사람에게서도 얻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불 속에 들어가 본 적도 없이 이미 재가 되어 버린 냉담한 사람들도 있다. 
우리의 꿈을 쫓아가는 일이 쉬운 길은 아니다. 대개는 삶이 더욱 힘들어지기도 하지만 내면의 여행을 출발하는 외면의 여행에 승선해 보자. 우리에게는 누구나 활짝 꽃을 피우고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한 마디 더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역경이란 없다. 우리는 나무가 아니라 인간이다. 
무슨 변명을 할까 
독자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앤드류, 나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네. 하지만 자넨 내 상황을 몰라서 하는 소리야." 
만일 마음속에 충족되지 않은 꿈을 가지고 있다면 어째서 그 꿈을 이루어 보려고 시도하지 않는지 그 변명을 한번 들어보기로 하자.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다지 솔직하지 못하다.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말은 사실은 불편하다는 의미이다. 
메리는 말한다. 
"나는 사실 고고학을 공부하고 싶지만 그건 확실히 불가능해요." 
그러나 그녀가 말하려는 진짜 의미는 '고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입학 자격을 갖추어야 하고,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해야 하며, 융자를 받아야 하고, 4년 동안 저녁에 외출할 수 없으며, 또는 위의 모든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녀는 고고학이 그런 희생을 치를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메리가 하려는 말은 이것이다. 
"내가 그런 일을 하리라고 기대한다면 미친 사람이야." 
"난 아파트를 가지고 싶다." 
짐은 이렇게 똑같은 말을 23년째 되풀이하고 있다. 
그 말에서 짐은 '내가 더 열심히 저축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혹은 내가 더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된다면, 또 좀더 싼 아파트에 살지 않아도 된다면'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짐은 여전히 세를 살고 있다. 
메리와 짐이 사는 방식을 옳다거나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약한 일은 그들이 마치 선택권이 없는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직업을 바꾸기가 불가능하다고 단정한다.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나서 정신이 들 때까지는 스스로 장단을 맞추거나 주위 환경과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춘다.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도 전에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선고를 기다리는 것인가? 
내가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다면 
인간은 놀라운 일을 해낸다. 
다리 하나에 팔은 둘이지만 양손이 없이 태어난 미국인 로저 크로포드를 생각해 보자. 
로저는 프로 테니스 선수가 되었다. 그는 프로의 지위에 올랐으며 테니스 코치를 해서 돈을 벌었다. 
우리는 그의 책 '마음으로 하는 경기'에서 그 자신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로저의 이야기는 우리가 말하는 한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캘리포니아 펀데일에 사는 디지털 댄은 암에 걸려 후두를 제거하기 전까지 목수였다. 
그는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디스크 자키가 되었다. 직접 말하는 대신 랩 탑 컴퓨터에 자신이 할 말을 타자하면 랩 탑 컴퓨터가 이야기를 한다. 
자신의 꿈을 성취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유형이 있다. 
그들은 종종 희박한 가능성을 딛고 일어선 경우가 많다. 
우리는 천식 환자가 육상 챔피언이 되고, 파산자가 재벌이 되는 경우를 본다. 
읽고 쓸 줄도 모르던 이민자들이 대학교수와 회사 사장이 되는 이야기를 수없이 많이 듣는다. 
조건이 불리할수록 사람은 살아 남기 위해 강인한 정신력을 발휘한다. 우리가 생존을 위해 발전시키는 힘이 바로 비장의 무기이다. 
한 마디 더 
우리는 항상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무언가를 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다른 곳에 에너지를 쏟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일이 불가능한 이유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가'이다. 
'나는 이 일을 하겠다. 아무리 힘들어도 상관없다'고 말할 때 삶이 우리를 돕기 시작할 것이다. 
제7장 스스로를 사랑하라 
 
하느님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는 이제 성공해도 좋다'고 말해 주지 않는다. 
자, 우선 시작하자 
지혜로운 사람은 생각한 뒤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행동한다. 
앞으로 하게 될 일에 미리부터 명성을 쌓을 수는 없다. 
이런 일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집이나 직장에서 책상에 앉아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한 사람이 자기 전화번호를 적어 두라고 부탁한다. 나는 잠시 연필을 찾을 동안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연필을 찾으면서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쓰레기를 뒤지기 시작한다. 병원 영수증, 비행기표, 보험 증권, 피자 상자, 알약 병, 커피 잔, 그리고 날짜 지난 신문까지.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여기 어디 연필이 있을 텐데...." 
이제 서랍을 열고 뒤지기 시작한다. 회중 전등 전지, 이쑤시게, 골프티, 살빼기 작전 팸플릿, 결혼 사진, 홍콩에서 남은 잔돈, 아이들 크레용까지. 아, 크레용! 결국 레몬색으로 숫자를 휘갈겨 쓰고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제 보험 증권을 찾았으니 잘 보관해야겠다.' 그러고 나서 비행기표는 '여행' 파일에 철하고, 커피 잔은 식기 세척기에 넣는다. 이미 정해져 있는 목록대로, 지우개는 위 서랍에, 전화번호부는 책꽂이 위에, 피자 상자는 쓰레기통에 들어간다. 그리고 전화기에 묻은 초콜릿까지 닦아 낸다. 
그러자 갑자기 어떤 목표가 생긴다. '사무실을 깨끗하게 정리해야지.' 가슴을 설레면서 계획을 한다. '파일들을 색깔 라벨로 구분해야지. 필통 하나에는 볼펜만 넣어야지. 쓰레기통은 매주 비워야겠어.' 
그 다음에는 사무기구보다 큰 대상을 목표로 삼는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일터로 만드는 것이다. 자정이 될 때까지 연필 한 다스를 발견하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이제는 진공 청소기에 한창 재미를 들였으니까. 
이런 식의 사무실 청소 법칙은 보고서를 작성하고, 도랑을 파고, 세금을 지불하고, 세차하는 일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시작한 후에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흥분하게 된다. 우선 뛰어들고 나면 에너지와 열정이 솟아난다. 
우리는 종종 '힘이 생기면 매일 아침마다 조깅을 할거야'라고 말한다. 천만에! 먼저 시작하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숙제를 하겠어.' 그게 아니다. '힘이 생기면, 작은 사업을 시작하겠어.' 그게 아니라니까. 
일단 일에 뛰어들면 일에 대한 에너지와 열정이 생긴다. 우리는 일에 휩쓸리면서 에너지를 얻는다. 그 비결은 시작에 있다. 
일을 시작할 때 알아야 하는 또 다른 사실은, 어떤 일이건 결코 완벽하게 준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연설을 예로 들어보자. 연설을 하기 위해 100퍼센트 완벽한 준비를 할 수 있겠는가? 안 된다. 아무리 여러 번 써 보고 오래 연습해도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하고 말할 것이다. 결혼식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식장에 입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 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완전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완벽하게 준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준비한 뒤 심호흡을 하고 뛰어드는 수밖에 없다. 
프레드는 말한다. 
"실패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해주시오. 그러면 시작하겠소." 
아닐세, 프레드. 우선 시작해 보게나.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면, 완전한 대답이나 어떤 보장을 기대하지 말고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한 마디 더 
일에 대한 생각이 아닌 행동의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행동이 우리를 자극하고 기회를 가져다준다. 첨벙, 뛰어들어 보자. 
성실성 
모든 스승들과 심리학자들은 우리에게 '자신을 믿으라'고 말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자신을 믿을 수 있기 전에 먼저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많은 사람들은 약속과 책임의 문제에 접하게 되면 겁쟁이가 된다. 그들은 무언가를 하겠다고 말하고,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우리를 돕겠다고 약속하고 낚시를 간다. 그들은 청구서를 내겠다고 약속하고 도망쳐 버린다. 그러고 나서는 어째서 자신의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인지 의아해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는 자신이 그 일을 끝까지 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시작해야 한다. 필요한 경우에 약속과 책임을 줄일 수 있지만, 무슨 말을 하건 간에 자신이 하는 말을 지켜야 한다. 점차 자신의 말이 자신을 위한 법이 되면 그때 마침내 우리는 진정으로 자신을 믿을 수 있다. 
용기에 대하여 
편안함은 하인으로 출발해서 주인이 된다. - 칼릴 지브란 
사람들은 빗속에서 노래하는 가사를 쓰지만, 현실에서 비에 몸이 젖으면 신음을 한다. 우리는 우글거리는 뱀과 거미에 무릎까지 빠져서 걸어가는 '인디아나 존스'를 보면서 좋아한다. 하지만 사무실에 에어컨이 들어오지 않으면 폭발하고 만다. 아마도 비디오에서 모험을 적게 본다면 일상 생활에서 좀더 많이 모험을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생활은 '편안함'을 과대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는 '돈'에 대한 편안함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편안함을 이야기하겠다. 
우리가 받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편안함에 대한 중독증 때문에 생겨난다. '비행기는 항상 시간을 지켜야 한다. 표준 작업량은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 은행 당좌대월은 편리해야 한다.' 등등. 
지나친 편안함은 지루함을 낳는다. 두뇌가 멈추어 버린다. 만일 우리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에 대해 규칙을 정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좀더 수월하게 대응하게 될 것이다. 
