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blog.naver.com/armada1588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이상하게 방송 시간대를 자주 놓쳐 본방은 별로 보지 못했지만, 어쩌다 채널을 돌리다 재방 하는걸 알게 되면, 바로 리모컨을 내려 놓고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일부, 소위 본인을 지성인이라 칭하는 이들은 (예를 들면 뜨거운 사이다에 나오는 사람들?) 알쓸신잡을 꼰대방송으로, 사실상 주인공격인 유시민을 꼰대 부장님으로 묘사하고는 하지만... 유시민과 꼰대의 차이점, 그리고 그런 비판자들과 유시민의 아주 중요한 차이점은...
유시민은 어떤 사안이든간에 쉽고 재미있게 설명을 해 준다는 점이다.
자칭 지성인들은 기본적으로 대중을 무지하다 가정하고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는 듯듯 하다. 그래서 계속 가르치거나 조롱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대략
'내가 이 만큼 똑똑함'
을 말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뒷받침할 토대가 허약하다. 그래서 현학적이고 장황하면서 비약이 심하다. 이분법적 사고와 진영 논리, 체리 피킹은 그네들의 필수 덕목.
유시민은 다르다. 유시민 역시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편향된 사고를 가진 인물로 폄하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생각을 쉽고 간결하게 표현한다. 그의 이야기는 대략
'제가 생각하는 바는... 제가 아는 바는 이렇습니다.'
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달 착률 음모설에서 보듯이 사실 관계에서는 종종 틀리기는 해도, 근거로부터 결론을 끌어 내는 논리적 토대는 탄탄하다.
그래서 소위 자칭 지성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아 님 졸 똑똑하심'
이라는 생각이 드는 반면, 유시민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와, 나 좀 똑똑해진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든다.
유시민에 대해서 이렇게 길게 평을 늘어 놓은 이유는 그의 팬심을 드러내고자 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의 최근작 '역사의 역사'가 바로
'와 이 책 보니까 내가 좀 똑똑해 진 것 같아'
라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책이다.
'역사의 역사'는 일종의 역사라는 학문에 대한 학설사다. 책을 보다보면 경제학에 대한 학설사인 토드 부크홀츠의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 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세속의 철학자'들도 생각난다. 부크홀츠 보다는 좀 더 진중하고 하일브로너 보다는 좀 더 가볍다.아 그런데 둘 다 안 읽어보신 분들에게는 적당한 예시가 아닌듯 하다.
역사의 역사에는 많은 역사가들이 나온다.
서양사에서 빠지지 않는 시조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과거 수능 단골 손님 랑케와 카, 고대 중국을 다룬 책 중에 가장 재미있다는 사기의 저자 사마천,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나 월드클래스인 이븐 할둔, 우리 역사가 박은식, 신채호, 백남운, 현대의 역사가 헌팅턴과 토인비,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유재석급인 마르크스, 그리고 제레드 다이아몬드와 유발 하라리에 이르기까지...
정말 이름만 들어도 마음을 뛰게 만드는(응?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게 아니라?) 인물들이 가득하다.
여기서 다이아몬드와 하라리, 사마천의 저작을 제외하면... 음... 사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읽기 쉽지 않은 작품들이다. 헤로도토스는 당대 대중들이 보아도 쉽게 이해하도록 글을 쓴 것 같긴 하지만, 아쉽게도 그와 나 사이에 2,500년이라는 시간이 있다보니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헤로도토스와 박은식, 신채호, 이븐 할둔까지는 좀 낫다. 나머지 사람들은 솔직히 나 같은 대중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게끔 글을 쓴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면 아예 상대도 안하겠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본인과 본인 주변 사람들이 워낙 다들 똑똑하다보니 나 같이 낮은 수준을 가진 사람들을 경험해 보지 못해서 난이도를 높게 설정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이야기한 명인들은 역사 관련 책 몇권 읽어보신분들이라면, 대부분 몇 번씩 들어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책을 읽어보신 분들은 별로 없을거라 본다. 이유는 방금 언급했듯이 그 분들의 책은 어려워 진입 장벽이 높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유시민이 있다. 그는 명인들의 책을 제대로 소화하여 우리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번역해 주었다. 이건 원문의 뜻을 그대로 살려줘야할 전문 번역가의 영역이 아니다. 유시민 같은 지식소매상 작가가 해 줘야 할 일이다.
