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레닌의 연인 이네사', 혁명과 삶 그리고 프라이드

억스리 2011. 4. 27. 19:06

[출처] http://blog.daum.net/chronotopos/260

 

 "레닌의 연인 이네사", 마이클 피어슨 지음, 임옥희 옮김

 나무와 숲, 2006 (ISBN 13-9788988138724)

 

 

'엠엘(ML)'이니 '피디(PD)'니 하면서 머리싸매고 계파논쟁에 열올리던 시절이 그야말로 엊그제 일처럼 느껴지는데, 요즘 같은 세상에 술먹다가 그런 말을 주절이면 '메이저 리그'나 '피디수첩' 얘기하면서 왜들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인상 북북 쓰고 앉았냐고 오해받기 십상일꺼란 생각을 한다.

 

하기사 소비에트가 해체되고 '레닌그라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되돌려진게 벌써 만으로 20년이나 지난 일인데다가, 그나마 남아있는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광경을 거의 매일같이 목격하는 이 마당에, 앞선 그런 추억담 비스무레한 감상을 간직하고 친구에게 술잔을 건네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한없이 우스꽝스런 노릇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같은 현실이 안타까워 못살겠다는 말은 결코 아니지만, 음 글쎄 뭐랄까 이를 단순히 '격세지감'이라는 말 한마디로 정리해 버리기엔, 우리가 함께 고민했던 그 세월의 무게가 너무 가볍게 치부되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마치 노점가판에서 떨이로 팔려나가는 짓물러터진 한겨울 딸기처럼 말이다.

 

갑자기 왠 뜬굼없는 딸기타령이냐고 의아해 하실까봐 살짝 부연을 하자면, 이게 그러니까 지난 21일 금요일 밤에 있었던 일이다. 그 안날 기분좋은 소식을 듣고 내친김에 다소 과음을 하고 말았는지라, 이날은 그냥 조신하게 귀가조치를 취해볼까 싶어 가방을 정리하고 있자니, 같은 방 선배가 오늘은 한잔 해야하는 날이니까 다들 의관을 정제하고 밤거리로 나설 채비를 서두르자고 하신다. 흐음 일년에 한두번 볼까 말까하는 결연함과 비장함이 물씬 풍겨나오는 선배의 표정에 뭐라 도망갈 핑계꺼리도 찾지 못하고 어쩔수 없이 따라나서 보니, 마침 그 날이 '블라디미르 레닌'이 돌아간 기일이었던 모양이다.

 

좌우간 단골술집에 또아리를 틀자마자 '레닌' 팬클럽 회장직이라도 떠맡으신 기분인지, 느닷없이 몇권의 책을 펼쳐놓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신다. 그의 출생과 꼬마때 이미 혁명 조직가로써의 싹수가 보였다는 일화에서부터 시작된 선배의 이야기는, 정치투쟁을 전개하는 청년기의 모습, 그리고 '2월혁명'과 '10월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설명을 거쳐, '볼셰비키'와 '코민테른'이 창설되는 모습까지 주구장창 이어진다.

 

그리고선 '이문열'이 쓴 "사람의 아들"에 등장하는 캐릭터, 즉 '민요섭'과 '조동팔'이의 예를 들어가며 '마르크스'와 '레닌'이 가진 매력의 차이를 설명하신다. 일테면 '마르크스'와 '민요섭'의 경우는 이론가라는 이미지로 신성화 되어버린 부분이 너무 크기에 일반대중이 범접하기 어려운 일종의 경외감(인간미가 없다는 그런 말인가 보다)을 느낄수 밖에 없지만, '레닌'과 '조동팔'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말씀이다. 다시말해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그들의 행동가적인 모습에서 우린 시간과 공간, 혹은 정치노선이나 혁명과업의 방향성을 떠나 인간으로써 그저 깊은 공명을 하게 된다는 소리다. 이같은 생각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통독후의 갈등상황을 절묘하게 담아냈던 독일영화 "굿바이, 레닌!(볼프강 베커, 2003)"이라는데, 특히 타이틀에서 굿바이를 하는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인물이 '마르크스'도 아니고 '스탈린'도 아닌, 바로 '레닌'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강변하신다.