어떤 종류의 꿈을 좇고 있다면 때로는 불편한 일을 겪을 수 있다. 거절당하고, 욕을 먹기도 하고, 돈은 떨어지고, 기진맥진할 것이다. 역경이 찾아오면 그것을 과정의 일부로 생각하라. 열정을 가져라. 흥미를 가져라. 즐거움을 찾아라. 불리한 위치에 서 있는 상황에서 재미를 느껴 보라. 
편안함에 대해서는 또 다른 선입견들이 있다. 우리는 종종 용기가 IQ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때문에 좌절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프레드는 말한다. 
"나는 지식인이야. 학위를 두 개나 받았다고. 그런데 나보다 머리 나쁜 사람들이 일도 더 잘하고 돈도 더 많이 받는다니 믿을 수가 없군." 
보상은 우리가 자신의 명성이나 돈, 아니면 그 두 가지를 모두 희생할 각오로 모험을 할 때 주어진다. 
한 마디 더 
용기는 두려움의 부재가 아니다. 용기는 두려움을 불사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위대한 모험을 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 그들은 작은 일에도 무서워서 벌벌 던다. 차라리 무언가 큰일을 두려워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우리를 칭찬해 주고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들에게서 교훈을 배운 적이 있는가? 우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에게서 중요한 교훈을 배운 적은 없는가? - 월트 휘트먼(Walt Whitman(1819--1892): 미국의 대표적인 시인. 대표작으로 시집 '풀잎', 산문집 '민주주의 전망' 등이 있다. 
우리는 달콤한 말을 해주는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싶어한다. 그래야만 일이 잘못되면 누군가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 줄 테니까. 우리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은 다소 불편하겠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자 
'마음 가는 대로 해라'는 말은 나약해지라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은 험하고 자연의 법칙은 냉혹하다. 약한 양은 여우에게 잡아먹힌다. 약한 사람들 역시 잡아먹힌다. 약한 동물은 여우에게 사냥하기 쉬운 목표물이 되며, 눈에 띄면 물리고 만다. 
어느 날 한 개구리가 시냇가에 앉아 있었다. 전갈이 와서 말했다. 
"개구리 씨, 이 시내를 건너고 싶지만 나는 전갈이라 수영을 할 수 없네. 자네가 나를 등에 태워서 건네주면 고맙겠군." 
개구리가 대답했다. 
"하지만 자넨 전갈이고, 전갈은 개구리를 물지." 
그러자 전갈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왜 자넬 물겠나? 건너편에 가야 하는데 말야." 
그러자 개구리가 대답했다. 
좋아, 내 등에 타게. 데려다 주지." 
그런데 시내를 반쯤 건넜을 때 전갈이 개구리를 물었다. 개구리는 고통으로 몸을 뒤틀면서 말했다. 
"왜 그랬어? 이제 우린 둘 다 빠져 죽을 거야." 
전갈이 대답했다. 
"왜냐하면, 난 전갈이고, 전갈은 개구리를 무는 거야." 
전갈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를 같이 끌어내릴 수만 있다면 자신이 빠져 죽는 것도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피해야 한다. 때로는 자신의 위치를 지키면서 맞서야 한다. 언제? 자신에게 물어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지 또는 나를 친절하게 생각할지 눈치 보지 말고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고 동의하게 만들다가 지쳐 버리면,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도 나를 좋아하지 않고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어 버린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기 내면의 지침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 다른 말로 하자면 마음가는 대로해야 한다. 
막연한 두려움 
언제나 해 왔던 것을 한다면 언제나 받았던 것만 받게 될 것이다. 
'용기'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배짱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는지, 부동산을 샀는지,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는지, 새로운 것을 사게 되었는지에 대해 물어 보면 그들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에게 질문한다. '만일 최악의 사태가 일어난다면 내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이 '할 수 있다'라면 그 일에 뛰어 들게 만든다. 큰 모험이건 작은 모험이건 다 마찬가지이다. 예를 몇 가지 들어보기로 하자. 
* 테드는 아파트에 살까 말까 망설인다. 그는 묻는다. 
"그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는 무엇인가?' 
"직장을 잃고 그 아파트를 헐값에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저축한 돈이 없어져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시 시작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어떻게든 해보겠어." 
그는 아파트를 산다. 
* 얀은 제인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싶다. 그는 자신에게 묻는다. 
"그래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는?" 
"그녀가 내 얼굴에 콜라를 뿌릴지도 모르지. 그 정도 대접에는 익숙하다. 한번 해보겠어." 
* 루이스는 고고학을 공부하기 위해 의학을 그만두고 싶다. 그녀는 자신에게 묻는다. 
"그랬을 때 가장 최악의 사태는 무엇일까?' 
"아빠는 화가 나서 몹시 흥분하시고 친구들은 내가 미쳤다고 하겠지. 그리고 나는 공부를 두 배는 더 열심히 해야할 거야. 그게 최악이라면 견뎌 낼 수 있어.: 
한 마디 더 
'그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부정적인 접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그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열의가 있는지를 측정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우리가 느끼는 막연한 두려움을 구체적인 가능성으로 만들면, 그 모험이 좀 더 흥미롭게 느껴질 것이다. 
마음을 비우자 
궁사가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활을 쏠 때는 모든 기술이 발휘된다. 그가 챔피언이 되려고 활을 쏘면 이미 초조해진다. 상금이 그를 분열시키고, 그는 노심초사한다. 그가 활쏘기보다 승리에 더 집착하면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그에게서 힘을 빼앗아 간다. - 장자(B.C. 369--286): 이름은 주, 전국 시대 송나라 사람. 도가 사상의 중심 인물이다.) 
방망이를 휘두르거나 골대를 향해 공을 차 본적이 있다면 스포츠가 게임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리고 어째서 다 큰 어른들이 회계사, 트럭 운전사, 뇌수술 전문의, 호텔 사무원 할 것 없이 뙤약볕 아래, 퍼붓는 빗속에서 공을 가지고 주말을 보내는지 이해할 것이다. 
탁구대에서, 배드민턴 코트에서, 스키 연습장에서 우리는 인생의 법칙을 배운다. 스포츠는 재미를 주는 이상으로 우리에게 개인의 힘에 대해 가르쳐 준다. 우리가 배우는 것을 한번 살펴보자. 
현재에 전념해야 한다 
지나친 생각이 해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점수에 대해 잊고 있을 때 가장 멋진 공을 던지고 가장 멋진 슛을 날린다. 승패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더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억지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힘은 마음을 비울 때 나온다. 아무 생각 없이 골프 공을 힘껏 페어웨이를 향해 날려 보라. 우리가 굳이 자신의 힘을 증명하지 않으려고 할 때 가장 강한 힘이 나온다. 이 법칙은 또한 사람을 다루는 일에도 적용된다.  
여유를 가져라 
화를 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골퍼가 화를 내면? 이미 게임이 끝난 거나 다름없다. 권투 선수와 카 레이서가 성을 내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부모와 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를 증오하지 말고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아라 
세상 사람들을 증오하면 우리의 에너지가 고갈되고, 정말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싶은 의욕이 없어진다. 
세상이 나에게 등을 돌렸다고 생각하면 생각대로 해라 
다른 사람들을 비난해도 소용이 없다. 일단 모든 일이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심판, 바람, 공 할 것 없이 모두 나의 인생을 파괴하려고 나설 것이다. 성공한 운동 선수는 다른 유능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최대한 스스로 책임을 진다. 그들은 어머니를 탓하지 않는다. 
특별한 성과는 특별한 헌신으로부터 나온다. 
무관심한 구경꾼들은 마이클 조던이나 스테피 그라프가 단지 재능을 타고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스타들은 일반인들이 자기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자시에게 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포츠에서나 삶에서나 우리는 자신이 바라는 상황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더블보기를 저지르거나, 골프 공이 물에 빠지거나, 글러브에서 공이 빠져나가는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왜?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말한다. 
"네트에 공을 치면 안 되는데." 
그러면서 공이 네트에 걸리는 그림을 마음속으로 그린다. 우리는 자신에게 '그러면 안 되는데' 하고 말하면서 마음속으로 잘못된 그림을 그린다. 그러고 나서는 오로지 그 마음속 그림을 가지고 일에 임한다. 그러면 네트에 걸린 공 그림이 그 일을 실제로 일어나게 만든다. 
두려움은 스포츠에서 뿐 아니라 면접 시험을 보거나 연설을 하는 등, 우리가 잘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하는 동안 우리를 위협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에 집중해서 마음속으로 불운한 그림들을 그리면 재난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는 상황에 마음에 집중해야 한다. 
한 마디 더 
모든 아이들은 스포츠를 통해, 트로피가 아니라 교훈을 얻게 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아이들은 스포츠에서 출발 지점이나 경기 규칙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배운다. 
나도 할 수 있다. 
나는 어릴 때 추기경, 주교, 장관, 정치가, 경제 지도자 등 정상에 선 사람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그 자리에 서고 보니 그들이 모른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다. - 데이비드 마호니(David Mahoney(1923--): 미국 출신의 신경과학 전문가.) 
내가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저너 씨 가족을 방문하곤 했다. 그 집에는 언제나 냉장고에 코카콜라가 있었다.(어머니는 그들이 부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 집에서는 물을 마셨다.) 그래서 나는 콜라가 있는 집을 '대단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우리 냉장고에서 콜라를 보았다. 그제서야 나는 코카콜라가 슈퍼스타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때는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대단하게' 보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오로지 장례식에 참석할 때만 정장을 입었는데, 그걸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점차 정장을 입었다고 해서 천재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열두 살이었을 때 호주의 수상이 되고 싶었다. '수상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거야.' 그 바람은 다소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다. 