그러고보니 본인을 지식소매상이라 하지만 저자는 어떤 면에서 수공업자일지도 모르겠다. 어려운 내용의 글을 쉽게 풀어주기 때문이다. 그의 손을 거쳐 범접하기 어려운 원재료가 말끔한 상품으로 거듭났다. 이는 상업의 아니라 공업의 영역이다.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역사가들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어떻게 역사를 풀어나가느냐에 대한 이야기다. 그 관점과 방법은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르다. 각각의 관점과 방법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 시대를 함께 읽을 수 있다.
아마 에필로그에서 밝힌 저자의 말을 들어보면 대충 감이 잡힐 듯 싶다.
"나는 그들이 왜 역사를 썼는지, 무엇의 역사를 서술했는지, 왜 하필이면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했는지 알고 싶어서 귀를 기울였다. 인간과 세상에 대해서 그들이 펼친 생각을 이해하고 그들이 텍스트에 넣어 둔 감정에 공명해 보려고 노력했다."
역사를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평소에도 역사책을 달고 살며 나무위키를 검색하고 새로운 논문까지 찾아보는 소위 '역덕'들은 이 책에 대해 실망할 수도 있다.
저자도 이 부분을 인정한다.
"이 책의 한계를 지적해 둔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이미 느꼈겠지만, 이 책은 이름난 왕궁과 유적과 절경 사이를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잠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인증 사진을 찍는 패키지여행과 비슷하다. 패키지여행은 안전하고 편리하지만 자유여행과 달리 소소한 즐거움이나 깊은 의미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패키지여행은 짧은 시간에 적은 비용을 들여 중요하고 이름난 공간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이 책도 그런 점에서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자유여행을 하면 시간 되는 만큼 마음 가는 대로 다니면서 도시의 다양한 얼굴을 볼 수 있지만 그 도시의 전체적인 면모를 놓칠 위험이 있다.
그럴 여유만 있다면, 먼저 패키지여행을 한 다음에 자유여행을 떠나 도시의 겉과 속을 다 보는 것이 좋은 여행법이다. 이 책으로 미리 해 본 패키지여행이 헤로도토스부터 하라리까지의 역사의 역사를 자유롭게 여행하려는 독자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이해한다."
책을 다 읽는다면 아마도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을 읽은 느낌이 들 것이다. 여기 소개된 명사들의 저작도 한 번 쭉 훑어 본 느낌 말이다. 책 몇 권 분량을 금방 소화한 것만 같다. 평소에는 엄두도 나지 않던 그런 책들 말이다.
저자가 직접 이야기한 것 처럼, '역사의 역사' 만으로는 수박 겉핥기 식으로 다룬 것일 테지만 상관 없다. 여기서 흥미를 더 느꼈다면 탄력을 받아 각 저자의 저서를 직접 읽어 볼 수도 있고, 만일 저서를 읽어볼 마음이 전혀 없다 하더라도, 다른 누군가 그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그래 그 사람이 그런 생각으로 책을 썼다 하지' 라며 고개를 끄떡일 수 있다.
그래서 '역사의 역사'가 어떤 책이냐에 대해 말한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그냥 한 번 읽어봤는데, 뭔가 되게 똑똑해진 기분이 드는군요."
물론 실제로 내가 똑똑해졌을리는 없다. 그래도 그런 기분이라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래도 얻어갈게 많았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돈 주고 사 볼 가치가 있다.
[출처] 역사의 역사 _ 뭔가 똑똑해진 기분이 든다.|작성자 뇌순백의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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