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지구환경변화와 역사 -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억스리 2019. 3. 14. 17:45

[출처] http://m.blog.daum.net/hearo9mars/5756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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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2500년부터 기온 변화 (출처 : http://www.longrangeweather.com/)


출처 : (주)북코스모스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남경태 옮김|예지(Wisdom)
2007.8.25|ISBN 8989797497|398쪽|A5

 

 

이 책은 지난 2만 년간의 기후 대변동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선사시대 인류학의 최고 권위자인 저자는 기후 대변동 앞에서 인류가 어떻게 살아남고 어떻게 몰락했는지를 살펴보며, 기후에 맞서 인류가 축적해 온 지식을 전해준다.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예지 / 2007년 8월 / 398쪽 / 18,500원


▣ 저자 브라이언 페이건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고고학과 인류학을 전공하고 중앙아프리카 철기문화에 대해 연구했다. 1967년부터 샌타바버라 캘리포니아 대학교 인류학과 교수를 역임하며 인류학 지식을 많은 사람들에게 좀 더 쉽게 알리기 위해 많은 글을 써왔다. 선사시대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고고학자 협회에서 수여하는 공익상, 미국 고고학협회에서 수여하는 공교육상을 수상했으며, 구겐하임학술재단의 특별회원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고고학 세계로의 초대』, 『인류학의 선사 문화』, 『고대 세계의 70가지 미스터리』, 『시간 탐정』, 『은의 왕국, 옥의 왕국』 등이 있다.


▣ 역자 남경태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사회과학 원전들을 번역했으며, 역사와 철학의 대중서들을 써왔다. 쓴 책으로는 『개념어 사전』, 『철학,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종횡무진 동양사』, 『종횡무진 서양사』, 『종횡무진 한국사』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세상을 바꾼 문자, 알파벳』, 『우주정거장 미르에서 온 편지』, 『콜럼버스와 그 아들들의 세계』가 있다.


▣ Short Summary

우리는 기후로 인한 환경 재앙을 이야기할 때면 온난화를 거론한다. 사실 오늘날 지구의 ‘여름’은 확실히 이상하다. 해마다 언론매체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 기후로 인한 피해를 보도한다. 무분별한 토지 개간, 산업화된 농경, 화석연료의 사용 증가 등 인간의 활동이 지구온난화의 주범이란 비난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기후학적으로 보면 온난화의 원인은 부차적인 논쟁일 뿐이다. 산업이 없던 수백만 년 동안에도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대규모의 기후변동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근의 기후과학 연구가 그것을 입증시키고 있다.


인류에게 영향을 준 기후의 변동을 좀 단순화시켜 보면 펌프와 컨베이어 벨트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염분과 온도 차이로 일어나는 대양 순환은 열기와 비를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이다. 아마존강 100개의 위력에 맞먹는 대서양 순환은 유럽의 온난화 가뭄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태평양은 몬순의 발상지로서 그 순환은 사하라와 아시아 전역의 강우량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이 컨베이어 시스템은 지구 궤도 변수(이심률, 세차운동 등)에 따라 극심하게 변했으며, 이에 따라 일어나는 기후의 변화는 마치 펌프처럼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을 빨아들이거나 뿜어내면서 세계의 전 지역으로 확산시켰다.


이 책이 인류 역사에 있어서 기후변동이 미친 영향을 추적한 것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지구의 환경재앙에서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산업화나 자본주의의 죄과가 아닌 기후에 대한 인류의 취약성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함이다. 수많은 기간시설과 인구를 보유한 오늘날에는 환경재앙이 일어날 경우 과거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도시국가의 멸망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재난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환경재앙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동시에 기후변화의 실마리를 잡아내고자 한다. 아직까지 인간에게는 자연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가 인간의 힘만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기후의 변덕을 이해하고, 온실가스를 줄이라고 다그쳐야 할 것이다.

 

▣ 차례

옮긴이의 말 : 역사를 움직이는 진짜 힘

책머리에 : 기후에 관한 소중한 기억


01 취약성의 문턱


펌프와 컨베이어 벨트

02 마지막 빙하기의 오케스트라 / 기원전 18000 ~ 기원전 13500년

03 신대륙 / 기원전 15000 ~ 기원전 11000년

04 대온난화 시기의 유럽 / 기원전 15000 ~ 기원전 11000년

05 천 년의 가뭄 / 기원전 11000 ~ 기원전 10000년


수백 년의 여름

06 대홍수 / 기원전 10000 ~ 기원전 4000년

07 가뭄과 도시 / 기원전 6200 ~ 기원전 1900년

08 사막의 선물 / 기원전 6000 ~ 기원전 3100년


행운과 불행의 차이

09 엘니뇨, 대기와 대양의 춤 / 기원전 2200 ~ 기원전 1200년

10 켈트족과 로마인 / 기원전 1200 ~ 900년

11 대가뭄 / 1~ 1200년

12 웅장한 잔해 / 1 ~ 1200년


마치며 - 1200 ~ 현대 : 불안한 지구의 여름

찾아보기

 

 

 

취약성의 문턱

고대에는 물에 대한 권리와 관개된 토지가 평화와 전쟁을 가름하는 세상이었다. 기원전 31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는 도시국가들이 관개수로를 단단히 방비하면서 신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신전을 세우고 창고에 곡식을 비축했다. 흉년에 발생하기 마련인 기근과 사회혼란에 대비한 보험인 셈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2200년경에 북쪽 멀리 어딘가에서 대규모 화산 분출이 일어나 화산재가 대기 중에 퍼져나갔다. 그것이 몇 개월 동안 햇빛을 가려 나중에는 연중 내내 추위가 찾아왔다. 그 뒤 278년 동안 가뭄이 지속되면서 한때 비옥했던 하부르 북부 평원은 거의 사막으로 변화했다. 이주민이 늘어나면서 정착민과의 전쟁이 일어나고 점차 사회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몇 세대 만에 정부가 해체되자 사람들은 더 작은 공동체로 흩어지거나 고지대로 대피하거나, 그냥 굶어 죽었다.


우르는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남부에 있던 대도시였다. 그곳의 복원된 지구라트(언덕사원)에 오르면 황량한 사막이 뻗어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척박하기 짝이 없는 사막이 과거에 세계 최초의 문명 가운데 하나를 먹여 살렸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기원전 2300년경 우르는 1천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대도시였으며, 유서 깊은 종교와 상업의 중심지였다. 우르의 지배자들은 이집트의 파라오와 더불어 세계 최고의 권력자였다. 우르는 동부 지중해까지 영역을 확대했으며, 신전, 포장도로, 궁정, 관공서와 상점들이 즐비했고, 약 5천여 명의 인구가 거주했다. 이는 당시 세계 최대의 인간 공동체였다. 그러나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몬순의 경로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강우의 양태가 달라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붕괴하고 말았다.