내가 책을 쓰기 전까지는 작가들이 모든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때때로 우리는 모든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전문가들이 있다는 식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공적인 사람들이 초능력자는 아니다. 그들에게도 뇌는 하나밖에 없으며, 하루는 24시간이고, 보통 두 팔과 두 다리를 갖고 있다. 그들은 기술과 방법을 연마해서 그것을 시장에 내놓은 것이다. 우리도 자신의 기술과 방법을 연마해서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한 마디 더 
특별히 성공하도록 허락을 받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신이 구름 속에서 내려와서 '이제 네게 때가 왔다'고 말해 주지는 않는다. 그가 '너는 할 수 있다' 또는 '너는 할 수 없다'고 말해 주지도 않는다. 우리 스스로 해야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바꾸거나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전념하면 그것을 도와주는 방법이 생긴다. 사람들이 나타나고, 친구들이 책을 빌려주고, 광고가 눈에 들어오고, 우연히 적시적소에 가게 되고.... 
그런 경우 우리가 기회를 좀더 잘 인식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기회를 불러들이는 것일까? 양쪽 모두이다. 
나는 1983년 10월 19일을 기억한다. 그날 나는 이제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지난 25년간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겠노라고 결심했다. 3일 후에 무심코 전에 들은 적도 없는 라디오 방송을 켰다가 어떤 강좌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는 그 과정을 수강했고, 그 일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내가 특수한 경험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흔하게 일어난다. 그 열쇠는 우리가 가진 열의이다. 열의란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겠다는 진지한 다짐이다. 
한 마디 더 
일단 우리가 무엇을 할지 결정하면 방법이 나타난다. 그런 행운을 만나면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심히 관찰해 보면, 그런 일이 우리에게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제8장 세상을 받아들여라 
 
마음이 편해지길 원한다면 모든 일에 '좋다' 또는 '나쁘다'는 딱지를 붙이지 말라. 
새옹지마 
옛날에 한 농부가 살았다. 그에게는 아들 하나와 말 한 마리가 있었다. 어느 날 농부의 말이 달아나자 이웃들이 찾아와서 그를 위로했다. 
"말이 달아나다니, 정말 운이 없군요." 
그 농부는 대답했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누가 알겠소." 
"물론 불운이지." 
이웃들이 말했다. 
일주일 후에 농부의 말이 집으로 돌아왔는데 야생마 스무 마리가 뒤따라 들어왔다. 농부의 이웃들이 축하하러 와서 말했다. 
"말이 돌아오고 거기에 스무 마리가 더 생겼으니 정말 운도 좋군요." 
농부가 대답했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누가 알겠소." 
다음날 농부의 아들이 야생마를 타다가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 이웃들이 와서 그를 위로했다. 
"이런 불운이 생기다니." 
그러자 농부가 말했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누가 알겠소." 
그러자 이웃 사람들은 화를 벌컥 냈다. 
"당연히 불운이지, 이 어리석은 늙은이!" 
또 한 주가 지났을 때 군인들이 와서 마을에 사는 건강한 젊은이들을 모두 먼 나라의 전쟁터에 데리고 갔다. 다리가 부러진 농부의 아들은 집에 남을 수 있었다. 이웃들이 축하하러 왔다. 
"아들을 보내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오." 
농부가 말했다. 
"누가 압니까?" 
우리는 모든 일의 득실을 따지면서 평생을 보낼 수도 있다. 
'이것은 좋고, 이것은 나쁘고.' 
그것은 무익한 짓이다. 우리는 전체 그림에서 단 1퍼센트만 나쁘게 보여도 그 일에 '재난'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세상일이 잘못되었다고 믿는 한 계속해서 잘못될 것이다. 발버둥을 치고 소리치면서 사는 한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을 바꾸면 모든 일이 변한다. 
비행기를 놓치면 우리는 말한다. 
"큰일났다. 급한데.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 비행기를 탔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사람들이 나를 넘어가면서 내 무릎에 커피를 쏟고, 짐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세상과 싸우면 세상이 항상 이기는 법이다. 
'인생에는 우연이란 없다. 나는 내가 원해서 여기 있는 거다'라고 말하는 순간 모든 일이 달라질 것이다. 옛 친구를 만나고, 새 친구를 사귀고, 시간을 내서 책을 읽으면 삶은 개선되기 시작한다. 
논리적인 사고가 항상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직장에 지원했다가 실패했다고 하자. 만일 '그건 내 직장이나 다름없었어. 난 자격과 경험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제 내 인생은 망쳤어'라고 한다면 좌절하게 된다. 일주일 동안 좌절하고, 스스로 원한다면 평생 동안 좌절할 수도 있다. 우리는 훌륭한 논리적 이성으로 자신의 경우를 항의할 수 있다. 그 항의는 타당할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좀더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다면 모든 일에 좋거나 나쁘다는 딱지를 붙이지 말아야 한다. 딘 블랙은 그의 저서인 '우물 안 개구리'에서 두 가지 실화를 소개하고 있다. 
* 열여섯 살짜리 올스타 농구 선수인 커트 브링크맨은 농장에서 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다. 
* 선천적으로 맹인이었던 중년의 남자가 시력을 찾았다. 
농구 선수인 커트 브링크맨은 우수한 휠체어 운동 선수가 되고 나서 말한다. 
"나는 다리를 가지고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금방 적응하고 있다. 만일 내 다리가 아직 있다면 뭘 하고 싶어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기대에 부풀어 있다.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 않다." 
맹인이었으나 외과 수술로 시력을 찾은 52세의 남자에 대해 그의 정신상담 의사였던 리처드 그레고리가 말한다. 
"맹인이었을 때 그는 아주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침내 눈을 뜨고 보게 되자 이전에 자신이 이룬 공적들이 가치 없어 보이고 자신의 위치가 어리석게 생각되었죠." 
그 남자는 실망감에 사로잡혀 지내다가 1년 만에 우울증으로 죽었다. 
사고방식이 삶의 질을 규정한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두 가지로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 세상은 엉망이다. 
* 세상은 그런 대로 살 만하다. 
세상은 엉망이다 
누구는 사기를 치고 도둑질을 하고, 누구는 게으르고, 누구는 너무 많이 먹고, 누구는 낭비를 하고, 누구는 캐비어를 먹고, 누구는 콩을 먹는다고 우리가 모든 일에서 고민하고 트집을 잡는 동안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 또한 불평은 우리 자신 역시 불행하게 만든다. 
우리는 캘커타의 굶주림을 지적하면서 말한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지 않는 변명이 될 수 있다. 만일 내가 인도인이라면, 또는 만일 내가 캘커타에 살면서 인도인들을 돕고 있다면 아마 그 상황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먼 곳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을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만일 우리가 그 상황을 변화시키고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고민만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상의 어머니였던 테레사 수녀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은 행동한다. 
세상은 그런 대로 살 만하다. 
또 다른 선택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한다. '세상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증거가 무엇인가?' 달은 지구 주위를 돌고,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장미꽃이 피고, 새들은 노래하고, 사람들은 결혼하고, 이혼하고, 이웃들은 싸운다. 이 모두가 위대한 우주 법칙의 일부이다. 
'사람들은 병들지 말아야 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태양은 너무 크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세상일이란 원래 그런 법이다. 
메리는 말한다. 
"나는 세계 평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행복하지 못할 거야." 
그 말은 고상하게 들리지만 그다지 지혜롭지는 않다. 우리는 행복하게 지내면서 자신이 속한 세상의 작은 한구석을 좀더 평화롭게 만들 수 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세상일을 개선하는 책임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 
규칙을 정하지 말자 
은퇴한 행정관이 나에게 말했다. 
"나는 백만 달러짜리 사업에 대해 고심하곤 했죠. 그런데 이제 창문을 닦고 잔디를 깎는 일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큰 걱정거리가 없어지니까 하찮은 일에 걱정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사실이다. 우리는 걱정거리를 찾는다. 열두 시간이 걸리는 비행기 여행을 하는 자신을 상상해 보자. 방금 이륙을 했으므로 이제 편안하게 쉬면서 잠도 좀 자 보려고 기대하고 있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코를 곤다. 정확하게 6초마다 코를 곤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 안돼! 이 친구는 메트로놈처럼 코를 고는군. 만일 이 멍청한 녀석이 코고는 걸 참지 않아도 된다면 행복할 거야." 
나는 혼자서 말한다. 
"일 분에 열 번 코를 고니까 곱하기를 하면.... 프랑크푸르트까지 칠천이백 번 코를 골겠군. 내 생애에서 최악의 밤이 되겠어." 
지금까지 뒷자리에 아기가 자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아기가 말똥말똥 깨어나서 울어대기 시작한다. 쉬지 않고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쉬지 않고 우는 아기를 무시해 버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코고는 사람은 문제가 안 되는군. 나는 나쁜 습관을 참을 수 있지만 울어대는 아기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이때 일은 점점 더 악화된다. 갑자기 비행기가 흔들리더니 땅으로 떨어져 내린다. 얼굴로 피가 솟구치면서 내장이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듯 하다. 모두들 비명을 지른다. 나는 구명 재킷에 손을 뻗으면서 신과 거래를 한다. 
