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했던 선비들의 정체를 밝힌다!

억스리 2014. 5. 19. 10:50

[출처] http://blog.naver.com/hong8706/220002600886



오늘 소개할 책은 계승범 교수가 쓴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가 되겠습니다. 일단, 서두에 분명히 밝혀두자면 저는 경북 고령에 자리 잡은 꽤 유서깊은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주욱 한문 배웠고 천자문 명심보감 소학까지 배웠습니다. 학부를 역사학과 갔던 이유도 이런 배경이 꽤 큰 영향을 미쳤죠. 

 

저는 어려서부터 한자공부하는 것에 대해 꽤 찬성하는 편인데, 일단 어려운 단어 특히 동음이의어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한자의 조성이 단순함에서 복잡함으로, 직관적에서 심층적으로 나아가는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의 학습능력 및 인지능력을 키우는 데에도 도움된다고 보는 쪽입니다. 뭐 한자 몇급을 따냐 못따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만, 아이들이 한번 자격시험에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쪽입니다.

 

이렇게 한문에 대해, 그리고 제 출신배경에 대해 길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제가 어느 정도 유학을 알고, 또 우리나라 역사를 알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유교 도덕에 대해 그리고 선비에 대해 이야기할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이책("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을 읽게 된 이유는 친애하는 블로거, 만쭈리님 때문인데, 학부 역사학과 나왔다는 자부심을 산산히 무너뜨릴 만큼 역사에 대해 제가 몰랐던 것을 많이 말씀해주셨거든요. 특히 포스팅 마지막 부분에 오늘 소개하는 책("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을 계속 참고도서로 적어 두었기에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은 후 아주 큰 충격, 그리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솔직이 책이 아주 잘 쓰여지지는 않았습니다만, 담고 있는 내용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인상적인 대목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책 51 페이지).

 

여기서 분명히 해야할 점은 선비의 덕목은 정치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의 건국자들은 유교를 자신의 정치 행위의 근간으로 삼았으며, 조선 초 정치 사회제도의 법제화 과정에서 유교적 가치들이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런 유교적 가치로 무장한 사람들이 과거를 통해 벼슬에 올라 실제 정치를 담당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선비의 삶은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정치 행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유교이념이 곧 정치 이념이고, 모든 정치 행위가 유교 이념의 가치 기준에 의해 검증되어야 권위를 부여받던 조선에서 정치와 유교는 결코 분리될 수 없었다. (중략) 중국의 사대부와 달리 조선의 사대부는 학자이자 동시에 권력자였던 것이다.

예. 선비를 판단할 때, 그의 정치적 노선을 통해 파악해야 한다는 계승범 교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음풍농월 읊고 또 도학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들, 그의 정치적 태도와 행동이 선비의 덕목에 맞지 않다면 그는 참된 선비로 볼 수 없을테니까 말입니다. 보다 본격적으로 선비가 갖춰야할 덕목이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책 71 페이지).

 

공선후사와 극기복례의 덕목에 대해 살펴보자. 사적 이해관계를 떠나 공적 가치를 우선해야 한다는 공선후사, 그리고 이기심과 욕망을 버리고 예로 돌아가서 모든 사람이 공존하고 남을 존중하며 공생한다는 극기복례도 선비의 덕목 가운데 포함된다.

좋은 이야기죠.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은 이 덕목을 정말 제대로 지켰을까요? 책 72 페이지 부분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선비가 글을 연마하고 학식을 쌓는 궁극적인 목표는 수신을 통한 도덕의 완성이자, 그 것의 교화이며, 관직은 그런 교화를 이루기 위한 지름길로서 선비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이론상으로 선비가 관직에 나가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일이다.

 

학식이 높고 인품이 고결한 선비일수록 사실은 중앙의 정계에 들어가 자신의 학식과 도덕으로 국왕을 선도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데 전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중앙 정계에 질려 낙향한 선비들을 다 뭐라 할 수는 없죠. 그러나,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한 '위인(위인전의 주인공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책 73 페이지).

 

중앙정계에서 물러가 초야에 묻히려면 확실히 묻혀서 보다 높은 수준의 수신에 힘쓰고 주변에 교화를 펴야 할 텐데, 왜 자기 후학들을 조정에 포진시키고 자신은 깨끗한 선비인 양 산림에 은거하여 중앙의 정치 동향에 그렇게 민감하게 개입했느냐는 것이다.

 

조선 후기 (이황이나 이이, 그리고 송시열 등) 일반화된 산림정치의 본질은 이런 모순의 극명한 사례이다. 산림정치는 권리와 권력은 누리면서도 정작 의무와 책임은 회피할 수 있는 훌륭한 안전망이었던 것이다.