석기시대의 사람들은 새 사냥터를 찾아 이동하는 방식으로 생존을 해결했지만 우르와 같은 대도시민들에게는 이주의 적응이나 회복이 쉽지 않았다. 커진 규모만큼 환경에 대한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 역시 수천 년 동안 미시시피 삼각주에서 사냥과 어업으로 살아왔으며, 홍수가 닥칠 때면 쉽게 고지대로 이동했다. 그런데 1718년 뉴올리언스에 도착하여 도시를 건설한 프랑스 이주민들은 홍수가 일어나자 강의 경로를 통제했다. 1724년 처음으로 홍수가 발생했을 때 그들은 거주지의 기단을 1미터 정도로 쌓았다. 이는 그리 높지 않은 제방이었기에 미시시피 강물이 한 군데로 집중되지 않고 멀리 퍼져나가면서 큰 재앙이 초래되지 않았다. 그런데 1735년과 1785년에 도시가 다시 홍수에 잠기자 사람들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농장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인공 제방을 삼각주의 끝까지 뻗쳤다. 하지만 제방이 늘어남에 따라 붕괴의 위험성도 급격히 높아져버렸다.


강물은 늘 바다로 가는 지름길을 찾는다. 그 길을 찾으면 강바닥에 침니를 쌓기 시작하고, 그 결과 1천 년에 한 번꼴로 한쪽으로 흘러넘치게 된다. 이런 종류의 변동은 강변을 오가며 반(半) 정주 생활을 하는 수렵채집자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대규모의 도시인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미시시피강은 아마존강과 콩고강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넓고 긴 강이다. 1892년 19세기 최대의 홍수가 일어나 280개의 제방이 무너졌고 육군 공병단이 미시시피강의 홍수 통제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공병단 지도부는 제방을 이용하여 강을 통제하는 방침을 고수했다. 그 결과 강의 주요 경로가 애차팔라야강 쪽으로 변경되었다. 제방은 예전의 둑보다 여섯 배나 높아졌으나 다시 시작된 1927년의 대홍수에 무력하게 쓰러졌다. 200여 명의 인명과 수천 마리의 가축이 죽고 9만 3천 제곱킬로미터의 농토와 촌락들이 침수되었다.


1928년 의회는 기금을 조성하여 제방 시설을 재배치하고 배수구와 수문을 설치했다. 하지만 산업 발달로 상류지역의 환경이 변모하면서-고속도로, 상점가, 주택지구의 발달- 홍수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상류의 균열은 언제든 불어난 강물의 엄청난 힘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공병단은 강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는다. 수메르의 우르에서는 최대의 홍수가 발생해도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데 그쳤다. 그러나 오늘날 1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수백 억 달러의 기간시설을 보유한 도시의 운명은 대륙 절반을 영향권으로 삼고 점점 활동이 활발해지는 강을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달려 있다. 뉴올리언스는 100년 만의 홍수를 막아낼 수는 있다. 하지만 1천 년, 1만 년 만에 찾아오는 대홍수에 대해서는 낙관할 수 없다. 이 책은 그렇게 점증하는 취약성을 다루고자 한다. 인류가 1만 5천 년 동안 예측할 수 없는 기후 변동을 어떻게 겪었으며 그 문턱을 어떻게 넘었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1부 펌프와 컨베이어 벨트


마지막 빙하기의 오케스트라(기원전 18000~기원전 13500년)

프랑스 남부 니오 동굴에는 들소, 매머드, 순록이 그려진 벽화가 있다. 이 벽화는 그 전의 그림들 위에 계속해서 덧 그려진 일종의 팰림프세스트(palimpsest, 원본을 지운 필사본)인데 곳곳에 손바닥의 윤곽선이 생생하다. 이 그림들은 수백 년의 간격을 두고 그려졌다. 1만 8천 년 전 동굴 바깥은 마지막 빙하기의 혹독한 세계였다. 9개월의 긴 겨울 동안 크로마뇽인들은 동굴 속에서 지내며 사냥감이 이동할 때만 먼 곳까지 나갔다. 순록은 동토의 유럽 세계에 계절을 알리는 시계와 같은 역할을 했다. 크로마뇽인들은 순록이 언제 돌아오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한 번에 수십 마리 혹은 수백 마리까지 도살하여 동굴로 가져갔다. 크로마뇽인들은 동굴 벽 뒤에 동물들의 정령이 있다고 여겼다. 동굴 벽에 새겨진 손바닥 자국은 그러한 힘을 얻기 위한 신성한 의식이었음을 나타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크로마뇽인은 약 5만 년 동안 서남아시아의 동굴에서 다른 종의 인간인 네안데르탈인들과 어울려 살았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에 비해 지능이 모자랐던 네안데르탈인들을 서서히 밀어냈고 약 3만 년 전부터 유럽의 주인으로 군림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1만 5천 년 전까지 유럽은 동토였다. 유럽 중부까지 빙하가 덮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옛날의 기후도 해마다, 또 세기마다 달랐다. 빙하기 중에도 따뜻한 시기에 유럽은 인간과 동물을 끌어들였고, 추울 때는 밖으로 몰아냈다. 1만 8천 년 전 유럽의 기후는 몹시 추웠으나 갑자기 1만 5천 년 전에 기온이 극적으로 상승하면서 매머드와 들소, 북극여우와 순록 등의 고대 빙하기의 동물들은 북쪽으로 이동했다. 크로마뇽인들 중의 일부는 사냥감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기도 했지만 또 일부는 점점 퍼져나가는 식물에 의존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현대 과학은 토탄 덩어리 같은 심해와 호수의 침전물, 수천 킬로미터의 얼음 층을 뚫고 채취한 샘플, 나무의 나이테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지구의 기후 기록에 접근한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우리는 충적세(마지막 빙하기 이후의 온난기) 초기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이행도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이제까지의 조사를 종합해보면 지구의 온난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지구 궤도 변수(이심률, 기울기, 축의 세차운동)의 변화가 태양열 복사의 강도와 분포를 변화시켰고 여기에 화산폭발 등에 의한 온실가스의 증가가 궤도 신호를 증폭시켰다. 이행이 진전되면서 북반구의 방대한 빙하가 급속히 녹아 알베도(반사율)가 감소한 것이 전 지구적 온난화를 가속시켰다.


2000년에 한 국제 과학자 팀이 러시아의 보스토크 기지에서 3,623미터의 얼음 층을 뚫고 채취한 얼음 샘플에 의하면 빙하기에서 온난화 시기로의 이동은 10만 년 간격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온난화 시기에는 이산화탄소와 메탄의 대기 중 농도가 크게 변화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빙하기에서 온난한 시기로 이행할 때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180ppmv(부피로 나타낸 ppm)에서 300ppmv로 증가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온난해진 세계에서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365ppm이다. 충적세부터 지속된 온난화, 이 특이하게 ‘긴 여름’을 틈타 인류 문명이 성장했지만 우리는 그 여름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그리고 그 후 어떤 기후 변화가 초래될지를 고민해야 한다.


신대륙(기원전 15000~기원전 11000년)

인간이 아메리카에 처음 이주하게 된 경로와 시기는 1만 8천 년 전에 급격히 전개된 지구 온난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마지막 빙하기에 시베리아 북동부는 척박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1만 8천 년 전에 알래스카는 동쪽과 남쪽이 빙하로 둘러싸여 있어 북아메리카의 다른 지역과 차단된 상태였다. 두 개의 거대한 빙상이 캐나다 전역과 현재 미국의 북부지역을 뒤덮고 있었다. 빙상은 북대서양의 변덕스러운 기후 변동에 따라 전진하거나 후퇴했다. 1988년 독일의 고해양학자인 하르트무트 하인리히는 북대서양의 해산(海山)에서 침전층을 채취했다. 이것은 한랭과 온난 사이를 오가는 사이에 형성된 잡석층으로 이를 통해 기원전 1만 500년 전에서 7만 년 전까지 거의 1만 년마다 빙산의 대규모 유출이 있었음을 알아냈다.


