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인류 진화는 어디로 갈까? (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著)
억스리
2012. 9. 7. 10:37
![]() ‘제노사이드(genocide)’. ‘대학살’을 뜻하는 책 제목은 전쟁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미국 대통령이 과학기술보좌관에게서 ‘인류 멸망의 가능성-아프리카에 신종 생물 출현’이라는 보고를 듣게 되는 장면부터 과학의 향기가 진하게 풍긴다. 주인공은 일본 도쿄 문리대 대학원 제약화학연구실에서 유기합성 연구를 하는 석사과정생인 고가 겐토.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대학 교수인 그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면서 평범한 대학원생인 겐토의 삶은 꼬이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상이라도 한 듯 겐토에게 어려운 숙제를 남기고 겐토가 그 문제에 하나씩 접근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국어 번역판이 700여 쪽에 이르는 이 방대한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활동 무대도 전 지구를 아우른다. 미국에서 콩고로, 다시 일본으로, 그리고 포르투갈까지 전혀 연결될 것 같지 않은 직업과 국적의 사람들이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얽히고설킨다. 소설이라는 특성상 스포일러(spoiler)의 소지가 있어 줄거리를 자세히 밝히긴 어렵다. 한 가지 힌트라면 작가가 책 첫머리에 던진 ‘인류 멸망의 가능성-아프리카에 신종 생물 출현’이라는 단서다. 아프리카에 출현한 신종 생물과 인류 멸망과의 관계는 뭘까. 책의 제목인 ‘제노사이드’는 신종 생물의 출현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책 표지에 초록색 어린이가 있다는 점도 상기하자. 이 아이는 도대체 누구일까?) 특히 인류의 멸망과 관련해 1977년 미국 슈나이더연구소 조셉 하이즈먼 박사가 썼다는 ‘하이즈먼 리포트’는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나름의 추리력을 발휘하도록 돕는다. ‘하이즈먼 리포트’에서 예상한 인류 멸망 시나리오는 총 5가지로 소행성 충돌, 지자기 역전, 핵전쟁, 슈퍼 바이러스, 그리고 인류의 진화다. 책 곳곳에는 작가가 이공계 대학원생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조사를 많이 했을지 짐작하게 만드는 대목도 등장한다. 겐토가 학부 동기와 식당에서 만나 관심 있는 여학생에 대해 얘기할 때 “가까워지지도 않고 멀어지지도 않고, 반데르발스 힘이지”라고 말한다든지, 겐토의 친구가 “같은 부실에 괜찮은 애가 있는데, 금속결합이야. 둘 다 한 집단 속에 있는 원자 하나에 불과하니 움직일 수가 없지”라고 하자 겐토가 “어떻게든 공유결합하고 싶을 텐데”라고 대꾸하는 장면에서는 ‘화학과 학생들만 할 수 있는 대화’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터진다. 실제로 작가는 책 맨 뒤 ‘감사의 글’을 통해 제약화학을 전공한 교수와 대학원생 9명에게 지도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겐토를 도와 사건을 해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로 한국인 유학생 이정훈 씨가 등장하는 점도 흥미롭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인 관계를 생각하면 작가 입장에서도 주인공의 최측근을 한국인으로 설정한다는 게 부담스러울 법도 하다. 하지만 작가는 출간 당시 일본 출판사와의 인터뷰에서 “‘공정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그런 점에서 일본인의 과거(제노사이드)에만 눈을 감을 수 없었고 한국과의 관계를 제대로 그려야만 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현경 기자 uneasy75@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