"이 추락에서 나를 구해 주신다면 다시는 코고는 사람에게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유럽까지 줄곧 우는 아기를 기꺼이 참고 견디겠습니다." 
비행기가 수평을 찾더니 올라가기 시작한다. 
기장은 예기치 않았던 소동을 사과한다. 아기는 울기를 멈추고 옆 사람은 다시 잠이 든다. 나는 평화롭게 다시 낱말 맞히기로 돌아간다. 
그리고 어떻게 될까? 옆 사람이 다시 코를 골기 시작한다. 
"오, 제발! 이 친구가 코를 골지만 않는다면 행복하겠어." 
인생은 다 그런 거다. 
우리는 '걱정 등급'을 갖고 가장 중요한 것들부터 걱정한다. 다리가 부러져 있을 때는 다리가 치료될 때까지 두통을 걱정하지 않는다. 코를 고는 남편들은 침실에 불이 나기 전가지 우리를 괴롭힌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덜 초조해질까? 
우리가 받는 스트레스는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규칙에 의한 것이다. 그 규칙의 일부를 늦추거나 모두 버린다면 현실이 우리의 규칙을 무시한다고 화를 내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의식적인 결심을 할 수 있다. 
'아무도 나의 하루를 망치게 하지 않겠다. 거만한 은행원, 주차장 안내원, 교통 경찰, 시비조의 웨이트리스가 내 24시간을 망치게 하지 않겠다.' 
그러면 불손한 호텔 프런트 담당자와의 대결 역시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한 마디 더 
화를 내지 않고 신나고 즐겁게 살 수 있다. 인생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거나,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규칙을 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좀더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 
두 가지 이유가 있다. 
* 우리는 환경이나 날씨처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조절할 수 없다. 우리가 완전하게 조절할 수 있고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생각뿐이다. 
* 외부 세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만 있다면 행복하겠어'라고 말한다. 천만에! 우리는 24시간 정도 행복하면 그 후에는 불평거리를 찾는다. 신형 포르쉐를 달라고 기도하자 하늘에서 떨어진다. 나는 뛸 듯이 기뻐한다. 그 차를 타고 슈퍼마켓에 갔는데 아이들이 쇼핑 카트로 공격한다. 그러면 나는 곧 이렇게 말한다. 
"저 불량배들을 잡을 때까지는 행복할 수 없어." 
지난주에 우리를 괴롭혔던 사건들을 기억해 보라. 교통 지옥에 시달리고, 남자친구가 내 생일을 까맣게 잊고, 지갑을 잃어버렸다. 괴로운 것은 그 사건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구라도 당연히 화를 낼 거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천만에! 모두는 아니다. 우리는 각자 사물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한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생각이며 우리는 그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다. 
한 마디 더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변화시킴으로써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다. 또한 생각에 따라 감정도 달라진다. 
마음의 평화 
마음의 평화가 필요한 이유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많은 사랑을 원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면 마음의 평화가 필요한 이유는? 사랑과 평화는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여자친구나 남자친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판단하지 않고 경험하는 것이다. 만일 사랑을 추구한다면 좀더 평화로울 것이다. 만일 평화를 추구한다면 더 많은 사랑을 얻을 것이다. 
평화는 신경안정제가 아니다. 평화는 균형이다. 
격투기 선수가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균형이다. 카라테(일본의 호신술)에서는 우리의 힘이 균형과 마음에 달려 있다고 배운다. 지나치게 흥분하면 승산이 없다. 골퍼들은 균형에 대해 알고 있다.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면 빵점이다. 대신 긴장을 풀고 자신의 힘을 감지하면서 잡념을 없애고 나면, 성공이다. 그 모든 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균형, 또는 마음의 평화는 힘의 원천이다. 평화롭다는 것은 축 늘어져 있는 상태가 아니다. 평화로움은 맞서 싸우기보다는 힘과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의미한다. 평화로움은 더 넓은 그림을 보면서 자질구레한 일에 매달리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자동차 할부가 끝나면 좀더 평화로울 것이다 
프레드는 말한다. 
"청구서를 모두 지불하면 어느 정도 평화를 찾을 거야." 
이론상으로는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그 결과는 대체로 실망스럽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주된 목적은 대출을 갚거나 수영장을 넓히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한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단서를 주고 있다. 
*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돕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 중심 목표가 개인적 안전에 국한된 사람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또한 이생에서 절대적인 안정을 원하는 사람은 행성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프레드는 말한다. 
"만일 교외에 작은 집을 한 채 가질 수만 있다면, 만일 퇴직 수당을 한밑천 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안정될 것이다." 
물론이지, 프레드. 교차로에 서서 달아나는 버스에 대고 계속 그 말을 해보게나. 우리의 유일한 안정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다른 곳에 있는 안정은 믿을 수 없는 신화이다. 은행이 무너지고 회사가 사라지고 비행기는 하늘에서 떨어진다. 
그러면 우리는 예측불허의 삶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그대로 인정하라. 그것을 즐겨라. 사는 재미의 반은 '다음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자신과 협정을 맺자. '무슨 일이 일어나건 감당할 수 있어.' 두려움이 엄습하면 스스로에게 말하자. 
"만일 우리 집이 불에 타면 이사를 하겠다.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면 그만두겠다. 버스에 치이면 지구를 떠나겠다." 
끝. 이것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지구는 위험한 장소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간다. 그렇다고 해서 겁먹은 토끼처럼 살수는 없지 않은가? 
어떻게 하면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될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어느 정도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일상적인 습관을 통해 가능하다.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들에게서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매일 평정을 유지하는 훈련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명상을 하고, 어떤 사람은 새벽에 해변을 걷는다. 각자가 자신의 안식처와 침묵을 찾는다. 그들은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서 자신의 외면을 바라본다. 
4년 동안 나는 심신의 안정을 가르치는 주말 강좌에 다녔다. 나는 사람들이 실제로 안정을 배우고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말했다. '두통이 사라졌어요. 요통이 사라졌어요. 사업이 잘되고 있어요. 아이들이 전보다 즐거워해요. 남편의 행실이 바로 잡혔어요. 골프 실력이 늘었어요.' 대부분 그 참석자들은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었다. 저절로 '되는' 것이다. 
서구 세계에서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나는 거기에 대해 반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무언가를 하기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모든 일에 맞서 싸우기를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는 투쟁을 믿으면서 성장한다. 우리는 세상일을 강요하고 사람들을 밀어붙이라고 배운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지치고 긴장하게 만든다. 
나는 어렵사리 마음의 평화를 배웠다. 내가 초상화가가 되기로 했을 때 그 무엇도 나를 막지 못하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나의 비법은 '일주일에 7일, 하루 10시간씩 그림을 그린다. 그래도 잘 안 되면 밤새워서 그린다'였다. 나는 한심한 그림을 그렸다. 지치고 좌절하자 나는 세상일이란 필사적으로 매달린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인생은 우리가 투쟁이라고 주장하는 동안 투쟁으로 이어진다. 순리를 따라야 하는 일들도 있는 것이다. 
한 젊은 청년이 위대한 격투기 선수를 만나기 위해 일본 전역을 여행했다. 신세라는 사람을 접견하고 그가 말했다. 
"세계 최고가 되고 싶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그러자 신세가 말했다. 
"10년." 
"스승님, 저는 매우 열심입니다. 밤낮으로 연습하겠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걸릴까요." 
청년이 다시 묻자 신세가 대답했다. 
"20년." 
현재에 전념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으면서,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현재에 사는 것은 외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다. 떨어지지 않을 수 없지만, 연습을 통해 점점 오래 균형을 유지하게 된다. 우리가 현재에 전념하기 위한 두 가지 전략이 있다. 
* 무슨 일을 하든지 필요한 만큼 시간을 들여라. 
인생을 서두르면서 살지 말라. 우리가 믿음 체계가 '시간이 별로 없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결코 충분하니 시간이 없다. 버스를 타러 다려가고, 엘리베이터를 타러 달려가고, 전화를 받으면서 점심을 먹는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자신에게 말하라.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 오로지 지금 하고 있는 것에 전념하자.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는 상관없다. 서두르지 말자.' 
* 개처럼 느껴 보자. 
개를 데리고 산책을 가면 무언가를 관찰할 수 있다. 개들은 모든 사물에 주의를 기울인다. 덤불, 꽃, 잡초, 소화전.... 아무리 여러 번 같은 개를 데리고 같은 장소를 산책해도 언제나 그 개에게는 새로운 경험이다. 개들은 현재에 살고 있다. 
만일 우리가 개처럼 느껴 보려고 한다면 자신의 마음이 대체로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음식을 먹으면서 한 입 한 입 맛을 느껴 보자.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낱말 하나 하나를 들어보자. 노래에 귀를 기울이면서 모든 음정을 들어 보자. 산책을 하면서 모든 나무들을 바라보자. 점차 거기에 숙달될 것이다. 
자신에게 주장하라. '시간은 충분해.' 하나의 주장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면 잠재의식의 일부가 된다. 쫓기는 기분이 들 때마다 자신에게 상기시키자. '시간은 충분하다.' 