속이 시원하네요. 그리고 당쟁의 주도자들이 이런 안전망에 숨어 있기에, 당쟁은 더욱 더 심화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삼림에 숨어 있는 리더에게 종속된 제자들의 행동은 더 큰 문제를 초래했습니다. 예. 나라 전체의 문제와 자기 붕당의 문제 사이에 경중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책 77 페이지).

 

조선의 선비들은 각기 왕을 정점으로 한 국가조직에 기초해 권력 구조를 형성하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붕당의 리더 또는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에게 더 충성을 바쳤다. 그 결과, 유교의 제일 덕목인 충성의 대상이 점차 왕에서 붕당의 리더로 바뀌고 군신유의의 덕목은 관념적인 것으로 변질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왕에 대한 충성이 관념적으로 흐른다는 것은 왕을 정점으로 한 관료 조직의 위계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조선의 정치가 국가의 보편적인 이익보다는 붕당 구성원들의 사적인 이해관계에 좌우될 수 밖에 없었음을 뜻한다. 

 

왕에 대한 충성이라는 유교도덕의 제 1 원칙을 버린 것은 물론, 공선후사의 덕목마저 위반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자기 모순을 합리화하기 위해 반대 붕당을 불구대천의 원수이자 이단으로 몰아붙인 극렬한 행위 또한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저는 유교 경전이 싫습니다. 사기나 자치통감 같은 역사서는 즐겨 읽습니다만, 유교의 경전을 '고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그 '경전'을 끼고 살며, 그 '경전'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지배자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그 원칙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 철학이 좋은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바를 이야기하고 있다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켰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암튼.. 조선시대 선비들이 어떤 존재였으며, 실제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알고 싶은 분들에게 강력 추천하고 싶은 책이라 하겠습니다. 뭐, 또 식민사학이니 뭐니 공격하는 분 계시겠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을 숭앙하느니, 차라리 식민지 시대에 자본주의적 발전이 시작되었다는 식민사관을 지지하는 편을 택하고 싶네요 ㅎ



제 블로그가 '화이어'되는 경우는 크게 두 종류였죠. 하나는 부동산 이야기. 부동산에 한 맺힌 분들, 거기에 모처에서 집단적으로 유입되는 분들까지 해서 아주 난리가 납니다. 다른 하나는 후쿠시마 이야기. '너나 후쿠시마 가서 돼져*려라' 같은 아주 화기 애애한 대사가 난무하며, 이성적인 토론은 기대할 수 없게 되져. ㅎ  그런데 이제 '화이어' 되는 주제가 하나 더 늘었네요. 예. 조선시대 선비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지난 번 올린 글(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했던 선비들의 정체를 밝힌다!)의 댓글을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새벽 3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서로 *일듯 싸우는 분들이 눈에 띌 것입니다. 일단 저처럼 월급쟁이들은 주말에 글을 써놓고 주중에 약간 시간 나는 시기(보통 늦은밤이나 새벽)에 조금 더 손을 봐서 올립니다. 그러기에 이런 격정적인 논쟁이 벌어지면, 저는 손을 쓸 길이 없습니다. 새벽 출근길 지하철에서 전쟁(?)의 흔적을 발견한 다음.. 바로 '댓글금지'로 설정을 바꾸는 정도가 고작입니다. 따라서 그 논쟁에 참여하기보다는 또 다른 글을 올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자판을 두드려 봅니다. 

 

'선비정신' 혹은 '조선시대 선비'를 두고 치열한 논란이 벌어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제가 보았을 때, 이런 치열한 간극(?)의 원인은 '청산의 부족'에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말해, 역사 속에서 뭔가 개운하게 해결되지 않은채 대충 '봉합'되어 내려온 부분이 있어.. 이렇게 사람들을 투쟁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냐? 뭐 그런 이야기죠. 

 

계승범 교수님도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에서 이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 부분을 한번 인용해 보겠습니다(책 238~239 페이지). 

 

나라를 잃어버리지 않은 나라에 사는 지식인들은 '산업화' 과정에서 별 다른 정체성의 고민을 겪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록 외세에 시달릴지라도 자기들의 국가가 존속하는 한 정체성 자체가 결정적으로 도전 받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부국강병과 근대화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되면 전통문화에 대해서도 가차없이 자기 비판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유교적 전통문화 척결을 외친 중국 5·4운동이나, 머리에서 발끝까지 서양을 모방하자면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쳤던 일본의 '문명개화론'은 아주 좋은 예다. 

흥미롭죠? 나라가 망하지 않은 상태에서 산업화를 추구할 때에는 전통문화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존'이죠. 특히 범 늑대 같은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경우에는 전통문화를 아예 적으로(터키의 케말파샤?) 간주하는 경우까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미 나라가 망해버려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출현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게 바로 조선과 인도를 두고두고 괴롭힌 문제였습니다(책 239~240 페이지)

 

식민지로 전락한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왜냐하면 이미 정치적 주권을 완전히 상실해 정체성 자체의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는 전통문화를 지켜나가는 것이 정체성을 지키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잃었는데 전통문화까지 포기해야 한다면, 그야 말로 민족의 정체성이 거의 사라질 것이다. 한국이 이런 경우에 속했다.

