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한기독교] C.S.루이스
[출처] http://cafe.naver.com/bookishman/54439
올 초에 부장님과 얘기를 나누다가, 부장님이 읽을 만한 신앙서적으로 이 책을 추천해 주셨었던 기억이 있다. 넌크리스천들이 읽어도 기독교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된다면서. 우리 부장님은 본인은 교회에 다니지 않으시면서 마음은 늘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시는 분, 하지만 이 책을 읽으신 후에도 부장님은 굳이 다시 교회에 나가지 않으셨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이 부장님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필요는 주지 못했는가보다, 라고 생각하며 흘려넘기고, 그냥 머릿속에 이 책의 제목을 기억하는 정도로 그쳤던 것 같다
그리고 몇 달 후, 교회 추천도서로 다시 이 책을 만났다. 순전한 기독교. 읽을 것들이 유난히도 많았던 달이라서 조금은 무거워 보이는 내용과 주제에 많이 걱정을 했지만, C.S 루이스의 말하듯 글쓰기 (실제로 라디오 강연 원고로 쓰였던 거라고 한다) 덕분에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그리 어렵지 않게, 술술 읽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이 책의 논리는 얼마나 탁월한지, 그러면서도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들로 이루어져있는지 읽는 내내 탄성을 얼마나 자아냈는지 모른다.
하지만 또 술술 읽어 나가기에,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그리 가볍지 않다. 도덕과 종교, 신과 인간, 그리고 그 안에서 신앙인으로서의 바람직한 모습 등에 대한 것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써내려간 책이기에. 게다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직면할 수 밖에 없는 부끄러운 내 안의 죄들과 정면으로 만날 수 밖에 없게 해 주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사실 나는 도덕적으로 선한 방향을 늘 추구하면서 산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내 모습이 하나님 안에서 부끄러웠던 적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나의 모습이 곧 가장 큰 죄였다. 교만이라는 큰 죄.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선한 사람으로 느껴질 때는-특히나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게 느껴질 때는-확실히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를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p197>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나쁜 악이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부까지 침투할 수 잇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덜 나쁜 악들은 사탄이 우리의 동물적 본성을 이용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동물적 본성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옥에서 곧장 나옵니다. 교만은 순전히 영적인 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악들에 비해 훨씬 더 교묘하고 치명적입니다. (중략) 그는 여러분 안에 교만이라는 독재정권을 세울 수만 잇다면 순결하고 절제하며 용감하게 사는 것쯤은 얼마든지 봐줄 수 있습니다. <p198>
나의 신앙, 그리고 선함의 추구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일 때, 이것은 나에게 교만이고, 그것은 다른 어떤 것들, 표면상으로 더 나쁜 죄로 보이는 것들보다 더 큰 죄라는 것이다. 이 사실은 나에게 참 많은 것들을 시사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참 바뀌어야 할 것들이 많구나, 우선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많이 들어 엎어야겠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 역시 감정이 아닌, 의지의 문제라는 것 역시 인상적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웃을 사랑한다, 라는 것이 감정적으로 쉽지 않을 때는 '그를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사실 많은 경우 그렇다. 의지로 인한 행동을 통해 감정을 발생하게 돼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인간은 참 많은 부분을 감정에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정도 주셨지만 자유 의지도 주셨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큰 선물인 자유 의지를 하나님을 위해, 사랑을 위해 써야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쓸 수 있을 때, 그 자유는 더 빛을 발하게 돼 있으니까. ^^
사실 내가 적은 부분은 이 책의 극히 일부다. 이 책은 더 많은 것들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나는 자기 중심적 리뷰를 쓰기 때문에, 그냥 내가 가장 크게 인상적이었던 부분만을 얘기했고, 그 앞부분 예수가 하나님일 수 밖에 없는 이유라던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것을 논리적으로 입증한 부분들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기독교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다. 이런 부분들을 잘 기억한다면, 논리적 이유를 들어가며 "나는 이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상당 부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C.S. 루이스는 자신의 논리를 강요하는 다른 책의 저자들보다 훨씬 논리적이면서도 이 책에서 언급하는 모든 논리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엄연히 신앙에는 단계가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량에는 그만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건 자신이 이해하는 방식일 뿐이라고 말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받아들일 것을 말하고 있다. 어떤 책을 읽다 보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까지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을 어느 정도는 최소화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사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역사하는 게 아닌데,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 역시 어폐가 있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사실 난 참 많은 부분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었다고, 이 책의 논리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180도 변하기란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이러한 구절들은 또 내게 힘을 준다.
그리스도인이란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 몇 번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사람-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매번 그를 회복시키며 그리스도처럼 일종의 자발적인 죽음을 반복할 수 있게(어느 정도까지는) 해 주므로-이라는 뜻입니다. <p111>
몇 번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사람, 날마다 다짐하고, 결심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야지. 내 안의 모습을 온전하게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라는 생각을 하며, 하나님 앞에 온전한 모습에 가깝게 될 수 있는 사람으로 설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완벽한 온전함을 기할 수는 없겠지만 날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
언제 시간이 있으면 부장님과 대화해 보고 싶다. 이 책을 읽고, 인정하셨으면서도 왜 부장님은 생각의 변화가 있었을 뿐, 행동의 변화는 없으셨는지, 내가 보기엔 충분히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책이었는데, 아무래도 그만큼의 의지가 부족했던 문제였을까? 아니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어떤 다른 문제들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주셨을까요? 악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자유의지지만, 사랑이나 선이나 기쁨에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것 또한 자유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하나님이 가장 고등한 피조물에게 주고자하시는 행복은 사랑과 즐거움의 정점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며 이웃과 연합하는 데서 생겨나는 행복으로서, 거기에 비하면 지상에서 남녀가 나누는 가장 황홀한 사랑조차 물 탄 우유처럼 싱거울 것입니다. 바로 이런 행복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C.S.루이스의 다른 책들에도 관심을 가져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