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세계를 재다> by 다니엘 켈만 - 인간 혹은 삶을 재다

억스리 2014. 7. 5. 00:09

[출처] http://blog.naver.com/riversh79/80129520967



세계를 재다

작가
다니엘 켈만
출판
민음사
발매
2008.08.05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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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재다> by 다니엘 켈만

 

1. 전세계를 방랑하며 직접 몸으로 경험을 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훔볼트. 방안에서 사유를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가우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인간과 세계를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주인공인 훔볼트와 가우스는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의 본질을 탐구했다. 훔볼트는 아프리카와 남미를 돌아다니며 세계를 탐험한 반며나, 가우스는 집에 칩거한 채 수학만으로 우주 공간이 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두 사람을 한자리에서 만나게 하면 인간과 세계를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품 해설 중, 다니엘 켈만의 인터뷰-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두 천재의 삶을 소설로 읽어가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작가의 메시지는 쉽게 잡히지 않는다.

 

 

2. 가우스는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의심을 말한다. ‘모든 평행선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명제는 어떤 전제하에서만 성립한다. 즉 이 공리는 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전제 혹은 공리 체계하에서만 ‘진실’이다. 비유클리드 기하학, 즉 직선이 사실은 원을 그리는 지구라는 공리 체계에서는 평행선은 서로 만나게 된다.

 

유클리드 공간은, 『순수이성비판』이 주장하고 있듯이, 인간의 마음에 직관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형태가 아니며, 따라서 선험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허구, 아름다운 꿈처럼 보입니다. 진리는 섬뜩합니다. 서로 평행한 두 개의 직선은 결코 만날 수 없다는 명제는 결코 증명된 적이 없습니다. 유클리드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것을 증명한 적이 없어요. 그 명제는 사람들이 항상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절대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공간은 주름져 있으며 구부러져 있고 매우 기이합니다. -P.97-

 

공리 체계가 다르면 ‘진실’이 다르다. 로렌츠의 곡선(카오스 이론의 시발점?)은 초기값의 미세한 차이가 시간이 흐르면 커다란 차이를 이끌어냄을 보여준다. 결국 이는 인간 존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각자의 환경 속에서 살아오며 형성된 ‘공리 체계’(인식)는 각기 다른 인간의 존재양식들을 이끌어낸다. 훔볼트와 가우스. 진리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추구했던 이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국 서로의 방식을 존중하게 된다. 비슷한 예로는 가우스와 창녀 니나의 관계가 있다. 가우스는 그녀를 위해 러시아어를 배우려고 한다. 물론 이는 두 사람만이 아니라 가우스와 요한나, 가우스와 미나, 가우스와 아들, 훔볼트와 형, 훔볼트와 그의 조수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우스는 요한나와 첫날밤을 보내고, 내레이터는 가우스의 생각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로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사람이 이런 상황에 빠졌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럼에도 금세 무언인가가 달라졌다. 그는 더 이상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아침이 되었을 때 그들은 항상 함께 지내 온 것처럼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p.154-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도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명제일 것이다. ‘진리’가 상대적이라면 인간의 삶에 ‘절대’적인 모범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길을 정해야 하고, 너무도 다른 ‘너’와 접근해야 한다. 물론 이는 이해하려는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신비' 혹은 불가지(不可知)가 놓여 있다. 따라서 가우스에게 멍청하다고 매일 혼나던 아들의 삶 그리고 그가 겪을 신세계에서의 ‘이후의 삶’ 역시 어떤 삶이 옳은지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가우스는 가우스의 삶이 있고, 그의 아들은 그만의 삶이 있는 것이다. 가우스는 결국 이를 알아차리고 "복잡한 것은 그만 하자"고 생각한다.

 

또한 훔볼트의 제자는 "느리고 힘들게 나의 날들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점점 작아지는 세계는 나와 나의 집, 그리고 집 주변의 밭을 겨우 포함하고 있습니다."라고 훔볼트에게 편지로 이야기한다. 거대한 세계의 진실을 추구했던 그들의 젊은 날이 지나가고, 그는 삶에 있어서는 '자신의 좁은 세계'를 알아채게 된 것이다. 삶에 있어서 보편성(곧 진리)은 추상이자 허구일지도 모른다. 개인의 행복한 삶은 결국 '자신의 좁은 세계', 즉 자신이 맺고 있는 고유한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하는 진리일지도 모른다.

 

물론 삶이라는 작은 세계의 진리를 찾는 것 역시 거대한 세계의 진리를 찾는 작업과 동일한 과정을 겪는다. 자기 자신을 알 것, 스스로의 기준을 세울 것,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것, 그리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 등등...

 

먼 곳으로 여행을 한 사람은 많은 것을 경험합니다. 그중의 몇 가지는 자기 자신에 관한 거지요. -p.184-

 

운명이란 것은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어떤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로 결정하면 언젠가는 그것이 정말 운명이었다고 믿게 될 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일들도 많아서 억지로 운명이라고 믿었던 것에 끼워 맞추어야만 하지요. -p.273-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한다고 생각합니다. 물건을 만들고 발견하고 자산을 획득합니다.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을 발견하고 아이를 낳습니다. (...) 우리는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했다고 생각합니다. 수학이 비로소 우리가 쉬운 길을 선택해 왔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 세상은 아쉬운 대로 측량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p.227-

 

완벽하게 '세계를 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측량했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것을 이해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인간의 삶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세계(인간)를 완벽히 이해하기에는 그 안에 증명불가능한 '신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불가능성을 상정해둔 채로, 그럼에도 이해해나가려고 시도(노력)한다, 라는 일면 모순적 방법이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길인 것일까? 아니 이것이 살아간다는 것일까? 

 

 

p.s 읽으면서 가우스와 훔볼트가 부러웠던 것은 그들의 재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가 오는 어느 날 그는 일을 끝마쳤다. 펜을 옆으로 치우고 요란하게 코를 풀고 이마를 문질렀다. 지난 몇 달간의 기억들, 모든 갈등, 결정과 생각들이 벌써 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모든 것이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겪을 일 같았다. 그의 앞에는 그 다른 누군가가 남긴 원고, 빽빽하게 적혀 있는 종이 수백 장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뒤적거리면서 자신이 이것을 어떻게 완성할 수 있었는지 의아해했다. 어떤 영감도, 어떤 깨달음도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일에 매달렸던 기억밖에 없었다. -P.93-

 

몰아(沒我) 혹은 몰입. 첫날밤에 아내의 옷을 벗기고 애무를 하다가 문득 생각난 아이디어를 적기 위해 뛰쳐 나가는 가우스. 숱한 죽음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세계를 경험하는 훔볼트. ‘몰아’라는 강력한 행복의 한 양태를 얻었던 그들이 부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물론 이 행복 역시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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