 

사실, 당시 많은 지식인들은 유교 문화의 폐단과 선비들의 폐솝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척결하자는 운동을 거국적으로 전개하지 못했다. 김윤식이나 신채호, 이광수 같은 일부 지식인들이 유교문화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폭 넓고 꾸준한 공감대를 성공하지 못했다. (중략)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고민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인도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서는 영국을 모방하는 이른바 '근대화'가 필요하면서도, 인도의 전통문화만큼은 고수해야 한다는 두 명제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참 맘이 편했을 것 같습니다. 분명 식민지 정부로부터 강한 박해를 받았지만, 이들은 적어도 전통문화를 보호해야 하냐 마냐는 갈등은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책 240 페이지)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해주는 전통문화나 전통의식이 근대화를 방해하는 요인이라는 것은 분명 인정하면서도, 정작 이를 비판하는 순간 민족의 정체성을 버린다는 비판에 처하게 되는 게 한국이나 인도 같은 나라 지식인들의 딜레마였다. 이런 면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고민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애초부터 민족을 초월한 계급투쟁 및 반봉건 노선을 따랐기 때문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왜 그렇게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는지, 그 이유가 단박에 설명되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또 17세기 이후 정착된 전통문화에 대해 비판하는 것에 대해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알 수 있죠. '유교비판=친일세력'의 등식이 자동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특히 개화를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친일파가 되어버렸던 19세기 말의 비극이 더욱 이런 현상을 강화시켰으리라 생각해 봅니다(240~241 페이지)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이 독립국가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서양식 근대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 이외에 사실상 없었다. (중략) 결국, 한국의 근대화 모델은 일본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에 따라 한국의 개화파들은 아무래도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이 한국에 대해 대단히 침략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일본식 모델을 따르고자 한 개혁파들은 대게 친일 반역자로 몰렸고, 또 사정이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당장 박영효나 김옥균 등의 개화파들이 일본의 지지를 약속받고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고종의 변심과 일본의 배신 속에서 실패했던 것이 좋은 사례가 될 것입니다. 그럼, 성리학적 가치관을 끝까지 밀고나간 조선의 선비들은 아무런 죄가 없는가? 그렇지 않죠(책 241~242 페이지)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력이 그토록 허약했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인들이 있었겠지만, 선비들의 정신문화를 빠뜨리고 지나갈 수는 없다고 본다. 명·청 교체라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변화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명이 망한지 200년이 지나도록 소중화를 외치며 자신들이 만들었던 상상 속의 명질서明秩序 속에서 우물안 개구리 식의 정책을 추진했던 것을 빠뜨릴 수 없다. (중략)

 

조선후기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잠시 짚어보자. 조선 후기 사회가 전기 사회에 비해 아무리 발전하고 진보했을지라도, 조선 후기를 거치면서 조선의 문명 수준과 국가경쟁력이 주변 나라들에 비해 뒤쳐지게 되었다면, 한국사의 전체 맥락에서 조선 후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제가 포메란츠 교수님의 걸작, "Great Divergence"를 번역하면서 느꼈던 고민이 여기서 반복되네요. 1700년대 중반까지 양자강 하류, 그리고 일본 관동평야 지대의 생산성 수준이 서유럽을 앞섰다는 포메란츠 교수님의 지적을 보면서.. 늘 "우리 조선은 어떠했을까?"라는 고민을 했었으니까요.

 

분명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이 일본보다 뒤쳐졌다고 볼만한 근거를 찾기는 쉽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사실상 단 한번도 일본의 앞선 적이 없었다는 생각을 계속 가지게 됩니다. 당장 인구의 증가 면에서도 조선 후기 1천 2백만 전후라면, 일본은 3천만으로 증가했고.. 더 나아가 국가재정이라는 측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차가 벌어졌으니까 말입니다.

 

실제로 메이지 유신과정에서 에도 막부와 서부의 웅번이 전쟁을 벌일 때, 이미 기관총과 증기선들이 동원되는 전면전이 벌어졌습니다. 특히 최후 결전이라 할 수 있는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양군은 모두 서양의 총으로 무장했으며, 히고번 같은 경우에는 서양식 대포 및 후장총(=라이플)마저 채택되어 있었죠. 그리고 양측의 병력이 무려 7만 명 이상이었습니다. 

 

동학농민전쟁 때, 죽창으로 무장한 농민군에게 속절없이 무너지던 조선군과 너무나 대비되는 대목이라 생각합니다. 왜 이렇게 조선은 경쟁력, 특히 군사력을 잃어버렸을까? 이에 대해서는 바로 '빈약한 정부 재정'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되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번에 보다 자세히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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