수백 년 동안 빙하가 녹은 엄청난 양의 물이 북대서양으로 쏟아져 들어가면서 멕시코 만류의 난류 순환이 차단되었다. 그 결과 유럽으로 불어오는 온난한 서풍의 기세가 꺾여 유럽이 결빙되었다.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광대한 지역이 춥고, 건조하고, 바람이 심한 환경으로 바뀌었으며, 이런 추세가 남쪽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아열대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즉 빠른 온난화가 빠른 한냉화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그 이전에 일어난 여러 차례의 기후변화와 상당히 비슷했다. 그렇다면 알래스카의 수렵채집자들은 어떻게 얼음이 덮인 남쪽으로 이동했을까? 과학자들은 북아메리카로 연결된 두 개의 빙상, 일명 코딜레라 빙상과 로렌타이드 빙상 사이에 얼어붙지 않은 통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캐나다 극지에서 북아메리카의 심장부를 잇는, 황량하지만 생존이 가능한 고속도로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이 통로는 대온난화의 산물이었다. 약 2만 1천 년 전에 최대 규모에 달했던 두 빙상은 기원전 16000년에 최소로 줄어들었으며, 급기야 기원전 12000년에는 서로 갈라져 얼어붙지 않은 통로가 열린 것이다. 또한 빙상의 길이도 북쪽으로 짧아졌다. 로렌타이드 빙상은 북극권 캐나다까지 물러났고, 코딜레라 빙상은 서쪽의 산악지대로 후퇴했다. 오늘날 빙상의 흔적은 없으나, 빙상이 후퇴한 뒤 4천 년 동안 형성된 5대호와 고대 캐나다 순상지(楯狀地)의 황량한 풍경이 그것을 입증한다. 어쨌든 통로의 길이는 약 1,500킬로미터에 이르는데, 예측할 수 없는 대기와 기후변화에 따라 열렸다 도로 닫히고, 넓어졌다 좁아지는 등 수십 년 주기로 변덕을 부리다가 나중에야 영구적으로 열렸을 것이다. 이 과정에 들소나 순록 같은 동물들이 이동했을 것이고 그것들을 따라 사람들은 몇 세대에 걸쳐 이동했을 것이다. 어떤 집단은 남쪽으로 왔다가 동물들을 따라 도로 북상하기도 했을 것이며, 일부 집단은 통로의 남쪽에 항구적으로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북아메리카의 고 인디언 인구 변화를 보면 기원전 11500년 이후 인구가 급격히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이 최초의 거주자들은 사냥과 채집으로 널리 분산된 식량을 열심히 찾아다녔으나 대온난화로 인해 크게 증대한 식용식물을 섭취하게 되면서 식성이 잡식으로 이행되었다. 이때부터 수렵채집과 정착생활이 병행되었는데, 사람들은 야생식물의 씨앗을 재배하는 농경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은 가뭄에 대처하기 위해 사회를 더 긴밀하게 조직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 대규모 문명들이 출현했다. 그러나 하지만 복잡성이 증가하면서 사회는 점점 더 기후변동에 취약해지기 시작했다.


대온난화 시기의 유럽(기원전 15000~기원전 11000년)

마지막 온난화 이후에는 왜 빙하기가 다시 오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몇 가지 원인을 들자면 우선 지구 궤도가 변화하여 장기적으로 지표면의 온도가 상승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답은 해류의 순환 속도다. 플로리다 해협의 염분 농도 변화를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마지막 빙하기에는 대서양 해류의 순환이 급격히 느려졌고, 멀리 유럽의 바다 온도가 급강하했음을 알 수 있었다. 순환이 느려진 이유는 허드슨만과 캐나다 동부를 덮고 있던 로렌타이드 빙상이 녹은 물이 수천 년 동안 래브라도해로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민물이 계속 유입되자 염분 농도가 짙은 물의 하강이 차단되었는데, 그로 인해 멕시코만의 난류가 끊겼다. 그 뒤 허드슨만에서 빙하가 녹은 물이 흐름을 멈추자 래브라도해의 하강류가 회복되었고 멕시코 만류가 방향을 바꾸어 북대서양의 순환이 재개되었다. 다습한 서풍이 바다를 덮으며 온기를 북서유럽으로 전했다. 급속한 온난화가 시작된 것이다.


온난화가 시작된 지 불과 2천 년 만에 유럽의 풍경은 크게 달라졌다. 유럽의 윗부분을 덮고 있던 스칸디나비아 빙상과 알프스 빙상이 극적으로 수축되면서 빙하가 녹은 민물 수십 억 리터가 바다로 흘러들어갔다. 이로 인해 기원전 12000년경 어떤 지역의 해수면은 1년에 40밀리미터씩 상승했다. 육지에서는 관목들이 멀리 퍼져 자작나무 숲이 잉글랜드와 서유럽, 북유럽의 대부분을 덮게 되면서 툰드라 초원은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인간에게 또 다른 환경 적응이라는 과제를 안겨주었다. 우선 대형 동물의 사냥이 어려워졌다. 매머드, 털고뿔소, 큰뿔사슴과 같은 빙하기 동물들은 여러 곳에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산맥이 높아지는 등 장애물이 생겨나자 적응력을 잃고 점차 멸종하게 되었다. 당시 유라시아 북부에서만도 약 80속(屬)의 생물들이 사라졌다. 매머드가 최종적으로 멸종된 것은 기원전 2500년경 기자의 피라미드가 나일 강변에 세워지고 유럽 중부와 서부에서 쟁기가 사용될 무렵이었다.


사냥감이 희박해지자 늘어난 식용식물이 생존의 열쇠가 되었다. 크로마뇽인들은 동굴 밖으로 나와 과일과 버섯, 풀씨와 식용 구근 등을 쉽게 채집했다. 특히 전분이 많은 씨앗과 견과는 몇 년 동안 보관이 가능했으므로 지방이나 소형 포유동물보다 더 의지할 만한 식량이 되었다. 인간은 동굴 밖으로 나오면서 영적인 삶도 지상으로 옮겼다. 무당은 오래전의 사냥, 사라져버린 신화적 동물과 긴 겨울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전승했다. 어디서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 세계의 힘에 둘러싸여 인간의 존재를 형성했다. 하지만 극적인 기후 변동은 신의 조화가 아니었다. 지구 궤도의 이심률, 지축의 기울기와 방향이 주기적으로 미세한 변화를 일으키는 탓에 기후변동이 일어나고 전체의 대기해양 시스템이 갑자기 변화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기후의 주기에 관한 보잘것없는 지식을 바탕으로, 장차 또 한 차례의 추위가 지구를 덮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소박한 믿음일 뿐이다.