수피교(이슬람교의 신비주의)의 신비주의자들은 '우리는 잠든 채로 태어나서, 잠든 채로 생을 살고, 깨어나기 전에 죽는다'고 말한다. 나는 그들이 우리의 의식 활동을 두고 하는 말로 생각된다. 우리는 무언가를 하면서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도 정신은 딴 곳에 가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밧줄 위에서 오래 견딜 수 있을수록 삶은 보다 향상된다. 
안정이 필요한 이유 
우리는 모든 일에서 어떤 결과를 뒤쫓고 있다. 그러나 심오한 평정, 명상 또는 기도를 할 때는 그와 다르다. 우리는 결과를 쫓을 수 없다. 그런 일들은 분명 장기적으로 어떤 혜택을 준다. 단, 현재에 전념해야 한다. 안정을 취하는 일은 행위 자체가 보상이 된다. 그러한 행위는 우리가 무언가를 '얻으려' 노력한다기보다는 즉, 무엇을 '한다'기보다는 그 안에 '있는' 상태이다. 
우리가 반복해서 이러한 내면의 안정을 연습하면 그 특성이 우리의 일상 생활 속으로 침투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좀더 편안하고 직관적이 된다. 마치 향기로운 물속에 옷을 담그는 것처럼, 매번 조금씩 진한 향기가 남는다. 우리 모두는 내면의 목소리에 접근하지만 그 미묘한 소리를 듣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바쁘고 시끄럽다. 그러나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진정시키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가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직관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 
정신적 안정이 건강에 좋다는 연구는 계속해서 확인되고 있다. 잘 알려진 두 명문 대학의 조사팀이 양로원에 거주하는 73명의 노인을 매일 명상을 하는 사람들과 아무 치료도 하지 않는 사람들로 나누어서 연구했다. 4년 후에 명상을 하지 않은 사람들의 절반이 세상을 떠났다. 명상을 한 사람들은 계속 살아 남았다. 
1978년 로버트 키이스 윌리스는 10년에 걸쳐 명상자들을 대상으로 혈압, 청력, 그리고 근거리 시력의 세 가지 지침을 기준으로 신체 연령을 측정하는 연구를 완성했다. 5년 이하의 기간 동안 명상을 한 사람들은 신체 연령이 명상을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평균 5년이 더 젊었으며, 5년 이상 명상을 한 대상자의 신체 연령은 평균 12년이 더 젊었다. 즉 5년 이상 명상을 한 60세의 노인은 48세의 몸을 갖고 있었다. 
나는 안정을 취하거나 명상을 하거나 기도를 하면 좀더 편안하고 여유로운 기분이 든다. 그러다가 곧 나태해져서 기도와 명상을 그만둔다. 그러면 점차 삶이 힘겨워지고 짜증이 난다. 자제력을 잃는다. 그래서 다시 매일 안정을 취하다 보면 삶이 점차 제자리를 찾는다. 
바쁜 사람들은 이러한 주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명심할 점은 '쉴 시간이 없을수록 절대적으로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실천을 하지 않는다. 
안정은 우리에게 분명한 행복감을 제공하는 외에도 또 다른 혜택들을 준다. 즉 다른 사람들을 자신과 똑같이 느끼도록 만들 수 있다. 우리가 평화롭게 느끼고 있으면 평화로운 사람들과 좀더 평화로운 상황을 불러들이게 된다. 화를 내는 사람들은 평화로운 사람들을 보면 좀 유별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싸움을 찾아다닌다. 만일 화를 내는 사람들과 만나야 할 경우에라도 우리 마음이 상대적으로 평화롭다면 그들은 대체로 우리에게 이끌려 오고 훨씬 바람직하게 행동하게 된다. 
만일 안정이나 명상을 위한 기술을 배울 필요가 있다면,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발전시킬 수 있는 다양한 책들과 그룹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안정과 명상을 위한 비결 
* 정신적인 치유는 일상적인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매일 같은 시간을 정해서 해야 한다. 주위가 산만하지 않은 이른 아침에 하루를 준비하는 것이 가장 좋다. 
* 앉아서 해야 한다. 누워 있다 보면 잠이 들게 된다. 
* 시간이 없을수록 안정을 취해야 한다. 명상을 하는 시간보다 명상이 우리에게 돌려주는 시간이 더 많다. 자동차를 정비하듯이 자신을 '정비'한다고 생각하자. 매일 20분이 우리의 능률을 향상시켜 준다. 
사람들이 역겨울 때 
이렇게 해보자. 논쟁에 휘말릴 때마다 상관, 남편, 친척들과 불화가 있을 때마다 거기서 한걸음 물러서자. 혼자 조용히 앉아서 안정을 위한다. 그들을 받아들이는 자신을 느껴 본다. 상상을 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게 사랑을 표현한다. 그것이 자신에게는 어색하고 생경한 기술처럼 보일지라도 어쨌든 시도해 보자. 논리적으로 따지려 하지 말고 그냥 그 기술을 사용하자.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 아마 놀라운 결과를 경험할 것이다. 
한 마디 더 
안정되고 평화롭게 지내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하루를 시작하자. 언젠가는 깨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순항을 하게 될 것이다. 매일 마음의 평화를 목표로 삼으면, 삶이 점차 개선될 것이다. 
파동을 감지하자. 
하루 종일 황야를 헤매고 다녔는데도 힘에 넘칠 수도 있는 반면, 쇼핑몰에서 오전을 보내고 나서 트럭에 치인 것처럼 피곤함을 느낄 수가 있다. 
우리 주변에 있는 풀, 나무, 물, 콘크리트, 플라스틱, 유리, 폴리에스터 등등은 모두 어떤 파동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 파동을 감지할 수 있다. 
숲과 정원은 치유적인 파동을 갖고 있어서 우리의 에너지를 충전해 준다. 콘크리트에 둘러싸인 쇼핑몰과 주차장은 그와 다른 파동을 갖고 있어서 우리의 에너지를 뽑아 낸다. 성당은 고결한 파동을 갖고 있다. 탁자에 비닐을 덮은 지저분한 음식점은 에너지를 저하시키는 장소이다. 담배 연기로 자욱한 바와 스트립쇼장은 우리의 에너지를 벗겨 내는 장소이다. 
우리의 건강과 감정이 환경의 미묘한 에너지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에너지가 고양되면, 질병과 다른 사람의 우울함에 저항할 수 있다. 반대로 에너지가 저하되면 좌절과 질병을 불러들인다. 
한 마디 더 
우리는 자신의 몸을 어디에 둘지 선택할 수 있다. 어떤 레스토랑이나 호텔 방보다는 집에서 지내는 편이 더 낫다. 자신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직관을 믿어야 한다. 우리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장소를 피하라. 어떤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차라리 걸어 다니자. 
자기만의 공간을 가져라 
전 세계의 문화마다 각각 시간에 대한 고유의 전통과 예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 인디언 청년과 아프리카 부시맨은 청년기에 자신의 동족을 떠나서 산꼭대기 위에 앉아 있거나 숲 속을 걸어다니며 자신의 목적을 찾는다. 
예수, 석가모니와 모하메드 같은 성인들은 모두 고독으로부터 영감을 얻었으며 수많은 승려, 신비주의자, 구도자들이 그들의 전철을 밟았다. 
우리에게는 전화벨이 울리지 않고, 신문이나 시계가 없으며, 통장의 잔고를 잊을 수 있는 신성한 장소가 필요하다. 침실 한구석이건, 발코니건, 숲 속이건 간에 어디라도 묵상과 창조력을 위한 곳이 될 수 있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무언가를 그 하나만 잡으려고 해도 세상 모든 것이 거기에 따라오는 것을 깨닫는다. - 존 무어(John Muir(1838--1914): 스코틀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탐험가. 자연주의자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7세기 이래 과학은 뉴턴(아이작 뉴턴)식 접근법을 취해 왔다. 즉 무언가를 이해하기를 원하면 그것을 잘게 부수어서 조각들을 조사한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더 작은 조각들로 부수고 분자에서 원자로, 원자핵으로, 소립자로.... 그리고 마침내 우주를 이해한다. 과연 그럴까? 
워즈워스의 시를 한 편 선택해서 그것을 전제조건과 대명사로 나누고 낱말을 한 자 한 자 나누어 보자. 그 시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될까? <모나리자>를 화가가 붓놀림한 대로 나누어 보라. 
과학은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을 해 왔다고는 해도 스펙트럼의 일면에 불과하다. 
과학은 분해한다. 지능은 세상을 분리한다. 
반면 마음은 사물을 한데 합친다. 
지식과 지능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우리가 친구를 분석하면 그의 장점을 볼 수 없게 된다. 세상을 분석하고 분해하면 나 자신이 분열된다. 
반면 우리가 마음의 눈으로 전체 그림을 보면 좀더 가깝게 느껴진다. 사랑을 하면 그 대상과 곧바로 연결된다. 
우주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사물을 잘게 쪼갤수록 본질을 잃어버리게 된다. 
한 마디 더 
분석의 반대는 통합이다. 우리가 몸을 전체적으로 보살피고 인간성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때 심신이 건강해진다. 
감사와 마음의 평화 
우리가 평생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만 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 마이스터 에카르트(Meister Eckhart(1260--1327): 독일 최대의 사색적 도미닉파 신비주의자. 후대에 와서 루터 신앙의 선구자, 칸트의 비판적 이상주의의 선각자라고 평가받고 있다.) 