 

솔직히 동성에게선 그다지 매력을 못느끼는 성격인지라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말씀을 흘려듣고 있자니, 옆에 있던 30대 후배가 귀엣말로 "그 양반이 정말 여성한테도 매력적으로 보였을까요?"라고 속삭인다. 뭐라 딱히 마땅한 대답꺼리가 생각나질 않기에, 나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에드 해리스'가 수염단다고 매력적이겠냐? 연기를 잘하니까 매력적으로 보이는 걸테지, 하면서 키득거린다. 그러자 이번엔 우리도 근사한 나인데 넘들처럼 걸그룹 얘기도 하고, 또 편갈라서 '삼촌' 노릇도 하고 했으면 좋겠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음 안그래도 하나 있는 조카 등쌀이 버거운지라 넘의 집 딸내미들한테 까지 삼촌짓 하고 돌아다닐 맘은 추호도 없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반박하기도 귀찮고해서, 그래 니 말에도 일정부분 일리가 있다며 맞장구 좀 쳐주고 한잔 마셔볼까 했더니, 왠지 관자놀이 부근이 뜨근뜨근 해지는 것이 우릴 무지하게 노려보고 있는 시선을 감지한다.

 

얼른 정신을 추스리고 선배가 술상위에 펼쳐놓은 책들 중 그나마 만만해 보이는 걸로 한권 잽싸게 집어들고 원만사태수습을 위한 책읽기를 결심한다. 다소 생경한 이름이지만, 아무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계열의 선구자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이네사 아르망'의 이야기를 말이다. 음 이는 여담인데, 나보다 한템포 늦게 책을 고른 후배는 지금, 거의 토씨만 빼면 몽땅 한자인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상권을 읽고 있다. 측은지심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듯 하다.

 

각설하고, 마흔 여섯이란 짧디 짧은 그녀의 삶을 서사체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는 이 책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을테다. 먼저 첫번째 단락은 그녀가 유명한 오페라가수의 딸로 태어나 러시아 출신의 부호와 결혼을 하고, 또 네명의 자식을 두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히 언급한, 일테면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일견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여인의 모습이지만, 실제론 4개국어에 능통하고 총기발랄한데다가, 더우기 끊이없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궁금증(문제의식)을 토로하는 모습 등을 통해, 우린 그녀에게 범상치 않은 운명이 예기되어 있음을 금방 짐작하게 된다. 

 