 

 

천년의 가뭄(기원전 11000~기원전 10000년)

기원전 13000년 이후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지표면의 물이 풍부해졌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때까지 인간이 거주하지 않던 땅으로 들어갔다. 유적 발굴에 의하면 이들은 현재 이스라엘에 속한 카르멜산의 케바라 동굴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고고학자들은 거주지의 이름을 따 이들을  ‘케바라인’이라고 명명한다. 케바라인들은 의지할 만한 식수원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주로 사냥에 의존하고 살았다. 기원전 11000년경에는 도토리를 품은 참나무와 피스타치오 숲이 유프라테스강 중류에서 다마스쿠스 일대를 거쳐 요르단강까지 뻗어 있었다. 참나무와 피스타치오 지대는 아마 성서에 나오는 젖과 굴이 흐르는 땅을 말할지도 모른다. 케바라인들의 후손들인 나푸트인들은 뼈로 된 손잡이와 예리한 돌칼이 달린 낫으로 도토리와 피스타치오 열매(옻나무의 일종인 캐슈과에 속함)를 따서 식량으로 활용했다.


도토리에는 쓴맛이 나는 타닌산이 들어 있기 때문에 도토리를 빻아 물에 담그고 걸러내야 했다. 또한 이것을 가루로 만들어 저장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노동력이 소비되었지만 나푸트인들은 도토리 수확을 계기로 장기적인 정주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훌라 계곡에 있는 말라하 유적은 면적이 1천 제곱미터가 넘는데, 그때까지 어느 곳의 수렵채집 근거지보다도 큰 규모다. 참나무와 피스타치오 지대의 인구는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그러자 각 집단들은 자신들의 영토에 울타리를 두르기 시작했다. 견과나 기타 식량이 생산되는 숲을 둘러싸고 다툼이 벌어질 가능성이 점차 높아진 것이다. 특히 건조한 시기에는 그럴 위험성이 더 커졌다. 그 위기는 기원전 11000년경에 마침내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된 심한 가뭄으로 터져 나왔다. 그런데 이 가뭄은 멀리 북아메리카의 지질학적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기원전 11500년경 북아메리카의 로렌타이드 빙상의 가장자리가 녹으면서 아가시 호가 갈수록 커졌다. 그리하여 기원전 11000년경에는 아가시 호수가 큰 바다 속에 섞여버렸고 이 물이 염분 농도가 짙은 멕시코 만류의 위로 떠올라 뚜껑처럼 작용하면서 대서양의 순환을 멈추게 했다. 몇 세대 만에 바다의 빙산이 순식간에 솟아올라 멕시코 만류를 차단하자 극심한 추위와 가뭄이 들이닥쳤는데, 기후학자들은 이 1천 년의 기간을 ‘영거 드리아스기(기원전 11500~10600년)’라고 부른다.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이 극적인 사건은 유프라테스 강변에 있는 아부후레이라에도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나푸트인들은 기원전 11500년경에 아부후레이라에 정착했다. 그런데 추위와 가뭄으로 인해 기원전 11000년경에는 숲이 사라지고 나무 열매와 견과를 채집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나푸트인들은 나래새(벼와 비슷한 식물)와 아스포델 씨앗 등 야생 곡식에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지속된 추위와 가뭄은 야생곡식도 점차 사라지게 했다. 더 이상 식량을 얻지 못하게 된 나푸트인들은 거주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물이 있는 곳으로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야생식물의 채집을 보충하기 위해 재배 실험을 계속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영거 드리아스기가 끝나고 온난화가 재개된 기원전 9500년경, 버려졌던 아부후레이라 언덕에 새롭고 전혀 다른 거주지가 탄생했는데, 이 새로운 전체 공동체는 에머밀, 호밀 등의 작물에 유전적 변화를 가했고, 그 결과 몇 세대 만에 채집생활은 정착생활로 바뀌게 되었다.

 

 

수백 년의 여름


대홍수(기원전 10000~기원전 4000년)

영거 드리아스기가 끝나자 지중해 동부는 날씨가 따뜻해지고 강우량이 늘었다. 덕분에 아나톨리아에서 요르단 계곡까지 숲이 금세 무성해졌고 1천 년 전과 같이 피스타치오와 도토리가 풍성해졌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냥꾼과 채집자들은 이미 농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부후레이라를 비롯하여 요르단 계곡 일대에 있는 여러 공동체의 농부들은 이제 식량 생산자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동물도 사육했다. 식용식물이 풍부한 곳으로 동물들이 모여들자 동물과 인간이 한데 어울리게 되면서 사냥꾼들은 짐승들에 관해 상세히 알게 되었다. 고대인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몇 마리의 우두머리를 통제함으로써 무리 전체를 통제하는 지식을 얻었다. 사육된 염소는 젖을 공급함으로써 마을의 주요 식량원이 되었고, 양은 양모를 제공했다.


나푸트인들이 예리코의 샘들 부근으로 모여들고 큰 규모의 농경 공동체가 출현하면서 육중한 성벽과 석탑이 세워졌다. 성벽을 쌓은 이유가 침략을 막기 위해서인지, 홍수를 막기 위해서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예리코는 동쪽의 사막과 해안지대를 연결하는 교역망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식량이 필요했다. 따라서 많은 농작물의 수확과 기후에 관한 새로운 관심이 싹텄다. 농사를 짓게 되면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종교적 신앙이 생겨난 것이다. 그들에게 잠들어 있다가 깨어나 생산하고, 죽은 듯 보였다가 다시 같은 주기를 반복하는 땅은 인간의 삶과 닮은 것으로 여겨졌다. 예리코인들은 죽은 조상들을 땅의 수호신으로 여기고 자신의 집 지하에 매장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의 머리를 떼어내 구덩이에 부장품과 함께 묻거나, 두개골에 회반죽으로 용모를 성형하여 매장하기도 했다.


농경은 북쪽과 서쪽으로도 퍼졌다. 기원전 6000년경 농부들은 아나톨리아 고원 북쪽에 있는 방대하고 염분이 많은 에욱시네 호수의 비옥한 연안에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에욱시네 연안에 농경 촌락들이 들어설 무렵 반대편 세계에서는 죽음의 노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기원전 6200년경 엄청난 양의 빙하가 로렌타이드 빙상을 덮쳤다. 그러자 거대한 빙상의 내부가 파열되면서 빙산조각과 찬물이 남쪽의 멕시코만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로 인해 전 세계의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했고, 스칸디나비아 남부의 땅덩이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로써 영국은 대륙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이 400년간의 소빙하기에 대서양의 해양 컨베이어 벨트는 다시 작동을 멈추었다.


유럽은 영거 드리아스기보다 더 춥고 건조해졌고 아나톨리아와 지중해 동부는 다시 가뭄에 시달렸다. 하지만 에욱시네는 여전히 거대한 오아시스였다. 사람들은 에욱시네 호숫가로 모여들었고 이곳에서 400년의 가뭄을 이겨냈다. 그런데 기원전 5800년경 갑자기 온난화가 시작되면서 에욱시네 호수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호수의 수위가 하루에 15센티미터씩 상승하면서 농작물과 숲을 삼키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고지대로 대피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본래 에욱시네는 북쪽 멀리서 빙하가 물러난 결과로 생겨났었다. 빙상의 엄청난 무게가 지표면을 누른 탓에 사람이 매트리스에 누운 것처럼 안은 움푹 들어가고 가장자리는 높아지면서 에욱시네 호수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빙하 녹은 물과 얼음덩이, 바위 부스러기 등이 계속 유입되면서 에욱시네 호수는 오늘날의 흑해 속으로 잠기고 말았다.