잠시 자신의 삶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모든 판단을 중지해보자. 내일 아침 일어나서 하느님, 알라, 인디언의 주신, 여호와 등등 우리가 우주의 힘을 일컬어서 부르는 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해보자. 
"제게 삶과 가족과 집과 친구들과 아침식사를 주셔서 감사하며, 또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보통 때보다 더 만족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겠는가? '우리 가족을 만나 보지도 못했으면서....' 라고 투덜거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다음날 또 그 다음날에도 감사하게 느낄 수 있다고 상상해 보자. 어떤 특별한 평온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우리 대부분은 우리를 그다지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피드백을 받으면서 성장한다. 그러다가 얼마 안 가 우리 자신이 가족, 연인, 자동차, 직업에 대해 불만스럽게 여긴다. 우리는 자신에게 없는 무언가에 연연해한다. '만일 일에서 어떤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만일 내가 메르세데스 벤츠를 탈 수 있다면....' 그러니 마음의 평화가 달아날 수밖에. 
우리가 무언가에 매번 감사할수록 점차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감사하다'고 말할 때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과 내가 있는 장소를 그대로 받아들이겠다. 나는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마음의 평화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에 전념함으로써 가능하다. 일단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이면 모든 일들이 어떻게 우리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한 마디 더 
마음의 평화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언젠가는 감사하는 마음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만일 감사하기를 원한다면 감사하면서 잠에서 깨어나라. 만일 '내 인생이 나아지면 감사하겠다'고 말한다면, 결코 나아질 리가 없다.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인생의 의미를 찾는 책을 보면 죽음에도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 
만일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삶이 좀더 공정해지지 않을까? 적어도 우리가 실수한 것을 만회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새로 얻은 지식을 삶에 적용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방금 버스에 치여서 죽었다면 '고속으로 달리는 버스는 피해야 한다'는 교훈을 깨달았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75년 동안 살아도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아인슈타인은 우리를 달래 준다. 그는 에너지가 생성되지도 파괴되지도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영혼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다. 분명 우리의 뼈는 데이지꽃의 거름이 되겠지만 우리에게는 살과 뼈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우리의 영혼은 어딘가로 가지 않을 수 없다. 
'육신을 떠나는 경험' 또한 초월적인 존재를 암시해 준다. 직접 경험을 하지 않았어도 그런 이야기를 들을 적이 있을 것이다. 몰리 숙모는 내게 이야기한다. 
"내가 수술대 위에 있을 때 갑자기 내가 몸에서 떠나더구나. 나는 내 자신의 수술을 내려다보고 있었어. 의사가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한단다. 그들이 시카고 불스 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면 내 말을 믿겠니?" 
우리는 단지 육신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면 육신이 아닌 다른 부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인슈타인과 몰리 숙모는 삶이 계속된다는 가설을 뒷받침해 준다. 동양과 서양의 사상은 우리가 숨을 거둔 후에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는 가설에 동의한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가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있지만 죽음은 분명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삶을 즐기게 해주는 자극이 된다. 정말 놀라운 섭리가 아닌가? 
가장 고약한 사고방식은 '이승에서는 고통을 받겠지만 저승에서 보상을 받을 것이다'라는 생각이다. 정말 대단한 기회를 가지고 있는 셈이군. 그보다는 훨씬 더 좋은 생각이 있다. '내세가 웃소매에 무엇을 감추고 있든지 간에 우리의 현재 목표는 여기서 지금 나의 인생을 즐기는 것이다.' 
한 마디 더 
사랑, 확신, 동정심, 바구니 짜기 등 무슨 일에서든 우리가 이승에서 갈고 닦는 품성과 재주는 당연히 우리 자신의 소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확실한 투자는 여기서 지금 자신을 최대한 개발하고 그러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제9장 완전한 용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은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 
콘플레이크 상자에서 경품 대회를 보았다고 하자. '열 단어 이내로 다음 물음에 답하시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나라면 뭐라고 쓸까? 
집을 물려받아서 물건들로 가득 채운다? 
백만 달러를 벌어서 버뮤다로 간다? 
골프 핸디캡을 한 자릿수로 낮춘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인생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것을 말이다. BMW 자동차와 구찌 구두는 단지 장식일 뿐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본질에서 빗나가서 하찮은 일에 신경을 쓴다. 가죽 옷이나 최신형 노래방 기계 등등. 
거의 모든 노래 가사와 모든 영화의 주제는 무엇인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는 진정한 재산이 무엇인지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비극을 겪고 있는가? 
마리안느 윌리암슨은 임종을 맞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점을 강조한다. 죽어 가는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한다. '내가 손주 20명을 더 만들었더라면....' 또는 '어머니와 자식들을 잘 보살펴라'와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내 자동차를 잘 간수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럼, 다시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해 보자. '서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가 정답처럼 들리지 않는가? 
미국의 한 병원에서 실험을 했는데, 그들은 신생아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한 그룹에서 하루 세 차례씩 10분 동안 얼러 주었고 다른 그룹은 얼러 주지 않았다. 첫 번째 그룹은 두 번째 그룹보다 체중이 두 배로 늘었다. 이런 종류의 치료법을 일컫는 복잡한 의학 용어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전문 용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말로 충분하다. 아기들은 사랑이 없으면 자라지 않으며, 어른들도 또한 사람이 없으면 틀림없이 똑같은 고통을 겪는다. 
다 성숙한 사람들이 나에게 때때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수도 없이 듣는다. 
"평생 소원이 우리 아버지한테서 내가 자랑스럽다는 말을 듣는 겁니다. 평생에 소원이 아버지한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거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좀더 사랑을 받기 위한 시도이다. 거리에서 스쳐 가는 사람들, 사무실에 걸어 들어오는 사람들 모두가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쓰고 있고, 누군가는 사랑을 얻기 위해 미친 짓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왜 이렇게까지 안달을 할까? 
왜냐하면 인생을 보람되게 살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이다. 만일 우리의 최우선 순위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에게 무엇을 가장 중요한지를 생각해 보면 그 말의 의미를 개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도 다음과 같은 기준에서 평가해 볼 수 있다. 
"만일 내가 ....를 한다면 그것이 나의 인생에, 우리 가족, 친구들, 이웃의 삶에 더 많은 사랑을 가져올 것인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마다 껴안아 줄 필요는 없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반드시 제3세계에 쌀 봉투를 건네 줄 필요도 없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비판하지 않는 것이다. 그를 비판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 것을 입게 해주고, 원하는 대로 살게 해주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한 용서 
용서는 제비꽃이 자기를 밟아 뭉갠 발꿈치에 남기는 향기이다. - 마크 트웨인 
우리는 흔히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머릿속으로 규칙을 정한다. 그래서 그 규칙을 깨는 사람을 원망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규칙을 무시한다 해서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우리 대부분은 그들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 벌을 줄 수 있다고 믿으면서 성장한다. 즉, '내가 너를 용서하지 않으면 너는 고통스러울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고통스러운 쪽은 나다. 나는 가슴에 응어리가 지고 잠을 이루지 못한다. 
다음 번에 누군가를 원망하게 되면 눈을 감고 자신의 느낌을 경험해 보라. 자신의 몸을 느껴 보라. 다른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면 자신 또한 불행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대로 행하고, 아는 만큼 알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어도 달라지지 않는다. 결국은 우리 자신의 삶을 망칠 뿐이다. 세상은 언제나처럼 거기에 있다. 태풍 때문에 우리 집 지하실에 홍수가 났다고 해서 날씨를 원망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런데 우리는 왜 사람들을 원망하는가? 폭풍과 갈매기를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통제할 수 없다. 세상은 죄와 벌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죄와 벌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맨 먼저 우리의 삶을 보람되게 살기 위한 첫 단계는 부모를 용서하는 일이다. 물론 그들은 완벽하지 않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는 '성공적인 육아법'에 대한 대중 심리 서적을 통달하지 못했으며, 게다가 우리를 키우는 외에도 다른 걱정거리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던 간에 다 지나간 일이다.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루하루를 괴롭게 살기로 작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불행은 선택이다 
우리는 말한다. 
'누군가 끔찍한 일을 저지르면 어쩌지? 그를 용서해야 할까?' 
나에게는 샌디 맥그리거라는 친구가 있다. 1987년 1월에 정신분열증 환자가 권총을 들고 그의 거실로 걸어 들어와서 10대의 세 딸을 살해했다. 그 비극으로 샌디는 고통과 분노의 지옥에 떨어졌다. 그가 겪은 고통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시간이 지나고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분노를 거두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 범죄자를 용서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샌디는 지금 사람들에게 용서와 마음의 평화를 얻도록 도와주면서 살고 있다. 그의 경험은 가장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우리의 원한을 거두는 것이 인간적으로 가능하다는 증거이다. 또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 분노를 거두었다고 샌디는 말할 것이다. 
나는 샌디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대강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그룹은 자신의 분노와 비통함의 감옥 속에 머물게 되고, 다른 한 그룹은 보기 드문 이해심과 동정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건들은 보통 우리가 선택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가 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경험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실연, 질병, 고독, 좌절.... 우리 각자는 자신의 몫을 가지고 있다. 어떤 지독한 상실감을 겪은 후에는 비탄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경험이 우리를 더 강하고 더 부드럽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샌디만큼 호된 시련을 겪지 않은 우리도 마찬가지 선택을 해야 한다. 