두번째 단락에 들어서면, 그녀가 남편의 막내 시동생 '볼로댜'와 관계를 가지기 시작하면서 '철없는 여인'이 아닌 혁명가로써의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음 시동생과의 관계라는 대목이 좀 서먹하긴 한데, 하여간 둘사이엔 아이도 생기지만 그들에게 있어 이러한 문제(세상의 눈총)는 아무런 장해가 되질 않는다. 오히려 당시의 사회분위기, 즉 급격히 고조되어 가는 '반짜르 운동'에 동참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을 받고, 또 공동의 목표를 향해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 속에서 그들의 '감정'은 더욱 견고한 형태로 발전할 뿐이다. 결국 이들의 관계는 1909년 시동생 '볼로댜'가 지병이었던 폐결핵의 악화로 26세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남으로서 끝을 맺지만,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그녀는 단순한 '귀여운 여인(윗입술을 말아올린 '프리티 우먼'이 아니라 체홉의 소설속에 등장하는 '올렌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감정'의 대상(남자)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취향을 바꾸어가는 수동적인 여인과는 확연히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이같은 사실은 젊은 애인과의 이별에도 불구하고, 높아져만 가는 변혁의 파고를 온몸으로 감수하며 혁명과업의 진두에서 활약하던 모습이라든지, 아니면 첫번째 투옥지인 모스크바의 '바스만나야 형무소'를 거쳐 북극의 유배지로 떠나는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빠를지도 모르겠다. 물론 '대의(혁명)'와 '감정(사랑)'사이에서 그녀가 감당해야만 했던 인간적 고뇌는 가히 짐작도 하기 어려운 노릇일테지만 말이다. 이 점에 대해 저자는 시동생이자 연인이었던 '볼로댜'의 존재(그들의 관계)를, 어디까지나 그녀가 '레닌'을 만나기까지의 '징검다리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절하 하고 있지만, 음 이 부분은 좀더 신중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왜냐하면 '레닌'과의 운명같은 만남이 있은 이후에도, 그녀는 '혁명의 당위성'과 '감정의 순결함'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유지/관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서 혁명과 사랑은 하나의 벡터값을 지닌 동일한 '감정체계'였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자신의 먼 고향이기도 한 망명지 프랑스 파리에서 그(레닌)를 처음 만난 후, 그녀의 삶은 그야말로 공사를 불문하고 최고의 절정을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이 세번째 단락에서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은폐되어왔던 한 여인의 혁명적인 생애(업적)와 더불어, '레닌'이라는 위대한 조직혁명가의 감춰졌던 개인사를 엿볼 수가 있다. 때로는 투쟁노선을 두고 한치의 양보도 없는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목숨을 걸고 그와 함께 '봉인열차'에 오르는 장면이라든지, 또는 민중으로부터의 권력이 집중되는 '소비에트'를 탄생시키는 과정, 그리고 당과 노동조합내 잔존하던 여성차별에 대항하여 '제노트델'의 위원장이란 신분으로 당내 최고 권력자였던 그와 이인삼각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모습이나, 혹은 '브뤼셀 당대회' 이후 플라토닉하게 이어지던 그들의 관계가 이른바 '레닌 암살미수 사건'을 계기(그의 병간호)로 그동안 서로가 숨겨두었던 감정을 솔직한 몸짓으로 드러내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음 이는 정말이지 잘짜여진 로맨스를 한편 읽는 듯한 기분이 든다. 역시 삶보다 더한 드라마는 없을테지 싶은게, 비단 러시아 혁명사라는 역사인식에 골몰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매혹적인 이야기엔 필시 많은 사람들이 깊은 공감을 하게 될 것임을 직감한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가 아니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10월혁명' 후 모스크바에서 가장 막강한 권한을 지닌 여성이자 '소비에트 인민위원'이기도 했던, 그리고 앞서도 말했지만 '중앙위원회 여성분과(제노트델)' 위원장을 엮임하면서 공장내 집단식당과 무료매점, 그리고 탁아소 병설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1920년에는 '제1차 국제여성공산주의자 대표회의'를 주관하는 등, 남자도 하기 힘든 혁혁한 혁명과업을 완수했던 그녀의 이름은, 1926년을 전후로 돌연 역사의 기록속에서, 또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녀가 휴양차 떠난 코카서스 지방에서 콜레라로 돌아간지 불과 5년 후의 일이다.

 

이에 관해 저자 '마이클 피어슨'은 "젊고 부유한 잘난 여성이라는 그녀의 배경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미 신성화 되어버린 레닌과 그녀와의 의심스러운 관계 때문이기도 했다"고 지적하면서, 결국 그러한 이력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이미지와 부합하지 않았기"에, 훗날 살아남은 혁명꾼들에 의해 그녀의 존재는 소거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술회한다. 한마디로 '레닌'의 혁명가적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공모한 결과라는 소리다. 실제로 그녀와 '레닌'이 혁명지를 전전하며 주고받은 '연서'는 수백통 아니 수천통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남아있는건 고작 150여통에 불과하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개인의 역사'를 날조하려 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흐음 참으로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유리 겔라'나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숟가락이란 숟가락은 죄다 휘어놓고, 또 '자유의 여신상'인지 나발인지를 사라지게 한다 하더라도 그들 자신의 마음 만큼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다. 바꿔말해 온세상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자기 자신에게는 거짓말이 통용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암만 감추고 덮어두려고 해도 개개의 삶이 모인 총합으로써 기록되는 역사란, 언젠가는 그 안에 담긴 각각의 기억을 숨김없이 만천하에 들어내고 말 것이다. 다소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물론 있을테지만 말이다.