학자들은 기원전 5600년경에 일어난 에욱시네 대홍수가 민간의 기억 속에 전해져 성서의 대홍수가 되지 않았나 추측한다. 흑해와 지중해의 수위가 같아지는 데는 무려 2년이나 걸렸는데, 여하튼 이 대홍수 기간 동안 사람들은 굶주림과 그로 인한 질병에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평원을 가로질러 미지의 강 유역을 찾아 떠났다. 이들이 중부 유럽과 서유럽을 횡단한 과정은 소용돌이와 칼자국 무늬로 장식된 독특한 질그릇과 기다란 목조가옥의 유적을 통해 추적이 가능하다. 고고학자들은 이것을 ‘선형케라믹 문화’라고 부르는데, 인류 역사상 중대한 이 인구이동이 이루어진 수백 년 동안 헝가리 서부에서 저지대까지의 강 유역에 농경촌락들이 속속 들어섰다. 선형케라믹 사람들은 파종기를 더 서늘한 기후에 맞춘 것 이외에 별다른 변화를 주지 않았다. 따라서 굶주림은 근절되지 않았다. 하지만 목축, 사냥, 야생의 식용식물로 인해 몇 년까지도 지속될 변덕스러운 기후변동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가뭄과 도시(기원전 6200~기원전 1900년)

메소포타미아 주변은 지구상에서 가장 극단적인 환경이다. 사하라사막, 건조한 파키스탄 북서부, 중앙아시아의 추운 지역, 서로 다른 이 세 가지 기후 양식이 이곳에서 충돌한다. 이렇게 기류가 충돌하는 탓에 메소포타미아의 기후는 북대서양 순환이 차단되거나 대규모 엘리뇨가 발생해 기후가 신속히 변한다. 이 변화는 짧은 것도 있지만 수백 년이나 지속되면서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10000~기원전 4000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여름 기온이 높고 강우량도 많았다. 기원전 58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최초의 거주지가 등장했는데, 학자들은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우바이드인’이라고 부른다. 우바이드 인들은 농경생활을 하면서 도시를 세우고 상당수의 건물과 신전을 건립했다. 후대에 제작된 설형문자 점토판의 기록에 따르면, 이 무렵에 고대 메소포타미아 종교가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찬송가를 부르고 신화를 읊었다.


기원전 4800년경 유프라테스 강변의 우루크는 지구라트에서 보이는 인근 촌락들을 흡수해 더욱 크게 발달했다. 그런데 기원전 3800년경 기후가 갑자기 건조해졌다. 이는 이미 1천 년 전부터 서남아시아와 지중해 동부 지역에 있었던 추세였다. 지구 표면의 일사량이 세계적으로 줄어들었는데 태양에 대한 지구의 각도가 변화되어 지표면에 와 닿는 복사 에너지의 양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서남아시아의 몬순의 여름 강우량이 줄고 경로도 동쪽으로 이동하자 사람들은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처럼 이동하지 않았다. 기원전 3500년경 가뭄이 격화되었을 무렵 우루크에는 자체의 관개시설을 갖춘 위성 촌락들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촌락들은 자체 생산물을 우루크의 시장으로 가져갔고 지주들은 이모작을 시작했다. 또한 농사에 쟁기와 동물을 이용하고 휴한기를 줄이고 수로에 노동력을 투입했다. 관개시설은 부족 지도자들이 엄중하게 감독했다. 관리들은 신전의 창고에 비축되는 농작물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이전까지의 가족농장이 도시 정부가 주관하는 중앙화된 방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수확한 농작물은 세금으로 거두어져 정부 식량창고에 비축되고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곡식을 받아 생활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여름의 홍수에 대비하여 천연 저수지에 물을 저장하기 위한 작업에도 착수했다. 또한 신전, 도시성벽, 기타 토목사업에도 동원되었다. 이 모든 노력은 신의 이름으로 집행되었다.


기원전 3100년경 수메르(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도시들은 세계 최초의 문명권을 이루었다.  하지만 각 도시 간에 농토, 물에 관한 권리, 교역, 무력을 두고 끊임없이 서로 다툼을 벌였다. 경쟁이 수백 년이나 지속되면서 정치권력의 중심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어지러이 옮겨갔다. 이들 도시국가들은 농업 생산에 관해서는 효율적으로 기능했으나, 더 큰 정치적 분야에서는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다. 사실 메소포타미아에서 최초로 생겨난 도시국가 체제는 환경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탄생했으나, 다른 모두를 복속시킬 만한 권력자가 없었다. 그런데 기원전 2334년에 바빌론 남쪽의 아가데에서 사르곤이 왕조를 창건하면서 문제는 달라졌다. 그는 수메르 도시국가들의 연합군을 격파했고, 이로써 사르곤 왕조는 메소포타미아의 완벽한 패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러나 이 덩치 큰 제국은 기후변동에 더 취약했다. 그 취약성은 유프라테스강의 서쪽, 지금의 시리아에 속하는 하부르 평원의 고고학 유적에서 잘 드러난다. 고대에 하부르는 강우량도 많고 유프라테스의 범람으로 토질이 비옥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오랜 가뭄의 영향도 늦게 전해졌다. 그런데 기원전 2200년경 재앙이 터졌다. 북쪽 어딘가에서 대규모 화산 폭발이 일어나 막대한 양의 재가 대기 중에 방출되었다. 이로 인해 겨울이 몹시 추워졌고 몇 년 동안이나 여름이 없었다. 놀라울 만큼 북대서양 순환이 느려졌고 수백 년 동안 불어오던 다습한 지중해 편서풍도 예측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심한 가뭄이 빈발했다. 불과 몇 년 만에 농토는 먼지 구덩이로 변했고 작은 회오리바람이 보리와 밀의 시든 새싹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이로써 우르의 농촌 경제는 붕괴하고 말았다.


300년간의 가뭄은 지중해 동부의 다른 곳도 파괴했다. 수천 년 동안 나일강의 범람은 풍요한 수확을 가져다주었다. 이집트 고왕국의 파라오들은 자신이 나일강의 주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기원전 2184년 나일강의 수량이 크게 줄었다. 이후 150년 동안 이집트는 기근에 시달리면서 중앙정부는 붕괴되었고 멤피스에서 파라오들만 교체되었을 뿐 국가를 구성하는 속주들이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다가 기원전 2046년에 멘투호테프 1세가 이집트를 재통일했다. 그와 후임 파라오들은 농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면서 신으로 자처하기보다 백성의 목자로 자처했다. 왕이 기만을 벗어던지자 백성들이 왕을 믿어주었다. 이들은 확고한 행정과 중앙화된 정부, 기술적 창의성을 강력한 이념과 결합시켜 국가를 구했다. 이로써 메소포타미아 문명도 살아남았다. 혹심한 가뭄과 건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제도와 이념은 후대의 제국들에게 청사진을 제공했다.