'자신의 인생을 보람있게 살고 싶은가, 아닌가?'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가, 아니면 적어도 좋아해야 하는가? 
물론이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불쾌감을 준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생각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동시에 그들은 상대방에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바란다. 뭔가 모순이 있지 않은가?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가 없어'라고 말하면서 아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화를 낼 수 있는가? 분명 건강한 인간 관계를 갖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좋아하고,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는 없다. 우리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자기 잘못 때문에 꼼짝달싹 못하는 사람은 위안을 받으려는 희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서 같은 잘못을 찾으려 하고 그것을 발견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자신의 잘못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세상은 우리를 계속해서 벌주게 될 것이며, 또한 우리 스스로 자신을 계속해서 벌주게 될 것이다. 질병, 가난, 고독 등등. 우리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한 세상은 우리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을 탓한다. 
자신을 사랑하라는 의미는 
간단히 말해서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태까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의미이다.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일을 중단하자. 완벽하려고 하지 말고 발전하려고 노력하자. 
자신의 단점에 대해 용서하면 우리와 같은 단점을 가진 다른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용서하게 된다. 
타인은 우리 자신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다.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면 언제나 우리가 성숙하기 위해 필요한 메시지를 받게 된다. 즉, 우리 자신에게서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자녀들을 위해서 부모는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 
아이들은 부모를 본보기로 삼는다. 우리가 자신에게 고통을 주면 그들도 자신에게 고통을 주게 되고, 그러면 다시 그들이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 
한 마디 더 
우리가 자신을 용서하면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게 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의 의미 
사랑은 두 사람, 즉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를 치료해 준다. 
나는 이웃을 사랑하리라는 말이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고 믿고 있다. 
* 그를 판단하지 말라. 
* 그에게 딱지를 붙이지 말라. 
* 그에게 어떤 기대를 하지 말라. 
이것은 우리를 수많은 좌절과 실망에서 구해 주는 매우 실용적인 전략이다. 또한 대부분의 정신적 가르침만큼 훌륭한 심리학적 조언이다. 
우리는 흔히 말한다. 
"만일 프랭크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한다면 그 친구를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몰라." 
먼저 프랭크를 사랑하라. 
그러면 그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용서와 사랑은 동일하다. 우리가 아기들을 사랑하기가 좀 더 쉬운 이유는 그들이 순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나 사랑을 찾아보기로 한다면 그 관계가 진전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원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마디 더 
우리는 누군가를 어떤 식으로 사랑하고 있을까? 사랑을 '수용'이란 단어로 대체해 보자. 완전한 수용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가족에 대하여 
가족은 왜 필요한가? 
가족은 우리에게 무조건적 사랑에 대해 가르쳐 준다. 
우리는 사무실에 동료를 두고 떠나고 술집에 친구들을 두고 떠날 수 있다. 그러나 가족은 다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시시콜콜 알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묶여 있으며, 어쨌든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가족들 간에는 생김새가 어떻든, 나에게 무슨 일을 해주건 간에 서로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내면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벨벳 털의 토끼'라는 이야기에 나오는 '털 빠진 말'은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진짜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야. 저절로 생겨나는 거야. 한 아이가 너를 오래오래 사랑한다면, 단지 같이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너를 사랑한다면, 너는 진짜가 되는 거야.... 갑자기 그렇게 될 수는 없어. 차츰차츰, 오랜 시간이 걸리지. 그래서 쉽게 약속을 깨거나, 성질이 급하거나, 조심성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지 않아. 보통 우리가 진짜가 될 때쯤이면 다정한 손길 때문에 털이 대부분 빠지고 눈은 처지고 관절은 약해져서 아주 초라해진단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어. 왜냐하면 일단 진짜가 되면 못생기게 보이지 않으니까.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못생겼다고 하겠지만. 
가족을 대접하라 
우리가 종종 저녁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에게 가족을 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대접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아마 집에서 손님들을 대접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틀 동안 가장 좋은 은그릇과 도자기로 식탁을 차리고 해산물, 딸기, 프랑스산 샴페인을 대접하면서 보내고 나면, 다시는 그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다! 
다음 주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찾아오면 그들은 음식 찌꺼기를 먹는다.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 친절하다. 아마 우리도 언젠가 그런 대접을 받을 것이다. 부모님들을 위해 가재요리를 남겨두자. 
내가 비로소 아버지를 포옹하는 법을 배운 것은 그의 여생이 몇 년 남지 않았을 때였다. 많은 부자 관계가 그렇듯이 나는 여덟 살이 되자 아버지를 더 이상 껴안지 않았다. 나는 '남자다워'지기를 원했다. 진짜 사나이는 애정을 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20여 년이 걸렸던 것이다. 
나는 작가이기 때문에 때때로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내 얼굴을 보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일요일의 톱기사가 월요일에 쓰레기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자신에게 물어 본다. 
"나는 정말 알고 있으며 나에게 의지하는 사람들 - 나의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 - 에게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그들에게 믿을 만하고, 의지할 만하며, 자상하고 너그러운 사람일까?" 
중요한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배우자를 후원하라 
배우자와의 관계를 이끌어 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협동, 또 하나는 경쟁이다. 
프레드는 오후 6시에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이미 두 시간이 늦었다. 메리는 걱정이 되어서 안절부절 못한다. '남편에게 무슨 일에 생긴거지?' 8시 15분에 프레드가 문으로 걸어 들어온다. 그가 아무 일도 없이 멀쩡한 것을 보면서 그녀는 '이렇게 늦게 집에 올 거면 적어도 사고를 당했어야죠'라고 말하듯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프레드 역시 소리치기 시작하고 메리는 무시무시한 침묵으로 대항한다. 곧 그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그녀는 침대로 가서 베개에 꽂아 놓은 메모를 발견한다. 
'일찍 사무실에 가야 하니까 7시에 깨워 주시오.' 
프레드는 다음날 아침 9시 30분에 깨어나서 자기 베개 위에 놓인 메모를 발견한다. 
'7시예요. 일어나요.' 
그래서 많은 부부들은 서로를 바보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나는 협력 관계를 추천하는 바이다. 
나는 나를 도와주고 격려해 주면서 사는 아내에게 감사한다. 나는 내가 쓰는 글과 내가 하는 일에서 일일이 아내의 조언을 구한다. 그녀의 도움이 없다면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 바짝 다가앉으면 웨이터들과 비행기 승무원들이 물어본다.  
"신혼이신가 보죠?" 
우리는 그 말을 엄청난 찬사로 생각한다. 
함께 살기로 선택했다면 서로를 도와야 한다. 만일 우리가 배우자를 돕지 않는다면 자신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자. 
사랑과 두려움 
'기적을 이루는 과정'을 보면 우리에게는 사랑과 두려움이라는 두 가지 정신 상태가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두려움은 부정적인 감정의 근원이다. 매우 단순한 그 개념은 우리가 자신의 감정을 관찰하는 유용한 출발점이 되어 준다. 
제인은 말한다. 
"내가 화를 내면 그건 분노예요. 두려움이 아니라고요." 
생각해 보자. 남편 빌이 술과 향수 냄새를 풍기면서 집에 돌아온다. 제인은 몹시 화가 난다. 그녀는 소리치고, 비명을 지르고, 부엌에서 접시를 내던진다. 실제로 그녀가 비명을 지르는 이유는 겁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겁이 나고, 그를 잃게 될까 봐 겁이 나고, 그의 윗도리에 묻은 기다란 금발 머리카락이 겁이 난다. 우리가 화를 내고 있을 때 우리는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짐은 보증을 선 일이 걱정된다. 짐은 말한다. 
"내가 걱정하고 있을 때는 단지 그것이 걱정되어서입니다." 
'걱정'은 두려움을 의미하는 또 다른 단어이다. 아무런 두려움도 없다면 무슨 걱정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걱정하고 있을 때는 겁을 내고 있는 것이다. 
질투는 어떤가? 질투 또한 두려움이다. 그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고, 남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질투하고 있을 때 우리는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분노 뒤에는 언제나 질투, 걱정, 좌절이 숨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과 두려움이란 개념이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좀더 자신에게 솔직해지도록 도와 줄 수 있다. 우리가 화를 내는 이유는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두려움을 없애고 싶다면 먼저 두려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당신은 나를 질투나게 만들 가치가 업서'라고 말하는 한 우리는 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에게 '그가 멋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왜 겁을 먹는가'라고 물어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질투에서 풀려나기 시작한다. 그러면 상대의 잘못 대신 자신의 두려움을 인식하게 된다. 일단 두려움을 인정하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두려움을 인정하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설명하기가 쉬워진다. 
"여보, 내가 화를 낸 이유는 내가 두려워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그 3천 달러 짜리 옷을 사고 나면 우리가 일년 동안 먹을 것이 없을까 봐 두렵답니다." 
"당신이 집에 늦게 올 때 내가 소리를 지르는 이유는 당신이 길에서 무슨 사고라도 당하지 않았는지 두려워하기 때문이에요. 만일 당신을 잃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답니다. 그래서 두려운 거죠." 
우리가 자신의 두려움을 인정하면 다른 사람들을 탓하지 않게 된다. 