 

좌우간 '신의 이미지'에 가장 근접했던 이상적인 혁명가 '레닌'의 모습이, 근년들어 새로운 관점에서 재조명되고 있음은 매우 반가운 일이고, 게다가 '이네사 아르망'과 얽힌 수많은 일화들이 공개됨으로써 그의 이미지가 폄훼되기는 커녕, 오히려 한층 더 매력적인 인물로 각광받고 있다는 사실도 무척 흥미롭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일면들, 즉 먼저 돌아간 그녀의 무덤 앞에서 사람들의 눈 따윈 개의치 않고 마치 소년처럼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나, 아니면 '슬라보예 지젝'의 글을 통해 접하게 되는 '슈베르트'를 즐겨듣고, 또 사랑과 열정의 차이에 대해서 논쟁하길 즐기던 그의 낭만스럼("지젝이 만난 레닌", 정영목 옮김, 교양인, 2008)에서, 그가 정녕 바라던 것은 신성을 획득한 절대자의 위치가 아니라, 사람들의 곁에서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바꿔보고 싶었던 순수한 열망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한편, 이렇듯 재평가를 받는 '레닌'과는 달리 여전히 그의 그늘에 묻혀 있는 '이네사 아르망'이란 여인의 생애가 왠지 무지하게 가엽게만 느껴진다. 음 솔직히 역사상(신화를 포함해서) 이러한 여인, 그러니까 '남자'에 가려 정당한 '기록의 대상'으로부터 제외된 삶이 어디 한둘이겠나 싶기도 하다. 일테면 '테세우스'의 영웅담 속에 앞뒤 못가리는 무모한 여인의 대명사처럼 등장하는 '아리아드네'라든지, 아니면 일생을 바쳐 '차이코프스키'에게 물심양면으로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는 '폰 멕크 부인', 혹은 '로뎅'에게 속아 정신병원에 가야만 했던 '까미유 끌로델'의 경우와도 같이, 조금만 가공하면 화려한 보석으로 찬란한 빛을 발휘할 수 있는 원석(이야기)들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엔 무궁무진하게 많을꺼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불현듯 그렇다면 이처럼 역사의 기억에서 소외된 수많은 무명의 여인들이 만일 자신의 생애를 돌이켜 본다면 과연 어떠한 심정이 들까 궁금해진다. 너무도 당연하게 서운함이나 야속함, 또는 억울함이나 원망스럼이 우선할지도 모를 일이다. 헌데 마땅한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도 '이네사 아르망'이란 여인은 그렇지 않을꺼 같다는 마음이 든다. 설령 그것이, 그러니까 그녀의 존재성이 역사로부터 완벽하게 소멸당하고 마는 결정적인 원인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혁명동지이자 둘도 없는 삶의 파트너(연인)였던 '레닌'의 탓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그저 넉넉한 웃음으로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나 않을까 싶다. 대의(혁명)와 감정(사랑)이 혼연일체되어 있던 그녀에게서 '레닌'은 자신의 삶, 바로 그 자체였을테니까 말이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정치투쟁의 목적이 되고, 또 그의 생각은 그녀를 지탱하는 신념이 되고,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를 행복하게 만드는 음악과도 같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 '레닌'이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자기만의 '프라이드'였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이는 '자존'이나 '자만'과는 분명히 다른, 지극히 원초적인 형태의 '그리움'으로 나타나는 지고지순한 그 무엇임에 틀림없다.

 

문뜩 내게도 그런 '프라이드'가 있을까 가만히 반문해 본다. 흐음 솔직히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선 아직 잘모르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대문자(대의)'든 '소문자(감정)'든 간에 '프라이드'를 지키며 살았던 그녀의 모습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는건, 결코 술취해서 주절이고 있는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점일테다. 술깨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고 하신다면 할말 없지만서두 말이다.

 

 

 

 

       

                                                                                                            Катюша(katyus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