행운과 불행의 차이


엘리뇨, 대기와 대양의 춤(기원전 2200~기원전 1200년)

지구의 여러 가지 단기적 기후변동들 가운데 엘리뇨남방진동(ENSO)은 계절의 변화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기후학자들 사이에서는 엘니뇨를 ‘대기와 대양의 춤’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두 무용수의 불균형한 춤은 남서 태평양의 따뜻한 바닷물을 동쪽으로 밀어 보내 엘니뇨를 만들어낸다. 태평양은 이러한 작용의 영구운동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역풍이 난류를 계속 서쪽으로 보내면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방대한 난류 웅덩이가 형성되는데, 이 과정에 심해에서 솟아난 한류가 남아메리카 부근에서 난류를 가로막는다. 그래서 페루 해안과 멕시코의 바하 반도와 캘리포니아는 긴 건기에 빠지는 반면, 서태평양에서는 온난한 바다로부터 열기를 받은 습한 대기가 응축되어 커다란 비구름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비구름은 호우와 몬순이 되어 동남아시아와 인도네시아를 강타한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이유로 몇 년에 한 번씩(주로 남반구의 봄에) 영구운동기관이 느려진다. 이때 ‘ENSO’가 일어나는데, ‘남방진동’이라고 불리는 이 변화는 동태평양의 동서 해류와 서쪽의 방대한 난류 해역에서 일어나는 대기 압력의 시소 같은 작용을 말한다. 건조한 대기가 차가운 동쪽 바다에 부드럽게 내려앉으면서 동태평양이 따뜻해지면 동쪽과 서쪽의 해수면 온도 차이가 줄어들고 무역풍이 약해지는데 무역풍이 잦아들면 그 공백을 중력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러면 태평양 내부에서 파도가 일어나고 무역풍에 의해 누적된 난류가 동쪽으로 역류한다. 이때 서태평양의 해수면 온도가 낮아지면서 구름의 형성을 차단하고 동남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에 가뭄을 유발한다.


한편 멀리 동쪽의 페루 해안과 갈라파고스 제도에는 비구름이 형성된다. 이로 인해 단 며칠 만에 100년 동안 내릴 비가 한꺼번에 내리는 경우도 있다. 또한 남아메리카에 모인 온난다습한 대기가 크게 부풀어 오르면서 지구를 순환하는 대기의 흐름을 혼란시킨다. 즉 이 기류가 북쪽으로 치우쳐 북아메리카 서해안 대부분의 지역에 호우와 폭풍을 가져오고, 기류의 일부가 로키산맥을 넘으면 미국 중서부에 북극권의 대기가 유입되는 것이 차단되어 겨울이 특별히 온난해진다. 그리고 브라질 북동부와 사하라 남쪽 가장자리에 가뭄을 유발시키게 되는데 엘리뇨가 전 지구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기후학자들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최초의 도시 문명이 등장했던 5천 년 전부터 대규모 ENSO가 인간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처럼 지구온난화의 시소는 채집자를 정주 농부로, 촌락민을 도시 거주자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밭과 관개시설에 의존하게 된 인간은 다른 곳으로의 이동이 불가능해졌고 취약성의 규모는 어느 때보다도 커졌다. 농경사회는 사냥과 식용식물에 의지해 충격을 완화할 수 있었고 더 작은 정착지로 분산되어 적은 인구가 적은 식량을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인구가 수천 명이 넘는 도시국가의 사람들은 홍수와 가뭄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문명이 더욱 발달한 오늘날은 어느 때보다도 기후변동에 취약해졌다. 인간은 더 큰 거주지를 형성함으로써 취약성의 문턱을 넘은 것이다.


켈트족과 로마인(기원전 1200~900년)

수천 년 동안 갈리아 지역은 지금보다 온난하고 건조했으나 기원전 3500년경부터 점차 기온이 낮아졌다. 대다수 사회는 밀과 보리에 크게 의존했는데 밀은 비가 많이 오거나 여름 기온이 서늘해지면 큰 피해를 입었다. 보리와 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대륙성 기후대에 사는 자급농부들은 점점 더 흉년에 취약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추운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기장 같은 새로운 작물을 재배했다. 기장은 성장기가 짧고 저장하기 좋은 데다 가뭄에도 잘 견뎠다. 기장은 발효시키지 않은 빵과 죽의 재료가 될 뿐 아니라, 발효 음료로 만들어져 축제에도 사용되었다. 가축을 기르는 지혜도 생겨났다. 사람들은 전염병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축을 친지들과 나누어 길렀다.


기원전 800년경 유럽의 기후는 갑자기 서늘해지고 상당히 습해졌다. 이후 500년 동안 현재의 프랑스와 독일 남부는 습한 해양성 기후와 건조한 대륙성 기후가 뒤섞인 변화무쌍한 환경이 지속되었다. 태양의 흑점 활동이 급격히 위축되어 고위도와 중위도 지역이 서늘하고 습한 상태로 바뀐 것이다. 서늘해진 기온과 많은 강우량은 사람들을 고지대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도록 하였다. 많은 강우량으로 지하수면이 높아졌고 그 덕분에 지하수를 통해 운반되는 철의 양도 많아져 다량의 철광석이 생성되었다. 촌락마다 제철이 성행했고, 철로 된 칼날을 장착한 경작 도구가 널리 사용되었다. 이것은 중대한 경제적 변화였다. 철제 도구를 이용한 새로운 농경술은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철이 도입되면서 위계적이고 충성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질서도 생겨났다. 환경은 점점 더 경계선이 명확해졌으며, 칼과 방패, 청동제 투구와 갑옷 같은 무기들이 늘어났다. 급속히 팽창한 농경은 탐욕스러운 부족 전쟁을 야기했고 각 도시마다 요새 건축이 붐을 이루었다. 당시 요새는 물론 가옥도 모두 골재를 목재로 삼았기에 삼림이 황폐화되었다. 하지만 침략에 대한 강박관념은 요새건설을 부추겼다. 요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급 농경이 발달해야 했다. 즉 주기적인 식량 부족에 대한 대비책으로 잉여 식량을 대량으로 확보하고 비축해야 했다. 제한된 영토 내에서 식량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사냥이나 식용식물로 식량을 보완하고 그래도 부족하면 자구책을 마련하거나 이웃의 곡식과 가축에 의존해야 했다. 즉 약탈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전쟁과 개인적 용맹이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 지역에서 인기를 끌던 말은 기동성에 한몫을 했다. 말을 탄 귀족과 족장들은 북부의 농토를 관장했다. 켈트 사회의 호전적인 족장들은 권력과 전사적 무용을 통해 추종자들의 충성을 얻어내고자 했다. 지도자들은 젊은이들을 보내 새로운 터전을 찾고자 했다. 이로 인한 북부 민족의 남하는 특히 기원전 4세기에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기원전 390년경 켈트족의 전사들은 로마시를 일곱 달 만에 정복했다. 켈트족은 로마에 눌러앉을 심산이었지만 기후변동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기원전 300년경 대륙성 기후대와 지중해성 기후대 사이의 추이대가 이동하기 시작해 지금의 부르고뉴까지 북상했다. 그 결과 켈트 지역의 남쪽에 온난 건조한 여름과 습한 겨울의 지중해성 기후가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기후는 밀과 기장 같은 몇 가지 작물을 광범위하게 경작한 로마식 농경에 적합했다.