"나는 지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 잘못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가 더 이상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두려움이란 감정을 설명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반응을 보인다. 상처를 인정하는 것은 욕설을 퍼붓는 것보다 효과가 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화를 내는 이유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이 우리를 공격할 때 실제로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그다지 겁이 나지 않게 된다. 
우리는 말한다. 
'사랑과 두려움이 두 가지의 주된 감정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겁을 먹고 있다는 말입니까?' 
물론! 많은 사람들은 혼비백산 겁을 먹고 있다. 바보처럼 보이거나 뚱뚱하게 보일까 겁을 내고, 일자리를 잃을까 겁을 내고, 체면을 잃을까, 또는 돈을 잃을까 겁을 내고, 강도를 당할까 겁을 내고, 늙는 것을 겁내고, 혼자가 되는 것을 겁 
내고, 사는 것을 겁내고, 죽은 것을 겁낸다. 그래서 그렇게 펄펄 뛰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기분을 풀어 줄 수 있을까? 사랑하라. 
제10장 먼저 자신을 변화시켜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세상이 아니라 너 자신을 바꿔라 
우리가 지치다 못해 지치고 피곤한 것에도 지치면, 그때 우리는 변하게 된다. 
고속도로 위에서 사람들이 모두 나를 죽이려고 덤벼드는 것처럼 생각되는 날이 있지 않았는가? 
화가 나서 집을 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길에서 나를 밀어 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짜증을 내면서 사무실을 나오면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나에게 욕을 한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랑에 빠지면 세상이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가! 
세상은 거울이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느끼는 것이 외부에 반영된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은 외부적인 요인으로 바꿀 수 없다. 
만일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이 불친절하다고 해서 거리를 바꾼다고 해도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또한 만일 직장에서 아무도 나를 존경하지 않는다고 직장을 바꾼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 대부분은 그 반대로 세상일을 배웠다. '만일 직업이 마음에 안들면 바꾸어라.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어라.' 때로 직업이나 배우자를 바꾸는 것이 불가피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 역시 변하지 않으면 언제나 매한가지이다. 
제랄드 커피 대위는 북베트남에서 전쟁 포로로 7년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변화된 마음가짐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처음에 나는 내 처지를 바꿔 달라고 신에게 기도했죠. 하느님, 제게 5분만 주시면 잡히기 전에 다른 곳으로 도망가겠습니다.... 하느님, 미국이 승리해서 저를 여기서 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는 또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도가 바뀌었죠. 제가 좀더 나은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그래서 포로가 된 경험을 참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경험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환경을 바꾸어 달라'는 기도에서 '나를 바꾸게 해달라'로 바뀌었다. 그는 기본 원칙을 발견하고 그 관점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이 갖는 어떤 의미를 발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건 간에 거기에 있는 이유는 그 상황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거기에 있는 이유이다. 신에게 우리의 처지를 바꿔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절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변할 때까지 우리는 여전히 그 상황을 겪게 된다.  
만일 메리가 결혼 생활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녀 자신이 변화해야 한다. 메리는 말한다. 
"주여, 만일 남편 프레드를 변화시켜 주시기만 하면 저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천만에! 프레드는 메리를 원망하면서 변하기를 거부한다. 메리는 프레드와 이혼한다. 다음에 메리는 말할 것이다. 
"만일 남편 척을 변화시켜 주시기만 하면 저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신이시여, 제발 내 환경을 변화시켜서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라고 한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나를 변화시키고, 이에 대한 내 생각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어떤 상황에 대해 생각을 바꾸면 상황도 따라서 바뀐다.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물리학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300년 전에 뉴턴은 모든 물체가 고정적이며 불변하는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양자 물리학과 하이젠버그의 불확실성 원리는 그와는 다른 그림을 제시한다. 즉 물체의 성질은 관찰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물리학은 성인들의 변함없는 가르침, 즉 어떤 사물이나 상황은 보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우리가 생각을 바꾸면 생활도 바뀔 것이다. 생활을 변화시키는 것은 내면적인 일이다. 누군가 함께 행동해 주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우리가 움직이면 세상이 움직인다. 
우리가 변하면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도 변화되거나, 아니면 새로운 사람들로 바뀌게 된다. 즉 그들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동안 우리도 그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한 마디 더 
인간 관계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은 가능하지만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병상에 누워 있다가 몇 주일 만에 처음 외출을 해본 적이 있는가? 하늘, 나무, 풀 한 포기만 바라보아도 가슴이 설레지 않는가? 5년 만에 처음 옛 친구를 만나면 즐겁지 않은가? 삶이 갑자기 풍요로워진 듯 느껴진다. 그러나 세상이 변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변한 것이다. 기쁨은 신선한 시각으로부터 온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를 취하기보다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들을 버릴 필요가 있다. '그 여자는 너무 뚱뚱해. 그는 코가 너무 크지. 그녀는 입이 너무 커' 하면서 사람들의 단점을 열거한다면, 마음의 평화가 방해를 받는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잘났다고 착각할 수는 있겠지만, 세상과 사람들이 신통치 못하다고 혼자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세상과 그 속에 위치한 자신의 자리에 대해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크나큰 구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같이 시간을 보낼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자신의 주변 환경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모든 사물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말라.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마음의 평화이므로 굳게 결심하고서라도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도록 하자. 
프레드는 말한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나를 부정적으로 만드는걸." 
성숙은 우리의 생각과 행위에 대해 책임지기로 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시작되네. 자네의 마음을 스스로 책임진다면, 프레드, 그 마음을 바꿀 수가 있네. 
우리가 주변 사람들에게서 미덕을 찾는다면 자신 안에서 더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우리의 시각으로 판단한다. 우리의 세상 경험은 실제로는 자신에 대한 경험일 뿐이다. 그러니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울을 탓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 마디 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려 한다면 자신을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헛될 뿐이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누구를 만나면 그 만남이 신성한 만남임을 기억하라. 내가 그를 보고 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그를 대접할 때 나 자신을 대접하게 될 것이다. 이를 명심하라. 그 사람 안에서 나를 찾을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다. - 기적을 이루는 과정 
세상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경이롭다. 너무나 절묘하게 계획되어 있어서 모든 사람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교훈을 얻도록 되어 있다. 
성인들이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모두 하나이므로 너의 성숙이 나의 성숙이며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라고 가르쳤다. 한 차원 위에는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우리가 변할 때마다 다른 모든 것이 변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주변 환경이 '우리의 욕구와 일치하는'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칼 융은 '동시 발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 의미는 '인과 관계가 아니지만 의미가 통하는 두 사건들이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만일 우리가 동시 발생이라는 개념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 우리의 삶은 목적을 갖게 된다. 
*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에게서 어떤 목적을 발견하게 된다. 
* 자신을 희생 제물처럼 느끼지 않게 된다. 
생각해 보자. 만일 우리가 세상을 창조한다면 사람들에게 자신을 향상시킴으로써 자신의 주변을 향상시킬 기회를 주겠는가? 아니면 모두 희생자로 만들겠는가? 
아마 혹자는 '60억의 인구가 항상 적시적소에서 서로 적절한 교훈을 배우게 하려면 정말 시간을 기가 막히게 맞춰야겠군'이라고 말할 것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아마 인체 속에서 수 십 억의 다른 세포들이 상호 작용하는 것이나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동시 발생성과 개인과 전체와의 연결성이라는 개념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자신을 분리하고 있을 때는 다름 사람을 탓하기 쉽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인정하면 자신과 타인들에 대해 좀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행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일수록 '합일'의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중요한 피드백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환경이 자신을 따라오리라고 기대한다. 성취욕이 강한 사람은 결코 인생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운명에 대하여 
'숙명'이니 '운명'이니 하는 말은 우리 인생에 어느 정도까지 적용될까?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생의 방향을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거나 아니면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정해진 길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스스로 선택을 하고 있다(불가능하다고? 나는 신이 그런 식으로 계획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위대한 사람들은 끊임없는 매일의 노력을 통해 스스로 위대성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는 가야하는 길이 있지만 누군가 자신을 데려가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세상 법칙을 배우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치게 된다 
* 단계1: 특별한 목표가 없다. 인생이 우연이라고 믿고 아무데로나 정처 없이 걷는다. 희생자의 정신 상태이다. 
* 단계2: 목표를 정하고 일한다. 목표를 설정한다. 계획과 훈련된 노력이 함께 특별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때때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지만 그렇다고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 단계3: 자신을 준비한다. 현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순리에 따르다 보면 종종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노력과 시기 선택을 적절히 조화시킬 줄 안다. 초조함과 좌절이 아닌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는다. 우리가 안정과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면 투쟁심 대신 도전심이 생긴다.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한 가지 큰일이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사소한 많은 일들 속에서 의미와 연관성을 찾아야 한다. 
프레드는 백만 달러를 벌어 놓고 묻는다. 
"이걸 다 뭐 하지?" 
메리는 회사의 승진 단계를 헤아리면서 말한다. 
"이게 모두 무슨 의미가 있지?" 
사라는 임신을 하고도 여전히 우울하다. 
인생의 의미는 백만 달러라는 돈이나 회사의 사장이나 어머니라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는 현재에 있다. 
우리가 어디에 있건 마찬가지이다. 
만일 의미를 찾고 싶다면 순간 순간에 주목해야 한다. 인생의 의미란 현재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