로마는 꾸준히 기후의 추이대를 따라가면서 켈트족의 땅을 잠식해갔다. 이로써 기원전 2세기 중반 현재 프랑스 남부에 해당하는 켈트족의 땅은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그러나 켈트족은 로마인들의 마음속에 깊은 공포를 심어주었다. 기원전 2세기말 켈트족의 동맹부족들은 북해 해안에서 남쪽과 동쪽으로 이동해 이탈리아로 진격하고 이어 서쪽의 갈리아로 이동했다. 하지만 기원전 102년 로마가 튜튼족을 물리침으로써 로마를 넘볼 수 없게 되었다.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는 여전히 방어망을 갖춘 대형 켈트족들이 산재해 있었으나 기원전 51년 군사권을 잡은 카이사르의 정복정책을 통해 켈트족은 붕괴되었다. 로마는 잘 조직된 군대, 도로와 해로 같은 확고한 기반시설, 효율적인 농업 생산력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제국 내에서는 부패와 정치적 음모가 횡행했지만 로마 황제들은 엄격한 법을 바탕으로 대체로 제국을 잘 다스렸다. 이후 500년 동안 로마는 서유럽 일대를 장악했다.


정치적 안정과 변방 지역을 통제하려면 궁극적으로 곡식 성장기가 보장되어야 했다. 그러나 3세기경, 기온과 강우량이 달라지자 로마 세계 전체에 위기가 닥쳐왔다. 로마의 중앙집권력이 약화되고, 정치와 외교에서 군대의 발언권이 커지면서 제국의 어려움이 더욱 가중되자 게르만족이 동쪽 변방을 수시로 위협했다. 그로 인해 점차 로마 문화와 게르만 문화가 뒤섞이게 되었다. 추위와 가뭄으로 곡식의 대량생산이 어려워지자 농부들은 자급 농경으로 회귀했다. 즉 이제까지의 잡종 교배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경작이 좋은 조건의 땅에서만 집약 농경을 재개했다. 결국 곡식으로 충성을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고 로마는 붕괴했다.


로마가 멸망하자 서유럽은 곧 군사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부족들이 격렬한 각축전을 벌이는 무대로 변했다. 켈트족의 지배층과 그리스도교 교회는 라틴어를 포함하여 자신들에게 중요한 로마 문화의 일부를 그대로 유지했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4~5세기에 당시 유럽에서 성행하던 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5세기 초 로마식 교육을 받은 파트리키우스라는 브리튼인이 주교가 되면서 아일랜드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이때 나머지 유럽 세계는 혼돈과 전쟁에 휩싸여 있었으나 아일랜드는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다. 처칠의 말처럼 그리스도교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게 됨으로써 유럽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6세기경 세계의 기후는 북반구에 대규모 화산폭발이 일어나면서 역사상 가장 심하고 오래된 건무(마른 안개)를 가져왔다. 그린란드 일대에 고기압이 형성되고 대서양 한복판 아조레스 제도에 저기압이 발달하면서 일어난 변화였다. 특히 536~538년의 극심한 가뭄은 북중국을 공격하고, 몽골과 시베리아로 번졌다. 북쪽의 아바르족은 유럽을 향해 이동했다. 그들은 서쪽의 독일에서 동쪽의 볼가강까지, 북쪽의 발트해에서 남쪽의 동로마 제국의 발칸 경계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아바르족의 침입으로 인해 빚어진 혼란은 3세기 뒤에 서로 각축을 벌이는 중세 유럽의 토대를 형성했다. 그러나 변덕스러운 홍수, 가뭄, 추위는 군주와 귀족에게서부터 농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경제에 영향을 미쳤다.


900년경 지중해의 추이대는 또다시 북상했다. 그때는 수백 년간 끊이지 않던 전쟁과 정치적 혼란이 다소 안정되고 수도원이 세련된 농경 방식을 도입하여 도시를 부양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후 4세기 동안은 여름마다 풍작을 거두어 먹을거리가 충분했다. 중세 온난기라고 불릴 만한 이 기간 동안 영국 남부와 중부에 포도밭이 크게 늘었다. 그 시대에는 신이 모든 사람의 운명을 수중에 쥐고 있었다. 부활절마다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새로운 불길이 타올랐고, 대성당이 건축되고 매년 가을이면 사람들은 수확물을 신에게 바쳤다. 물론 이 수백 년간의 기간에도 뼈가 휘는 노동이 근절되지 않았지만 흉년이 드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신이 웃고 있다고 믿었다. 그곳의 신은 웃고 있었지만 서반구에서는 극심한 가뭄이 큰 타격을 주고 있었다.


대가뭄(1~1200년)

캘리포니아 남부는 북아메리카에서 지난 3천 년간의 단기적 기후변동에 관한 가장 정확한 기록을 전해주는 지역이다. 샌타바버라 해협에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바람이 분다. 지구의 회전으로 인해 이 바람은 물을 바람의 방향과 직각인 바다 쪽으로 밀어내는데, 해수면의 물이 바다 쪽으로 나가면 아래에 있던 찬물이 솟아올라 그 자리를 채운다. 이 용승류는 영양분이 풍부하므로 해초와 식물 플랑크톤의 성장을 촉진하여 물고기, 바다 포유동물, 바닷새가 번성한다. 용승의 강도를 통해 샌타바버라 해협 일대의 기후변동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450년에서 1300년까지 해수면 온도가 크게 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950년에서 1300년까지 해양 용승이 빈번해졌는데, 이 덕분에 어업 생산성이 대단히 높았다.


1300년 이후 수온이 안정되면서 용승이 가라앉았고 어업 생산성도 낮아졌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사람들은 샌타바버라 일대에 살던 추마시족이었다. 온난한 기온으로 인해 용승이 억제되면서 멸치 수확량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인구는 여전히 증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주기적인 엘니뇨는 심한 비바람과 홍수를 가져왔고, 용승을 더욱 억눌러 어족 자원을 고갈시켰다. 내륙 역시 시련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내륙의 사람들은 늘 식량 부족에 시달렸기 때문에 해안 사람들과 상호의존의 그물로 연결되어 있었다. 식량 부족으로 인한 집단 간의 경쟁은 우호와 적대가 긴밀하고 확고하게 구분되는 긴박한 세계를 창조했다. 이러한 사회 변동의 가장 명백한 증거는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에서 볼 수 있다. 300~1150년의 촌락 묘지에서 나온 유골을 보면 곤봉이나 도끼에 맞아 머리를 다친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 또한 화살이나 창 같은 발사체에 맞아 생긴 상처도 많다.


폭력은 1150년까지 증가하다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아마도 모두가 한배에 탄 운명이라는 것을 깨닫고 상호의존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 같다. 아무도 갖지 못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는 것은 무의미했을 것이다. 당시 한 가지 남아 있는 자원은 바다였다. 950년에서 1300년까지 연안에서 용승이 심해지자 족장들은 예전과 달리 실용주의를 택했고 그로 인해 식량 공급은 안정되고 고르게 분배되었다. 추마시족은 점차 대가뭄에 익숙해졌고 연안 어업의 높은 생산성 덕분에 해변의 건조한 환경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추마시족이 위기를 극복하고 정교한 수렵채집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족장의 세습제였다. 족장들은 힘 있는 가문들과의 관계를 통해 강력한 통치권으로 사회를 조정했다.


웅장한 잔해(1~1200년)

마야 세계는 그리스도의 시대부터 900년까지 거의 1천 년 동안 중앙아메리카 저지대에서 가장 번영했던 문명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연히 붕괴하여 작은 촌락으로 나뉘었고, 그나마 다른 대륙에서 온 침략자들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다. 마야 문명의 멸망에는 많은 요인들이 있겠지만, 기후학적 조사는 그 주요 원인을 가뭄으로 본다. 고대 마야인들은 페텐유카탄 반도에서 농사를 지었다. 이 지역은 멕시코 남쪽에 입술모양으로 튀어나온 반도인데, 바다에서 융기한 방대한 석회암 암반지대였다. 즉 마야 근거지는 혹독한 환경이었다. 비옥한 토양이라고는 페텐의 일부와 강의 유역 이외에는 거의 없었다. 숲을 개간하면 빗물을 받을 수 있었으나 열대의 강렬한 햇빛도 받아야 했다. 그래서 개간된 땅은 거북등처럼 갈라져 경작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마야 농부들은 늘 환경의 침탈을 받으며 살았다. 몇 년씩 가뭄이나 흉년이 드는가 하면 폭우로 토양이 침식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사회는 살아남았고 1000년 동안이나 번영을 누렸다.


마야인들은 화전 농경으로 옥수수와 콩을 재배했다. 매년 가을이면 그들은 배수가 잘되는 숲의 일부분을 벌채하고 나무와 관목을 불태웠다. 불이 꺼지면 재와 숯이 토양을 덮었다. 농부들은 이 천연 비료를 흙과 섞은 뒤 비가 내리는 시절에 맞춰 씨를 뿌렸다. 그렇게 개간된 토지를 ‘밀파’라고 불렀는데, 2년가량은 토질이 비옥했다. 그 기간이 지나면 농부들은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해 똑같은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에 경작하던 땅은 4~7년 동안 휴경지로 묵혀두었다. 이렇듯 마야인들의 거주지는 새로 개간한 토지와 지질을 회복하는 토지로 구획되었으며, 주변의 울창한 숲에서 야생식물을 채취했다. 이러한 생존 방식은 기후 압박을 받을 때 상당한 탄력성을 보였다.


마야의 도시에는 기원전 400년부터 대규모 의식용 건물이 등장했다. 이 시기부터 마야에는 도로, 신전, 궁궐 등 200여 채의 웅장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마야인들은 대규모 저수지도  건설했다. 200~800년 시기 마야의 도시들은 주로 언덕 꼭대기나 산등성이에 자리 잡았다. 아래의 채석장은 피라미드, 신전 등을 건축하기 위해 석재를 캐낸 후 커다란 저수지로 기능했다. 창의성이 뛰어난 마야 건축가들은 집수용 포장도로를 통해 저수지의 물을 고지대의 중앙 저수지로 끌어올린 다음 중력을 이용해 수조와 인근 관개 시설로 보내는 수로를 만들었다.


마야인들은 오랜 기간 동안 척박한 환경에서 농경을 개발해 왔기 때문에 환경의 제약에 잘 적응했다. 그들은 인구수와 농토에 맞춰 식량 자원을 배분할 수 있도록 촌락들을 분산했다. 마야 문명의 도시 국가들이 군데군데 모인 형태로 발달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각각의 도시는 소형 수원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수백 년이나 지속된 기후변동에도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1세기경 인구가 늘어나자 마야인들은 늪지의 물을 빼고 수로를 설치했으며 침수를 대비해 지반을 돋워 바둑판 모양의 농토로 일구었다. 인구가 더 늘어나자 가파른 언덕 사면을 계단식으로 만들어 폭우가 쏟아질 때 사면을 따라 흘러내리는 침니를 밭으로 끌어들였다. 마야의 발전은 계속해서 인구수를 늘렸다. 붕괴하기 직전인 800년경 저지대에 살던 인구는 800만~1천만 명쯤이나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자연의 부양 능력이 낮은 열대의 환경에 비추어 보면 엄청나게 높은 인구밀도였다.

 

기후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유카탄 일대에서는 세 차례의 심한 가뭄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기원전 475년에서 기원전 250년으로 마야 문명의 형성기였다. 다음은 기원전 125년에서 210년까지로, 마야 도시들 가운데 가장 큰 엘미라도르의 전성기와 일치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기원전 130년에서 180년으로 이 시기에 여러 지역의 대규모 마야 거주지들이 버려졌다. 정리해 보면 마야인들은 세 차례의 가뭄 주기 중 첫 번째와 두 번째에는 유연하게 대처했다. 예를 들어 엘미라도르 같은 도시들은 저수지를 이용하여 가뭄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런데 세 번째의 가뭄 시기에는 도시의 규모가 너무 커져 있었고 인구의 증가는 식량의 부양 능력을 초과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붕괴되기 시작한 마야문명은 860년에 또다시 시작된 가뭄에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마야의 패총에서 발굴된 이 시기의 유골을 보면 불에 타고 이에 씹힌 흔적이 있다. 이 식인의 흔적은 서로 잡아먹을 수밖에 없었던 마야의 절망적인 마지막을 말해준다.


마야가 멸망한 뒤에도 기후변동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장기적인 변화의 본질은 언제나 눈앞에 닥친 변동에 의해 가려졌다. 그리고 기후학과 과학적 기록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 기후 변동은 늘 신이 하는 일로 간주되었다. 1315년 6월부터 9월까지 유럽에는 큰 비가 내려 밀과 보리가 수확되지도 못한 채 썩어버렸다. 사람들은 신의 징벌이 내려졌다고 여겼다. 다음해 봄에도 엄청난 비로 인해 농부들은 파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거듭된 징벌로 인해 1321년까지 150만 명이 굶어 죽거나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기후학자들은 1315년의 큰 비가 소빙하기의 서막이었다고 한다. 소빙하기라는 말은 실상 과장된 용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이 시기에 발트해가 얼어붙고, 템스강이 꽁꽁 얼고 빙하가 알프스 마을을 덮쳤었다. 학자들은 이러한 변동이 1860년에야 끝나고 현재와 같은 온난화 추세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기후 압박은 사회 재편과 기술 혁신에 박차를 가하는 경우가 많다. 14세기에 유럽은 늘 식량 부족의 위협에 시달렸다. 이로 인해 농업혁명이 일어났는데, 울타리를 두른 커다란 농장들이 생겨나고 순무와 클로버 같은 새로운 농작물이 가축과 사람의 겨울 굶주림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영국, 플랑드르, 네덜란드는 18세기 후반 자급이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농업이 뒤처졌다. 기근이 심해지면 사회 지배자들이 정통성을 잃기 마련이다. 프랑스의 사정은 사회 불안을 초래했고, 철학적 계몽주의를 낳았으며, 프랑스대혁명을 유발시켰다. 이것은 또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이념에 영향을 주어 미국이 경제산업의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글로벌 경제의 캡슐 안에 살아가는 우리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도시가 인간 거주의 지배적인 형태인 시대를 맞고 있으면서도 기후변동이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잊고 있다. 19세기에 가뭄으로 인한 기근 및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은 적어도 2천만 명 이상이었다. 이는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보다도 더 많은 수였다. 잠재적 재앙의 규모는 인지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온난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지금, 그린란드의 빙상이 녹으면서 그 많은 물이 북대서양으로 흘러들어 멕시코 만류가 갑자기 끊긴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크로마뇽인, 추마시족, 마야인 등의 고대인들과는 달리 이동이 불가능하다. 이제 주인 없는 땅은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취약성에 대한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데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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